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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성경자료 모음

[스크랩] 신약시대에 유대교에 있던 종파 고찰

신약시대에 유대교에 있던 종파 고찰


Ⅰ.  序  論


  신약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팔레스틴에는 수많은 유대교 종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신약성경은 막7:3-4에서 바리새파를, 막12:18-27에서는 사두개파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외에도 많은 유대 종파가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럼으로 신약 성서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타 유대종교를 고찰함으로써 신약성서의 배경을 이해하는 초석을 깔수 있다고 보여진다.  유대교 종파중에서 신약성경에 기록된 종파뿐만 아니라 헬라 사상을 받았을 것으로 보여지는 종파와, 민족주의 성향을 가졌을 종파등을 추적해보고 로마의 압제하에 있던 유대인들과의 관계성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해석과 비판이 아닌 예수 탄생 전후 약 2세기를 경계로 하여 설명중심으로 본 주제를 진행하고자 한다.


Ⅱ.  유대인의 종교 생활


  유대인은 공통된 종교와 역사를 통하여 하나로 결합된 민족이었다.  유대인 자신들은 유일신 하나님에 의하여 지상의 민족들 중에서 선택되었다고 믿고 있었고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 중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계약을 맺은 사실과 그 계약의 표로써 할례를 준 사실과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고 율법을 주신 일들은 가장 중요시 되었다. 특히 하나님의 율법을 통하여 그의 도덕적 요구를 알게 하셨다.  그리하여 유대인은 율법에 의하여 살았고 율법은 유대인 종교의 핵심이었다.  또 유대인에게 가장 중시된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는데, 이곳은 그들의 유일한 예배와 희생제사를 드리는 성소가 되었으며 그들의 역사와 율법과 신앙내용을 담고 있는 성서를 중시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의 표였으며 모든 유대인은 할례를 받았고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자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어릴때 부터 성서를 가르쳤다.  가정에서 부터 성서교육이 시작되었고,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가정에서 성서의 교훈을 가르치고 종교적인 훈련을 시켰다.

  또 유대지역은 물론 국외의 흩어져 있는 유대인 거주지역에는 어디나 회당(synagogues)이 있어서 성서를 읽고 강론하였다.  회당의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B.C 3C에는 에집트의  유대인 사회에 회당이 있었고 2C에는 안디옥에도 있었다.  팔레스틴 밖의 유대인들에게는 타향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율법을 강론할 수 있는 회당이 절실히 필요하였고 그리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부터 회당제도가 발전하여 후에는 유대 지

역으로 퍼졌고 예수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모여사는 마을에는 어디에나 회당이 있었다.

회당에는 3명의 회당장이 있어서 회당예배를 진행케 하였는데 적어도 10명의 남자가 출석해야 예배가 진행될 수 있었다.  회당에는 법궤가 있었고 그 속에는 두루마리 성경이 보존되어 있었다.  회당예배는 안식일 오전에 실시되었고 안식일 오후에는 다른 종교의식이 있었으며 월요일과 목요일에도 예배를 드렸다.  회당예배는 성서(토라(모세5경),예언서)를 읽고 해석하는 교훈적 부분과 의식적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성경봉독 후에는 설교가 있었다.  회당장이 성경봉독자를 선정하여 읽게 했는데, 예수도 이러한 관례를 따라 성경을 읽고 설교를 했으며, 특히 사도바울은 선교 여행중 여러 지역의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설교하여 회당을 전도의 거점으로 삼았다.  특히 회당 주변에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 개종자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유대인들도 있어

초기 기독교 발전에 회당의 역활은 매우 컸다.  또 초기 기독교는 회당 예배의식을 본 받아 기도, 성격봉독, 설교를 예배의 중요 순서로 삼았다.

  유대인의 역사와 종교는 유대인들을 강하게 하나로 결합시켰으나 다른 민족과는 완전하게 구별되었다.  유대인들은 다신교적 세계속에서 특유한 유일신 신앙을 가졌다.  또 안식일을 엄하게 지켰다.  안식일에는 행군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병역에서도 면제 되었다.  또 유대인들은 정결한 것과 불결한 것을 구별하였다.  그래서 초기 교회신자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유대인의 관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나 사도바울은 그와 같은 엄격한 구별에 얽매이지 않았다.  불결한 것은 음식물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람이나 물체에도 해당되었다.  유대인의 정신적인, 종교적인 중심지는 예루살렘이요, 그곳에 있는 그 성전이었다. 헤롯왕은 성전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재건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사람은 멀리서도 웅장한 성전을 볼 수 있었다.  성전 구역의 맨 겉은 바깥 뜰로서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곳에서 매일 드리는 희생제사와 많은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상행위가 벌어졌다.  바깥뜰은 안쪽 뜰과 분리되어 있었고 이방인은 이 안쪽 뜰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자들의 뜰은 따로 있었고 남자들만 성전에 들어가 예배에 참석하였다.  성전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곳으로 대표적 제사는 번제로서 하루에 아침 저녁 두번씩 드렸다.  제사장은 제사장 가문의 사람으로 신체적 결함이 없어야 했고 이스라엘 처녀와 걸혼해야 했다.

