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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성경자료 모음

[스크랩]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의 진정성에 대하여 재고해 보아야 한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의 진정성에 대하여 재고해 보아야 한다   
에스라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원만하게 이해한 후에야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도 바르게 해석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간문(편지체)은 어렵지 않게 쓰기는 하지만 때로는 서간문이라도 어려울 수가 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서간문들이 일방통행이기 때문이다. 편지를 받는 사람의 입장과 형편과 처지를 모르는 가운데 한 편의 말만들으면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해 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우리는 고린도 전서를 통하여 바울의 글만 읽을 수 있을 뿐 고린도 교인들의 말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고린도 전서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원만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고린도 전서 12장을 은사장이라고 말하고 13장을 사랑장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2장 13장 14장까지 모두가 은사에 관한 말씀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대부분의 목사들이 인식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유치한 단계에 있었던 것과 같이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 신앙 역시 너무 유치한 단계에 머물러 있고 또 성장도 안되고 성화도 되지않고 있으며 성숙은 아예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이다.

고린도 전서가 기록될 당시의 고린도 성도들의 신앙은
영적으로 보았을 때 미숙하고 어린 수준이었다.(고전 3:1)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싸르키노이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수준이란 그들이 비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유아기(네피오스) 즉 젖이나 먹는 사람들로 지목하고 있다. 젖을 먹어야 하는 수준이란 사람에게 의존된 수준이란 뜻이다. 젖이 떨어져서 밥을 먹을 수 있고 스스로 농사를 짓고 양식을 마련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게 되어야 장성한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아직은 그러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방언이 나타나고 예언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신령한 교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초보적인 수준에서 그러한 이적이나 표적이 있었다.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어떤 교회든지 그랬다. 모세의 기도로 이스라엘 장로 70인에게 성령이 임하셨을 때도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민 11: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사울에가도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하실 때 얼마간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않았다.
(삼상 10:13) 사울이 예언하기를 마치고 산당으로 가니라



고린도 교회가 미성숙했다는 증거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한 기간은 불과 1년 6개월 정도였다. 오늘날과 같이 교육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는 시대에도 1년 6개월 정도는 짧은 시간이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고린도 교회에는 책들도 흔하지 않았고 대다수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때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수준이란 아직 어린 상태였다.

오늘날과 같이 학력이 높고 교회 교육을 위한 기재나 교재가 발달 한 시대라도 1년 6개월 된 성도의 수준은 영적으로는 미숙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물며 2000년 전의 고린도 교회의 수준이 아직은 미성숙 단계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린도 전서와 후서를 읽어 보면 고린도 교회의 수준을 알 수 있다.

01. 바울이 그들을 밥으로 먹였던 것이 아니라 젖으로 먹였던 사람들이었다. (고전3:2)
02. 시기와 분쟁과 다툼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아직은 어리다는 증거이다.(고전 3:3)
03. 사람을 중심으로 파당을 짓는다는 것이 그들이 아직은 미성숙하다는 증거이다.(고전3:4)
04.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추구했던 것이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인 것들이었다.
05. 스스로 문제 해결을 못했기 때문에 디모데를 보내고 디도를 보내야 했다.(고전 4:17)
06. 분수를 모르고 교만하다는 것 자체가 미성숙하다는 증거이다.(고전4:18)
07. 분별과 판단을 할 사람이 없어서 성도 간에 송사를 일삼고 있었다.(고전6:1~8)
08. 어린 아이들처럼 먹고 마시는 일에도 절제를 못하는 수준이었다.(고전8: 1~13)
09. 사도들의 고난과 희생에 대해서도 아직은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고전(:1~27)
10. 교회 덕을 세우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고전10:1~33)
11. 고린도 교회는 여자들이 천박하게 나서서 떠들며 설쳐대는 교회였다.
12. 주일 예배를 드린 후에 가지던 애찬도 그들에게는 덕이 되지 못했다.
13. 어떤 사람들에게 신비스러운 은사들이 나타났지만 혼란에 빠져 있었다.(고전 12:1~2)
14. 어떤 사람은 악령에 사로잡혀서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떠들어댔다.(고전 12:3)
15. 어떤 사람은 아볼로를 무시하면서 성령을 받지 않은 자라고 떠들었다.(고전12:3)
16. 신비로운 은사들이 나타나자 그러한 은사를 주는 신들이 각각 다른 줄로 알았다.
17.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은 오순절에 나타난 표적으로서의 방언이 아니었다.
18.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준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이었다.
19. 사소한 문제들도 스스로 분별하고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못했다.
20. 고린도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은 사람도 몇 사람 되지 않았었다.