  유대인의 삼대 절기중 유월절(passover)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12세 이상의 유대인은 다 지킬 의무가 있었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때 애굽천지에 임한 장자가 죽는 화가 이스라엘 집은 넘어간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에집트의 노예생활에서 민족을 구출해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기념하며 어린양을 잡아 먹었다.  유월절이 지나고 50일 후에는 오순절 축제가 시작되었다.  오순절은 곡식의 추수를 끝마친데 대하여 드리는 감사의 축제로 첫 열매를 성전으로 가져와 봉헌 함으로 개최되었다.  장막절(혹은 초막절)은 가을에 열린 축제로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7일동안 장막에서 생활하였다.


Ⅲ.  유대교의 종파


  유대교 종파들의 발생은 헬레니즘의 영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해외에 살던 유대인 뿐만 아니라 팔레스틴에 있던 유대인들도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헬라문화를 동경하며 헬라식 이름을 받아들이고 헬라 철학을 수용하는 사람이 늘게 되었다.  이와같은 상황에 반대한 유대인들은 하시딤(Hasidim) 또는 앗시디안(Assidians)이라고 알려졌는데, 경건한 자들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시딤 사상의 근원은 하나님의 율법이었다.  신약시대의 사두개파는 헬레니즘과 타협하였고 바리새파1)와 엣세네파는 하시딤의 기본 교의를 보존하려고 했다.


1) 바리새파

  예수시대는 물론 그 이후에도 유대인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것은 바리새인들이었다.  바리새(pharisee)라는 용어는 분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파라스(paras), 아람어 프라스(pras), 즉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로서 모든 불결한 것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의 주변세계에서 멀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이름은 보통 흔한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은 바리새파 운동의 본질적인 특징을 잘 드러냈기 때문이다.

  바리새파 운동의 시작은 유대인의 신앙을 헬라주의적인 외세의 현저한 증대에 대항하여 지키려고 했던 마카비시대(B.C.2C)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하시딤 즉 마카비 봉기를 끌고온 경건한 사람들의 단체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의 집단으로서 생겨났다.  그들은 정치적인 목표를 안중에 두지 않고 이스라엘이 그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야 할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만 가득 채워졌었다.  바리새파의 이름은 정치와 관련하여 히르카누스 통치시대(B.C.134-104)에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이때 바리새파 사람들은 마카비家의 계승자들이 왕권과 더불어 대제사장직을 갖는데 분개하고 반대하여 결국 히스모네어 집안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 후부터 바리새파 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하여 정치적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경건한 생활, 기도,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실 미래의 전환을 준비하려고 노력 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확고한 공동체로 연합하였으며 거기에서 그들은 율법의 계명을 정확하게 준수할 수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의식적인 정결규정과 십일조를 강조 하였다.

  정결을 서술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계명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평일에는 모든 바리새파 사람들에 의해서도 엄수되어야 한다.  시체든 부정한 짐승이든 불결한 것을 접촉했거나 몸이 부정한 사람은 정결목욕탕에 가야 했으며 특별한 경우에는 정결이 인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또 식사전에 손을 씻었는데 그것은 깨끗한 손으로 기도하며 청결한 식사를 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정결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용한 그릇들의 정결에도 주의 하였다.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계명(레 27:30-33, 민 18:21-24)에 문자적으로 순종하기 위하여 그땅의 수확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구입한 것에서도 십일조를 드렸다.  그외에도 그들은 부가적인 경건행위, 즉 회개하고 이스라엘과 자기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기 위하여 일주일 두번(월,목요일), 한낮의 더위속에서도 지켰던 금식과 같은 것이었다.  또 이들은 이들이 사는 경건생활에 대하여 하나님게 감사하며 그런면에서도 다른 사람들과구별된다고 생각했다.  바리새파에는 제사장,수공업자들,농부들,상인들이 속해 있었는데 그들은 도시와 시골에 퍼져 살았으며 공동식사때에는 청결에 관한 계명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모였다.  바리새파인들은 율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했고 그들을 멀리 했다.  특히 세리와 죄인들을 경멸하고 피했다.  바리새인들은 기록된 계명 뿐 아니라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승도 존중하였다.  구전법은 사람들의 생활에 더 밀접하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구전법을 더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계명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여건에 조화시켜 그것을 준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 유대인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고 전체 유대인의 약 5%에 불과했다2).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유대인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율법학자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지도력을 장악하고 율법을 연구하며 해석하였으며 그들은 그들의 행동을 통하여 율법의 제자가 행해야 하는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그럼으로써 백성들 가운데서 높은 존망을 얻었다.  하지만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않는 사람들로부터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을 구별했으며 그들과의 교제를 피했다.  “땅의 백성(렘 1:18, 34:19)”이라는 구약 성서의 표현으로써 사람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민족(요 7:49)”을 경멸적으로 표현했으며 그들로부터 멀리하였다.  특히 세리와 죄인들에게 조심하였다.  그리고 만일 경건한 유대인이 그들과 같이 식사를 한다면 (막 2:14, 눅 15:2) 그것을 전대미문으로 여겼다.  악의로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게 율법과의 갈등속에서 살아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사람들에는 창녀들, 타락한 사람들, 그리고 이방인들과 함께 일하는 세리들이 들어간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위해서는 구약성서의 후대의 문헌들 안에 몇 개의 근거가 있다.(사 24-27장, 단 12:1-3)  그러나 사람들은 그 밖에도 그것이 구전으로 계속 이어져 오면서 발전된 성서 전체의 해석에 근거를 두었다.  죽은자가 다시 일으킴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를 확고하게 공식화된 교리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이것을 통해서 사두개파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였다.(행 23:8)  그리고 그들은 부활신앙을 통해서 강한 메시아 희망을 보존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에 다가오는 메시아 시대를 향하게 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성취하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실수하여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하여 “율법의 울타리”를 둘렀다.  경건한 사람들도 때때로 범하는 죄를 보상하기 위하여 추가적인 경건의 업적을 통해서 과잉의 선행을 쌓도록 노력하였다.  그 선행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판결을 “의”라고 내려지게 하여 잘못들을 상쇄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기도와 행동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생활을 하기 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마 6:2)  예수시대에는 바리새파의 발전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었으며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그들의 사상을 가장 광범위하고 논리적으로 전개시켰다. 그들은 새로운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조상들의 율법해석, 곧 장로들의 전통을 적용하였다. 그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적용하는 일과 성서해석을 중시하였다.  그들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각 단어는 물론 각 음절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바리새인은 대중 앞에서 모범적으로 정확한 행동을 하고 그와 반대되는 생활은 규탄을 받았다.  이 결과 바리새인은 외식적인 경건을 갖게 되었고 예수는 그 외식을 규탄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유대사회에 나타나 새로운 내용의 교훈을 주었을때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반발하였다.  예수는 그들이 중시하는 분리된 생활을 무시하는 불경한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그들은 예수가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예수를 공격해서 그를 제거해 버리려고 결정했고, 예수가 예루살렘에 왔을때 사두개파 사람들과 협력하여 예수를 정죄하고 로마 총독에게 넘겨준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멀망할 때까지 산헤드린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행 5:34-40)  그래서 이 바리새파 운동은 70년 이후 회당의 정신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들이 대표하는 교리는 일반적으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생활과 행동은 참된 이스라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일에 집중되었다. 이는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것이 아닌,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오류를 낳고 말았다.  하지만 이 바리새파의 영향은 율법주의적 성경관을 낳게 되고 신약을 보는 눈을 가리우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 사두개파

  사두개인들(Sadducees)이라는 칭호는 사독(zadok)이라는 사람에게서 온것인데 사독은 다윗시대의 대제사장 사독과 같은 사람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그들의 조상인 그에게서 존래되었다.  에스겔서 40-48장에 이스라엘,즉 그 땅과 성소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는 설계도에는 사독의 아들들에게 사제 직분이 위임되었다.(겔 40:46, 43:19)  사독 집안은 그 다음 유배 이후 공동체를 형성할때 중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예루살렘에서 합법적인 사제들로서 인정되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루살렘 귀족사회에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여기에는 주로 대제사장과 영향력있는 예루살렘의 명문들이 속해 있었다.  이처럼 일부 귀족층 외에는 사두개인이 될 수 없어 사두개파는 폐쇄적이었다.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산헤드린에 들어온 이후부터 비록 사두개파 사람들이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항상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견을 고수해야만 하였다.