은사주의나 신비주의에 치우친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한 방언이 나타났던 고린도 교회가 신령한 교회인줄로 착각을 하고 있지만 위에 열거한 모든 증거들은 고린도 교회가 결코 신령하고 성숙한 교회가 아니라 아직은 미성숙한 수준이었음을 증거한다.

아러한 고린도 교회에 갑짜기 이상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이때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선교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 이상한 방언이 나돌게 된 사연을 모르고 있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의 진정성

첫째,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이 나타났던 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있을 동안에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나 가이사랴, 에베소에서는 방언을 나타나면서 하나님을 높이는
모습이 보였지만 고린도에서는 전혀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둘째, 바울은 그들이 무슨 방언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직접 가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고린도에 이상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방언들에 대하여 자세히 알수가 없었다.
바울이 고린도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은 글로에의 집 편으로 알게 되었고
아볼로가 에베소에 와서 대략 이야기를 해서 알게 되었으며 스테바나 브도나도
그리고 아가이고 집사가 와서 하는 말을 듣고 대략 알게 되었다.

셋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찾아 볼 수가 없고 반면에 시기와 다툼과 교만과 자랑과 성냄과 떠드는 것과
요란한 것과 무질서와 아볼로를 괴롭혀서 사임하게 하는 것과
심지어 바울사도까지도 배척하면서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떠드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과 가이사랴에 나타난 방언과 에베소에 나타났던 것과는 달리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고 통역도 되지 않는 방언이었다면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고린도 방언사건 이전의 방언에 대해서는 통역이 필요했다는 언급이 없었다.
그 이유는 들어야 할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외국 방언을 직접했기 때문이었다.

다섯째,고린도 교회를 그렇게 어지럽히던 방언 문제가 디모데가 가서 수습한 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고 교회는 잠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디모데가 다녀 온 후
아직도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었지만 문제의 그 이상한 방언으로 교회를 어렵게 했던
사람들은 잠잠하게 되었고 고린도 후서 어디에도 다시는 방언문제는 언급이 없다.

여섯째, 사도 바울이 기록한 13 편의 서신들 중에 어디에서도 방언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고린도에서만 그 방언이 잠깐동안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그 방언들의 진정성에
석연치 않는 점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화평의 하나님이신데 과연 성령님께서 은사로 주신 방언이 그렇게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이상한 방언을 주셨을 가능성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고전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던 사례


1. 오순절 예루살렘에 나타난 방언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에는 통역이 필요 없는 표적으로서의 방언이었고 이는 성령님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 들은 사람들은 대략 16개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서 놀라운 표적의 보게 되었다.

표적으로서의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던 때는 예수님 부활 이후 첫 오순절이었다. 이 때 나타난 방언은 통역이 필요 없는 방언이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 중심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도 바로 말하는 방언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복음과 부활의 소식을 모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16개국에서 흩어져 살다가 유월절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 와서 이왕에 먼 길을 왔었기 때문에 기다려서 오순절까지 보고 돌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여러 민족들을 향하여 외국 언어를 배운 적이 없는 120명의 제자들의 입을 통해 특별히 역사하셔서 그들이 살던 그 나라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던 표적이었다.

그 16개국은 바대(Parthians), 메대(Medes),엘람(Elamites), 메소보타미아(Mesopotamia), 유대(Judea), 가파도기아(Cappadocia), 본도(Pontus), 아시아(Asia), 브루기아(Phrygia), 밤빌리아(Pamphylia), 애굽(Egypt), 구레네(Cyrene), 리비야(Libya), 로마(Rome), 그레데(Cretans), 아라비아(Arabs) 등이었다.


2. 가이사랴의 코넬리우스 백부장의 집
베드로 사도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중에 성령님이 임하시면서 역시 방언이 나타나고 하나님을 높여 찬양하는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방언에 대하여 어떤 특이한 점이 지적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서 오순절 때에 예루살렘에 나타났던 방언과 같은 방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집의 주인 코넬리우스는 경건하여 기도하고 구제를 많이 하는 선한 사람이었는데 베드로가 설교를 하는 중에 성령님이 임하신 표적으로써 이는 베드로의 설교에 나타난 진리를 성령님께서 확증하여 주신 것이다. 이때 나타난 방언도 통역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로마 백부장이나 기타 로마 사람들이 주로 모여있었기 때문에 로마(Rome) 방언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3. 에베소에 나타난 방언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여 예수님께 대한 설교를 하고 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면서 안수를 하는데 성령님께서 임하시면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정도 되었다.(행19:5~7)

당시의 에베소는 아시아의 관문이었고 서방 세계에서 동방으로 들어가는 현관과 같은 곳이라서 그리스(Hella) 사람들이나 로마 사람들이나 기타 아시아 여러 지방 사람들이 그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방언을 들었다.

이때도 전혀 통역이 필요하지 않는 외국어로서의 방언이었다. 에베소에 나타난 방언에 대해서도 특이한 점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역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나타난 방언과 같은 방언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4.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
지금까지 예루살렘과 가이사랴 그리고 에베소에서는 같은 방언이 나타났었던 방언들에서는 상이한 점이 없었으며 세 번 모두 그런 현장에는 사도가 함께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은 지금까지 나타났던 표적으로서의 방언과는 현저하게 다른 방언이었다.

만약 그런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방언이었다면 통역 없이 알아듣게 하셨든지 아니면 통역하는 사람도 함께 세우셨을 것이나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은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또 통역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의 특징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면이 많다.

01.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다.
02. 사도들이 그 현장에 없었을 때에 나타났다.
03. 대체로 여성들에게 그러한 이상한 방언이 나타났다.
04. 성령님의 임재와 함께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05.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자랑하고 교만했다.
06.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아볼로를 멸시했다.
07.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불의를 기뻐했다.
08. 방언을 하는 여자들 중에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했다.
09. 방언을 하는 여자들이 전혀 사랑으로 하지 않았다.
10.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은 신령한 자라고 생각했다.
11.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질서를 지키지 않았다.
12. 방언을 하는 사람들 스스로 통역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3. 방언을 하는 사람들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15.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무례하게 행하였다.
16.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유익만 생각했다.
17. 방언을 한다고 하면서 성 내고 악한 것을 생각했다.
18.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전혀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했다.
19.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전혀 참을성이 없고 온유하지 않았다.
20. 방언을 하는 어떤 사람들은 시기 질투를 하기도 했다.
21.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고전16:22)
22. 고린도에서는 거짓 사도들과 궤휼의 역군들이 움직이고 있었다.(고후 11:13)
23. 고린도에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다.(고후 11:4)
24. 바울이 전하지 않은 다른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후 11:4)
25. 바울이 전하지 않은 다른 영을 받게 하는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었다.(고후 11:4)
26. 고린도 교회에 사단의 일군들이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후 11:15)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위에 보이는 여러 가지 정황은 20세기에 갑자기 나타나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은사주의 신비주의 신사도주의에 치우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방언과 판에 박은듯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궤휼의 역군, 거짓 사도들이, 다른 예수의 다른 복음을 전하면서 다른 영을 받게하여 통역 없이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짓 방언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고린도 교회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일에 가장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여성들이었고 또 이상한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어이없게도 이들이 자신들은 바울에게 속했다고 떠들어대는 여자들이었다.



그때 고린도 교회에서 이상한 방언을 말하면서 자신들이 바울과 같이 방언을 말할 수 있다고 하여 바울과 자신들을 동등으로 착각하고 우쭐대면서 고린도 교회에서 아예 왕 노릇하려고 했다. 이들은 참으로 바울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수습하기 위하여 아볼로가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결국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고 고린도 교회를 떠나서
에베소에 있는 바울사도에게로 건너왔었다.