  사두개인들은 토라(오경)만을 표준으로 생각하였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높이 평가했던 구전을 기록된 문헌과 똑같은 등급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사두개파 사람들 가운데는 율법해석에 대한 물음에 관하여 연구하고 결정해야 하는 몇몇 율법학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초월적인 세계를 불신하며 천사와 영들을 믿지 않는 다는것(행 23:8)은 그들의 꾸밈없는 사상에 상응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최후의 심판날에 죽은자들이 무덤에서 일으킴을 받으리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마가복음 12장 18-27절은 예수에게 사두개파에 속한 사람들이 제기한 물음으로써 그들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다.(출 3:6)  왜냐면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사람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그 조상들의 이름은 죽은 자들이 부활 한다는 것을 보증한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안식일이 아주 신중하게 준수되어야 하고 사람들이 안식일의 계명을 약화시키거나 거스리기 위해서 머리를 짜내어 생각해낸 결의법을 통하여 이런 혹은 저런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엄격하게 생각했다.  주어지는 벌은 율법의 규정에 일치해야 하였다.  재판에서 바리새파는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하여 관대한 편이었으나 사두개파는 엄격하였다.  그래서 유대 법정에서 내리는 사형 선고는 언제나 돌로 쳐 죽이는 것으로 집행되었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이미 하스모네어 집안 밑에서도 예루살렘에서 명망있는 관직에 취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들은 언제나 차안(此岸)과 관계된 신앙을 세상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와 결합시키려고 노력하였던 것 처럼 그들은 그때 그때의 정부를 인정하였으며 백성들 가운데서 비등해지는 로마인에 대한 적개심을 억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적극적인 저항운동을 주장하였던 혁명당원들의 적이었다.  또한 이방인 정부에 내적으로 거부하면서 대립하여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의 적이기도 하였다.  로마인에 대한 폭동이 일어났을때 그들은 무력 대결을 저지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허사였다.  예루살렘의 멸망(A.D.70)은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렸다.  도시와 성전이 파괴될때 사두개파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유대 공동체의 재건은 단지 그 재난을 견디어낸 바리새파 사람들에 의해서만 결정 되었다.


3)  열심당(혁명당원들)

  열심당(Zealots)의 기원은 멀리 마카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바리새파가 하시딤의 후계자라면 열심당은 마카비왕조의 정신적인 후계자라고 볼 수 있다. 즉 유대인 중에는 투쟁적인 민족주의 노선에서 유대교의 활로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카비 전쟁의 중추적 역활을 했고 종교의 자유뿐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였다.  그후 A.D.6년에 유대인 통치자 아르케라우스(Archelaus)가 해임되고 로마인 스스로가 유대땅을 지배하게 되었을때 애국적 민족주의자들은 여기에 분개하였고 다시 민족주의 감정은 불타올랐다.  그리하여 신약시대에 들어와 소위 열심당이 나타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과격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3). 이 혁명당원들은 모든 교회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 후 바리새파 사람들의 이해와 일치하였으나 “그들은 아주 끈기있게 자유에 매달려 있으며 하나님만을 그들이 주와 왕으로 인정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4). 황제를 주로 인정하고 세금을 납부한 사람은 첫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 되었다.

  혁명당원들은 로마 황제의 지배에 복종하고 그를 퀴리오스(主)라고 부르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미래의 메시아적인 전환기를 참고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역사의 진행을 결정하려교 하였다.  그들의 창시자인 갈리의 유다는 기원후 1세기 초에 그의 지휘하에 백성의 큰 무리를 선동하였다.(행 5:37)  유다처럼 다른 메시아적 예언자들이 등장하여(행 5:36, 21:38)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기적적인 종말의 시작을 체험하기 위하여 광야로 나아갔다.  친 로마적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열심당을 산적,강도나 그와 비슷한 무리들로 간주했으나 그들은 그들대로의 깊은 종교적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로마의 통치에 항거한 근본 동기는 토라에 대한 그들의 열심때문 이었다. 그들은 토라를 위하여 싸울 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강력한 로마군에 대항하여 정규적인 전투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로마군이 접근하기 힘든 산악지대에 은신하여 점령군을 기습하였고, 그래서 로마인들에게는 그들이 도둑이나 노상강도들로 보였다.  로마인들은 그들에 대해서 아주 냉혹하고 격렬하게 공격했지만 추종자들은 더욱 늘어났으며 이는 이들이 율법에 대한 정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심당원들은 이방인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들은 유대 전쟁의 추진력이 되었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도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이 있었으나 예수의 의도나 활동은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예수는 정치적 메시아는 아니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폭력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열심당은 과격한 행동도 서슴치 않아 악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살해하는 과격단체로서 마지막 저항 집단들의 전멸과 함께 혁명당은 비참한 종말을 초래 하였다.


4)엣세네파

  엣세네파(Essenes)에 대하여는 요세푸스와 필로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엣세네파는 바리새파와 같이 하시딤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바리새파보다도 율법에 대한 더 엄격한 복종을 강조하였다.  그들의 수효는 약 사천명쯤 되었으며 도시보다는 주로 팔레스틴의 마을에서 살았다.  엣세네파 사람들은 정치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삶을 강력하게 규정하였던 독자적인 유대운동가들로써 그들의 이름은 아마도 외부 사람들에 의하여 붙여진 것으로 아람어의 하사야(hasaya) 즉 “경건한 사람들”에서 기원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들의 이름에는 동시에 엣세네파 사람들의 혈통에 대한 암시가 들어있다.  왜냐하면 마카비 봉기를 견디어낸,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율법에 열중하는” 경건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시딤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엣세네파 사람들은 온갖 불결함에서 멀리하기 위해 그들끼리 공동생활을 하였으며 회원의 대부분은 부정을 피하기 위하여 여자와의 관계를 피하고 독신생활을 했다.  그러나 어떤 엣세네 집단은 종족보존을 위하여 독신생활을 했다.  모든 엣세네파 사람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계명은 전체 공동체와 그 회원들의 의식적인 정결을 지키는 것이었다.

  엣세네 공동체는 우두머리의 지도하에 살았고 공동체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작은 괭이와 앞치마 그리고 흰옷을 받았다.  여기에는 정결의 계명에 부여된 중요한 의미가 나타난다.  괭이는 변소에 갈 때 배설물을 밭의 깊이 만큼 구덩이를 파서 묻어 감추기 위하여 사용되었으며 앞치마는 하나님의 광채, 즉 태양을 모욕하지 않기 위하여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려야 했다.  그리고 흰옷은 정결한 자들의 옷으로서 입었다.  입회 청원자는 우선 1년간의 시험기간을 통과해야 했다.  시험기간을 통과한 사람은 세신(洗身)을 하도록 혀용되었고 공동체의 정결의식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이 더 지나야 정회원으로 받아 들여져 공동식사에 참석 할 수 있었다.  정회원이 될때는 공동체의 모든 사람앞에서 서약을 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에 대한 의무를 다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불의를 미워할 것, 의인들의 싸움을 싸울 것, 진실을 지킬 것, 종파 사람들에게 진실할 것, 이 종파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것 등이다.

  공동체의 회원들은 그들의 개인 소유를, 모든 재산이 나누어진 공동체의 소유로 가지고 들어왔다.  하루의 일과는 일찌기 해가 뜨기전에 행하는 기도로 시작되었다.  그런 다음에 들에서 일을 하였으며 정오에는 모두 다시 모여서 찬물로 몸을 씻고 흰옷을 입고 공동식사를 하였다.  식사시간 처음과 마지막에 제사장이 식사기도를 하였다.  오후에는 저녁때 다시 식탁의 교제에 모일 때까지 일을 하였다.  엄격하게 규정된 일과는 철저한 규율로 지켜졌다.  식사는 포식할 만큼 많이 먹었다.  공동체가 모일때 강당 안에는 고요한 분위기가 지배했고 때로는 한 사람씩 엄숙한 질서 속에서 말했다.

  그들의 공동체는 엄격하게 나누어진 네계급으로 구분되었다.  후에 입회한 회원은 먼저 입회한 회원 뒤에 섰다.  그래서 그는 그를 접촉해서는 안되었다.  만일 접촉하게 되면 부정이 생겼다.  엄격한 율법의 복종에는 안식일 계명도 포함되었다.  제7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었고 모든 음식은 준비 되었다.  안식일에는 그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용변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만일 세심하게 지켜야 하는 규정들에 대해 잘못을 범하게 될 경우에는 엄격한 심판이 행하여 졌다.

  그들은 인간 영혼의 감옥은 육체라고 생각했고 영혼의 불멸은 믿었지만 육체의 부활교리는 거부했다.  인간의 불멸하는 영혼은 하늘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운명은 미리 정하여져 있으나, 영혼은 죽음 후에 몸의 쇠사슬에서 해방되고 선한 영혼들은 하늘로 올라가서 복 받는 자들의 자리에 이르며 나쁜 영혼들은 그와 반대로 캄캄한 지하 형벌의 자리에 끌려와서 마땅한 보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헬라주의화된 엣세네파 사람들의 견해를 서술한 이 배경에서 한 교회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그때 그때 부여된 진로의 숙명적인 근원을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엣세네파 사람들의 신앙과 생활은 이스라엘의 순결한 공동체가 되려는 강한 의지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여기에서 부터 바로 예리한 율법 해석과 정결 규정들의 면밀한 준수가 이해될 수 있다.