교회를 아끼는 몇 사람이 수습을 해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가닥을 잡을 수가 없게 되자 고린도 교회를 진심으로 아끼는 몇 사람이 바울이 선교하고 있었던 에베소로 찾아 왔다. 스테바나와 브도나도와 아가이고와 같은 사람들은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정황을 자세하게 보고함으로써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진상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에 대하여 직접 들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염려는 하면서도 딱히 금하지는 못하고 단지 어떤 은사나 능력이 있다고 해도 사랑으로 하라는 정도로 지도하고 있다.


스테바나와 브도나도와 아가이고 집사가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 온 것은 이상한 방언들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 대책을 의논하려는 의미도 있지만 아볼로를 다시 모시고 고린도로 돌아가려는 소원을 가지고 에베소로 건너왔었고 또 이를 바울에게 간곡히 부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볼로의 태도가 워낙 완강하여 다시는 고린도에 돌아갈 뜻이 일절 없다고 단호하게 잘라서 거절하고 말았다.


이에 바울은 할수 없이 아볼로를 다시 고린도에 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스테바나 일행을 보내면서 디모데를 같이 보내었고 디모데가 고린도 전서를 가지고 가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읽어 주고 설명을 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수습하려고 눈물로 호소하면서 애를 써 보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방언 문제만큼은 디모데가 다녀 온 후에 수습이 되었던 것 같이 보인다.


지금까지 은사주의 혹은 신비주의에 치우친 사람들은 이러한 사연들을 거의 잘 알지 못하고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을 성령님의 은사로써의 방언이라고 너무 단순하게 믿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디모데가 고린도에 가서 어떤 사역을 어떻게 감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는 이상한 방언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때 고린도에 잠시 동안 나타났던 이상한 방언은 사도 바울이 떠나고 교회에 지도자가 없는 틈을 타서 사탄이 성령님의 방언을 모방한 모조 방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 사실 방언의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는데 디모데가 가서 고린도전서에 기록한 내용 즉 고린도 전서 12장과 13장과 14장을 가지고 진지하게 증거하고 온 후로는 고린도의 방언 문제는 일단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 문제가 어떻게 해결 되었는지는 소상하게 알 수가 없지만 바울이 쓴 고린도 전서 12장 13장 14장을 제대로 읽어 보았다면 한동안 이상한 방언으로 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사람들이 스로를 돌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이상한 방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01. 바울이 여러 은사들을 열거하면서 방언의 은사를 우월한 은사로 말하지 않고 맨 끝에 두었다.
02. 바울이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꽹과리와 같은 것이라고 혹평을 하였다.
03. 바울은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떠들면서 방언하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04.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교회에 아무런 덕을 세우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05.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성령님의 은사라고 할지라도
예언하는 자만 같지 못하다고 정확하게 지적을 했다.
06. 폐일언하고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명령을 했다.
07.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예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라고 했다.
08. 통역이 있다 해도 다불과 두 사람 혹은 세 사람 정도가 교회 지도자의 지도를 받아서
순서를 따라서 질서 있게 하라고 명령을 분명히 했다.
09.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할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10. 율법대로 여자는 오직 복종할 것을 엄히 명하였다.
11. 여자들이 교회에서 떠드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단호하게 질책을 했다.
12. 바울은 어떤 착각하는 여자들에게 스스로 신령한 줄로 알거나
스스로 무슨 선지자로 여기는 여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님의 명령인줄로 알라! 하고 엄하게 말했다.


디모데가 비록 젊고 미숙 하지만 이렇게 단호한 바울의 명령을 읽어 주었을 때
그렇게 난동을 부리면서 이상한 방언을 하던 여자들은 시무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탄은 그렇게 쉽게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고린도 후서를 유의하여 살펴보면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돌아 온 후 고린도에서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분별없이 방언을 추구하면서 무리한 이론으로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방언은 하늘의 언어인가 ?