  신약성서에는 당시 하나의 종파를 이루었던 엣세네파에 대하여 언급이 없는데 어떤 학자들은 이런점을 들어 기독교와 엣세네파의 관련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교훈은 엣세네파의 율법주의와 금욕주의와는 정반대 되는 것이었으며 또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게 마시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는데 이런일은 엣세네파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다.


5)  테라페우스트 교단

  필로(philo)는 활동적인 생활을 영위한 엣세네파 사람들을 명상적인 생활에 전념한 공동체인 테라페우스트 교단과 대립시키고 있다.  테라페우스트 교단은 알렉산드리아 근교의 마레오트 호숫가에 기도원 같은 거주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일꾼 혹은 하나님의 종을 의미한다.  그 공동체 회원들의 생활은 작은 오두막 안에서 은둔자처럼 매일 성서를 연구하고 명상으로 소일했다.  그들은 일몰 후에 비로소 주어진 일용할 양식을 먹었다.  안식일에만 공동체의 모든 회원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였다.  특히 매 일곱번째 안식일이 강조되었는데 안식일 전날 밤에 그들은 공동예배와 공동식사를 하기 위하여 흰옷을 입고 왔으며 그리고 그 다음에 거룩한 밤의 축제가 계속되었다.  이 공동체도 율법에 전적으로 복종하려고 하였으며 그 훈계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였다.  테라페우스트 교단은 아마도 이집트의 디아스포라에서 독립적으로 발전된 엣세네파 운동의 지엽으로서 볼 수 있을 것이며, 초기 기독교 승려들의 집단으로 볼수 있을 것이다.


6)  쿰란 공동체

  쿰란 공동체의 기원에 대하여는 율법을 세심한 배려로서 준수할 것을 촉구하였던 예루살렘의 사제그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제들은 공동체 제도에 있어서 첫번째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들로서 메시아적 기다림을 왕적 메시아의 편에서게 될 사제적 기름부음을 받은자의 도래위에 세우는 자들이다.  성서 문헌에 대한 주석서들 속에서 쿰란 공동체를 세운 의(義)의 선생에 대한 언급이 되풀이 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성서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해석의 은사를 주셨다고 여기는 사제였다.  그를 중심으로 하여 순수함을 유지하고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축제력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던 율법에 신실한 사제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모여 들었다.  예루살렘에서는 달의 순환에 따른 월력(月曆)을 사용한 반면, 이들은 30일을 한달로 하는 열두 달과 거기에 매 4년마다 하루를 부가하여 계산하는 태양년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럼으로써 한 해는 항상 똑 같은 평일, 즉 수요일에서 시작되어 모든 축제일은 언제나 같은 평일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안식일을 엄격하게 성화하고자 하였던 이러한 견해를 끝까지 관철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율법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자기들이 비난하였던 세력있는 대제사장들과 날카로운 대립에 이르게 되었다.  대제사장과의 이러한 충돌은 의의 선생이 그를 따르는 공동체와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쫒겨나 사해변의 고적한 광야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 의의 선생의 이름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에 대한 암시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체를 이끄고 광야로 나왔으며 이사야 40장 3절에 기록된 바“사막에 주의 길을 예비하라. 광야에서 우리 하나님의 길을 평탄케 하라.”는 예언자적 요청을 통해 이 길을 본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그들이 율법을 따라 생활하기 위하여 율법을 연구하면서 주의 길을 예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었다.

  쿰란 공동체원들은 구원의 사례를 위하여 합법적인 예배의 회복을 갈망하였고 공동체는 종말에 수행되어야 할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올바른 예배를 회복하기 위하여 항상 사제들의 지도하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온 공동체원들은 사제적 정결을 유지하였으며 모든 불결을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공동체는 또 어둠의 아들들에게 대항하는 싸움을 수행하기 위하여 엄격한 계급질서 가운데서 살았다.  즉 사제들이 제일 높은 계급이었고 그 밑에는 레위인이 있었으며 다시 그 밑에는 이 공동체에 협약으로 들어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새로 이 공동체에 들어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마지막 서열의 사람들은 먼저 시험을 거쳐야 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공동 식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2년의 시련 기간이 지나면 총회의 시험에 의해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게 되고 공동체에게 마음과 심령으로 의무에 대해 맹세하게 된다. 이 사제적 공동체는 식사와 예배와 성서 연구를 위하여 함께 모였다.  누구나 이 공동체의 질서를 어긴다면 혹독한 징계를 받아야만 했다.  지극히 경미한 범죄라도 엄한 처벌을 받았다.  어리석은 말 하는 사람 3개월, 이웃사람의 말에 참견하는 사람은 10일, 총회를 하는 동안 눕거나 조는 사람은 30일 간의 처벌을 받았지만 가장 혹독한 형벌은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었다.

  공동체가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던 전쟁 상태는 빛과 어둠사이의 대립으로 서술된다. 밖에는 어두움의 아들들, 그리고 구약 성서가 자주 말하고 있는 이방 민족의 무리들 즉 에돔, 모압, 암몬, 깃딤 등이 있었다.  그러나 빛의 아들들은 천사에 의해 보호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 역사를 통하여 서로 투쟁 가운데 놓이게 된다는 두 영의 대립 개념은 구약성서 안에서와 거기에 부과된 유대 전통 안에서는 그 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란의 종교에서는 이와 비슷한 개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싸움은 태초에 정해진 것으로서 마지막 때에 이르러 선한 하나님이 악한 하나님에 대하여 승리를 거둘 때까지 계속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이원론적 교리는 하나님의 전능을 증거하고 동시에 공동체가 최후의 심판때까지 싸워야만 하는 투쟁을 설명하는데 공헌하게 된 것이다.

  신양성서에는 “초기 기독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대한 만남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느 쿰란 공동체나 엣세네파 사람들과의 대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비록 이들이 사해 해변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였지만 쿰란 공동체에서 발견된 많은 사상은 그 공동체를 초월하여 당시의 유대교 안으로 넓게 유포되었고 수용되었다.  쿰란 공동체의 신앙과 교리가 초기 기독교인들의 선포와 생활과 현저한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는 많은 특징들을 담고 있다.  사실 이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쿰란 공동체의 사상을 수용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면서 사용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신약성서의 여러 곳에서 알 수 있다.  쿰란 공동체가 예언자와 메시아적 왕과 메시아적 대제사장을 고대하였다면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단 한분만이 메시아적 왕이라는 주장에서 상반성을 볼 수 있고 또한 팔레스틴 교회는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쿰란 공동체의 선례, 재산의 공동소유, 징계 방법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쿰란 텍스트는 경건하고 율법에 신실하던 유대인들이 예수와 사도들의 시대에 생각하고, 믿고, 희망하였던 사상과 견해들을 밝혀준다.  예수와 초기 기독교인들은 복음의 선포가 구원의 시대를 고대하고 있던 당시의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제기되었던 것과 같은 문제에 대하여 타당한 답변을 준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쿰란 텍스트는 초기 기독교의 설교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배경을 밝혀주고 있다.


7)  율법학자들

  헬라주의 사대의 유대교 역사에서 율법학자들의 위치는 가장 중요하였다.  왜냐하면 율법학자들이 기원전 2세기에 형성된 여러개의 그룹들, 즉 사두개파 사람들, 바리새파 사람들, 엣세네파 사람들과 쿰란 공동체 등을 권위있게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의 활동이 시작된 기원에 대해서는 더욱 옛날로 소급된다.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일은 제사장의 임무였다.  포로시대 이후의 유대교를 율법위에 확고히 세워 놓은 에스라는 제사장이면서 서기관이었다.(에스라 7:11)  에스라는페르샤 대왕의 승락을 얻어 예루살렘 교회를 율법위에 세웠다.  그렇지만 율법학자 개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기원전 2세기 부터 비로소 전승되었으며 그리이스 이름을 가진 안티고누스 폰 소크 호(Antigonus Von Sokoho)가 그러한 첫번째 율법학자 였다.

  율법학자들의 지위가 발전된 것은 헬라주의 와의 만남과의 대결에서 온 결과였을 것이다.  헬라 정신의 강력한 영향에 대하여 옛 제사장의 가르침만으로는 교훈을 찾지 못하였고 오히려 성서를 연구하고 객관적이며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희랍인들의 정신적인 도구와 방법을 사용해야만 하였다.  희랍인들이 선생의 권위를 주장하여 그들의 많은 이름들을 철학의 학파들 속에 간직하여 온 것처럼 사람들은 율법학자들 가운데서도 에스라와 대 회당의 남자들에 이어지는 일련의 명망있는 학자들의 이름들을 헤아렸다.  학자들은 전승을 보조하고 성서를 해석하여 적용하는데 정통하였기 때문에 현자, 율법교사, 대가(大家)등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하나님의 율법이 생활의 모든 영역을 규제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신학적 질문에는 물론 법률적인 문제에도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러나 학자들이 해야 하였던 가장 중요한 일은 백성들 사이에서 가지고 있엇던 보편적인 명망에 부응하는 일이었다.  가문이나 혈통으로가 아니라 오직 지식과 능력에 따라서 율법학자가 될 수 있었다.  모든 학자들은 스스로 노동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고 따라서 사도 바울도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천막 짜는 일을 했었다.