오순절에 임했던 방언과 가이사랴의 코넬리우스 집에 나타난 방언과 에베소에서 나타났던 방언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나타난 언어였지만 이는 하늘의 언어가 아니고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언어였다.

반면에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이상한 방언은 통역도 되지 않았고 또 얼마 후에는 그치게 되었던 방언은 설사 성령님의 은사라고 할지라도 하늘의 언어도 아니고 성령님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My Spieit = 프뉴마 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고린도 교회 이후의 방언이 계속되었는가?


고린도 교회에 한 때 잠시 나타났던 이상한 방언은 그 후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고 바울 사도의 다른 서신 어디에도 다시는 언급도 되지 않았다. 사도 시대 이후부터 20세기 이전까지 교회사적으로 돌아보면 아주 드물게 비성경적인 방언을 주장하는 집단들이 있어 왔다.


2세기의 방언
몬타누스파의 사람들 중에 방언현상이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의 영지주의나 오늘날의 몰몬교처럼 공인된 이단이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몬타너스를 가리켜 "그는 거짓 교사였으며 귀신이 들린 사람이었다"고 기록했다.


17세기의 방언,
사도 시대 이후 1,500년간 방언이 없었다가 17세기 말경 프랑스 남부에서 어떤 무리가 이상한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18세기의 방언
18세기 중엽에는 미국의 퀘이커교도들이 춤추면서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19세 기의 방언
가톨릭의 사도 교회의 방언과 19세기 중엽 몰몬교에서 수백 명의 장로들이 자기네 성전 봉헌식 때 집단적으로 방언을 했던 사례가 있었다.


20세기의 방언
20세기 이전의 방언들은 모두 이단 집단이거나 광신도 집단들에서 방언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20세기에 등장한 방언은 20세기 초에 오순절파 계통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1960년대 이후 여러 오순절 계통의 교단들이 활동하면서 방언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초창기에 이들은 기성 교단으로부터 이단시되었다. 그러한 방언이 시간이 흐르면서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오늘날에는 국내 대부분의 교파에서 행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방언 집회까지 열리고 있는 실정이 되었다.


문제는 작금에 문제가 되고 있는 방언들 대부분이 오순절의 방언과는 현저하게 다른 방언이고 대개는 알 수 없는 방언 즉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방언과 같은 종류의 방언이라는 점이다. 만약 사도들이 없는 데서 나타났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가짜 방언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오늘 날 교회에 만연되어 가고 있는 방언들은 가짜라고 볼 수가 있다.


도날드 버딕은 현대 방언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열거 한다.

① 항상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경우가 대분이다.
②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의 언어적 배경이 비슷하다,
③ 한두 개의 모음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④ 문법적인 구조도 없고 언어적인 요소가 부족하다,
⑤ 방언의 길이에 비해 통역이 현저히 너무 길다,
⑥ 동일한 방언 구절의 통역이라도 번번히 일치하지 않는다,
⑦ 영어 통역시 주로 17세기 초의 흠정역(KJV) 문체가 사용된다.


방언을 하는 사람은 기도방언을 했는데 통역은 설교를 한다.
방언을 한 사람은 방언으로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통역은 예언이 나온다.
짧은 방언을 길게 통역하고 길게 말한 방언문장을 짧게 통역한다.
같은 방언을 다른 통역자에게 들고 가서 통역을 하면 다르게 통역한다.
같은 방언을 같은 통역자에게 들고 가면 그때마다 다른 통역을 한다.


미쉬간 대학의 언어학자 케넷 파이크와 미국 성서공회의 언어학자 유진 니다 등은 오늘날의 방언이 언어학이 다룬 어떤 실제적 언어와도 비슷하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분별력이 있는 목회자라면 먼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방언이 어떤 것이었으며 그 의미와 진정성을 충분히 인식한 후에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 대한 오해

은사주의에 치우친 사람들은 오늘날 알 수 없는 방언을 두고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언들의 성취라고 오해하고 있다.

“믿는 자들에게는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① 모든 믿는 사람들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② 모든 믿는 사람들마다 새 방언을 말하며
③ 모든 믿는 사람들마다 뱀을 집으며
④ 모든 믿는 사람들마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⑤ 모든 믿는 사람들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치유가 되는가?