  율법학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오랜 그리고 철저한 공부를 해야했다.  유명한 선생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몰렸다.  선생은 앉아서 그의 학설을 강의하고(마 5:1 참조) 학생은 그의 발 앞에 앉아서(행 22:3 참조)  풍부한 전통을 알고 적용할 수 있도록 많은 전승 자료들을 익숙하게 숙달해야 했다.  문답식 공부로써 올바른 사고의 방법을 교육했는데 예수도 문답식 대화로 그의 제자들이나 그에게 물어오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제재들에 대한 예수의 관계는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제자로 받아 줄 것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먼저 그들에게 그를 따르라고 불렀으며 율법학자들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학자들과 그의 제자들과의 관계와는 구별되었다.(막 1:22)  학생이 공부를 끝마치면 스승으로서 그는 명예로운 호칭인 “랍비”로 일컬어졌으며(마 23:7-8), 학자의 긴 옷을 입을 수 있었다.(막 12:38)  회당에서는 모세의 강단 위 상석에 앉았다.  백성들은 그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으며 랍비의 말에 언제나 순종했다.

  예수시대에 힐렐(Hillel)과 샴마이(Schammai)가 율법학자들 가운데서 뛰어나게 걸출한 두 학파를 이끄는 사람들이었다.  힐렐은 좀 더 온건하게 율법을 해석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보였고 로마의 관례를 정통 유대교와 양립시킬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에 반해 샴마이는 율법해석을 보다 엄격히 하였고 결과적으로 로마인들과 대립하였다.  유대 공동체의 재건은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Jochanan ben Zskkai)에 의하여 권위있게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이 로마인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탈출한 자카이에게 로마인들이 야브레(얌니아)에 새로운 학교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여기에서부터 율법의 가르침은 회당 공동체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Ⅳ.  결  론


  유대인은 공통된 종교와 역사를 통하여 하나로 결합된 민족으로서 율법에 의하여 살았고 율법은 유대인 종교의 핵심이었다.  이 율법은 다른 민족들과의 구분을 나타내는 표였다.  하지만 이것도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여러 유대주의 종파를 파생하였는데 바리새파는 B.C.2C의 마카비의 영향을 받은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로서 이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했고 확고한 공동체로 연합하였다.

  사두개파는 예루살렘 귀족사회에 공동체를 헝성하였는데 이들은 토라(오경)만을 표준으로 생각하였다.

  열심당은(혁명당)은 투쟁적인 민족주의 노선에서 출발하며 종교의 자유뿐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엣세네파는 정치적, 종교적인 삶을 강력하게 규정하였던 독자적인 유대운동으로서 정결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 생활을 하는 금욕주의 운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테라페우스트 교단은 디아스포라에서 독립적으로 발전된 엣세네파 운동의 지엽으로써 초기 기독교 승려들의 집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쿰란 공동체는 경건하고 율법에 신실하던 유대인들이 예수와 사도들의 시대에 생각하고 믿고 희망하였던 사상과 견해들을 밝혀준다.  반면 헬라의 이원론을 도입한 흔적이 있다.

  율법학자들은 각 유대 종파를 규명하는 율법의 교사로서 유대인들의 회당교육을 시작한 무리들이다.

  이상에서 예수시대에 나타났던 유대교의 종파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한결같은 공통점은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폐쇄적이며 독단적인 주장을 강조하는 자세는 율법의 본질을 깨트리고 말아서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율법을 위해 존재하는 모순을 낳고 말았다.  선민사상의 표시로서 하나님과의 언약인 율법은 율법의 주인이신 예수를 반대하는 무기로 쓰여졌다는 사실 앞에서 행위가 아닌 성령의 감동에 의한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는 것임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교 종파는 일면으로는 각 지역에 회당을 건립함으로써 복음의 전진 기지 역활을 감당했다고 본다면 이세계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앞으로 각 유대교 정파의 사상을 더 깊이 연구함으로써 메시야관에 대한 그들의 오류를 비판하는 작업이 있어야 하겠다.  이것이야말로 유대교와 예수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바른 관점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될 것이라고 보여진다.



1)C.F. preiffer, 󰡔신구약 중간사󰡕, 조병수 역(서울; 한국 기독교 교육연구원, 1982)



2)요세푸스의 보도에 의하면 “6,000명 이상”의 회원이 속해 있었다.

   (JÜdische AitertÜmer ⅩⅧ 42)


3)John Bright, 󰡔이스라엘의 역사(하권)󰡕 김윤주 역 (경북왜관;분도 출판사,1983),

P 354-355


4)Jdesphus, JÜdische AltertÜmer ⅩⅧ,23 


홍 창 표교수/합신,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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