이러한 말씀이 모든 시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새 방언을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도 할 것을 예언하신 것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들은 오순절과 가이사랴에서 이루어졌고 또 에베소에서 확실하게 이루어졌던 말씀이었다.


사람이 뱀을 집어서 물리게 되었는데 해를 받지 않았던 사건도 특수한 경우에 특별한 사람에게 일어나기도 했던 일이다.(행28:3)

사람의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 요한 행전을 보면 사도 요한이 도니티아누스 황제 앞에서 독약을 마셨는데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고 독약을 마시게 하여 죽었던 사람까지 살려내었던 사건도 실제도 일어났었다.


병든 사람들에게 손을 얹어서 낫게 한 이들도 사도들의 시대에 여러 차례 이루어진 표적들이었다.
이러한 표적들이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어떤 보장도 없었고 또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표적들은 대개 사도들의 시대에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과 그들이 기록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증빙하는 차원에서 표적이 따르게 하셨다.


방언 기도는 성령의 기도가 아니다

고전14:14절에 바울은 만약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이는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방언기도는 그것이 설사 정상적인 것이라 해도 사람의 영이 하는 기도일 뿐 결코 성령의 기도라고는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은사주의에 치우쳐서 진리를 잘 못 가르치는 사람들은 방언기도를 성령의 기도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이론의 근거를 유다서 20절이라고 들이대고 있다. 그러나 유다서 20절의 의미는 그러한 뜻이 아니다. 유다서 20절을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6:18절에 나온 바와 같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엉터리 해석이다.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유 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지금까지 은사주의자들이 떠들어 대는 대부분의 방언들이 여러가지 면에서 살펴 볼 때 오순절에 나타난 표적으로서의 방언과는 거리가 멀고 대부분 고린도에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던 이상한 방언들과 거의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유창하게 방언으로 또박 또박 말하고 성실하게 통역을 하는 경우라도 나중에 보면 99%가 가짜 방언이요 가짜 통역이었다.

심지어 방언으로 예언한 것을 통역으로 예언하면서 녹음까지 해서
전국 교회에 다 돌리기까지 했던 그 수 많은 방언들과 통역들이
결과적으로 보면 100% 다 가짜였다.[ 1992년의 열풍이란 책을 읽어 보라]

작금에 미국이나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분별없이 추구하는 신비주의나 은사주의는 매우 위험하고 문제가 될 수 있다. 마귀가 사람들을 속이기에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방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아예 판단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러한 현상이 만약 성령님의 은사라면 자신들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지나 않을까 하여 지레 겁을 먹고는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그러한 것을 사모하고 또 그렇게 미신적으로 약간 신비한 점이 있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파악한 목사들은 기를 쓰고 그러한 방언을 받아 보겠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때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이 가짜였다면 오늘날 모든 종교에 다 나타나고 있는 방언이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만연되고 있는 방언은 오순절에 나타났던 방언과 다르고 가이사랴에 나타났던 방언이나 에베소에 나타난 방언과 다르다.

따라서 작금에 온 세계 모든 종교 집회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방언,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알아 들을 수 없으며 통역이 되지 않거나 통역까지 엉터리 통역을 하게 하는 영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들의 기만일 가능성이 있다.

다른 모든 종교를 속일 수 있는 악령들이라면 성경도 모르는 목사들이나 기독교인들이라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사람들을 속이려 하는 악령이라면 다른 종교인들보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을 더 속이려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이 시대와 말세에는 분별이 필요하다.

(요일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도키마제테=검증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바울이 살아 있고 사도 요한이 살아 있었을 때에도 저런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났다면 그로부터 2000 년이 지난 오늘날 또 말세가 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야 악령들이 얼마나 설치겠는가? 자기들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악령들이 교회를 공략하하려 하지 않겠는가?

더 두려워 해야할 것은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악령들로 하여금 역사하게 하사 진리를 쫓지 않고 거짓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그러한 속임수에 빠지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진리의 사랑을 받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려고 하지 않고 ,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려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속이는 악령들을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살후 2 : 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날 분별 없이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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