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짜로 주시는 하나님/주님 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

[스크랩] 이석봉 vs 이윤근 목사, 십일조 토론

이석봉 vs 이윤근 목사, 십일조 토론


십일조는 신앙고백이다 - 십일조는 구원과 관계없다
 
수원신학교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이석봉 목사는 본보에 “십일조는 신앙고백이다”라는 글을 게제했다. 이 글이 합동교단지인 기독신문 독자란에도 게제됐다. 이 목사는 “십일조는 신앙고백이다”라고 전제한 뒤 십일조를 포함한 구약의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율법폐지론주의자들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십일조는 “십일조를 드려서 물질의 복을 받는다는 고백은 물질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다”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십일조를 드림으로서의 결과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신앙고백이 어떠한 것이냐에 달려있다”라고 말하면서 “참된 신앙은 그 원인 결과를 인간적 욕구에 따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 결과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십일조의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십일조는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믿고 있다는 신앙고백적 표현임을 강조했다.

이와 같은 이석봉 목사의 주장에 현역 목회에서 은퇴한 이윤근 목사는 “십일조는 신앙고백이다”라는 이석봉 목사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기를 “십일조는 구원받은 사람이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과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의 증거지 신앙고백은 아니다”라고 주장한 글을 본보 자유게시판을 통해서 발표했다.

이윤근 목사는 “십일조는 구원과 관계가 없음은 성경에서 말하는 가르침이다.”라고 전제한뒤 “성도로서 하나님의 명령 따라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명령 따라 순종하는 것뿐이지 십일조 드리지 않았다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윤근 목사는 이석봉 목사의 “십일조는 신앙고백이다”라는 주장에 “어떻게 십일조를 구원 문제와 관련된 신앙고백과 연결시켜 설명하느냐”라는 주장이 바로 이윤근 목사가 발표한 “십일조가 신앙고백이라고 가르칠 수는 없다.”라는 글이다.

이같은 이윤근 목사의 글이 발표되자 이석봉 목사는 리폼드뉴스 고정 컬럼란을 통해서 “여러 형태의 신앙고백 이해”라는 글을 통해서 이윤근 목사는 자신의 글인 “십일조는 신앙고백이다”라는 글을 구원론으로 연결시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무리라는 취지의 글을 발표하기를 “신앙 고백이라 할 때는 일반적으로 구속사와 관계된 고백으로써 믿고 구원받음에 대한 확고부동한 고백”이 있고 반면에 “신앙생활을 통해서 얻은 바나 깨달은 바 또는 믿는 바를 고백하는 신앙생활 신앙고백”이 있음을 주장하면서 “신앙생활 중의 신앙고백이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하면서 그와 같은 차원에서 “십일조는 신앙고백이다”라는 주장을 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석봉 목사는 자신의 두 번째 글을 통해 첫 번째 글인 “십일조는 신앙고백이다”라는 글을 보충하여 오해의 소지가 된 부분을 확충하고 있다. 이 글의 결론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이요,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는 신앙 고백이며,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리기를 순종하는 신앙 고백인 것”으로 설명하며 주장하고 있다.

세 편의 글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석봉 목사의 첫 번째 글 “십일조는 신앙고백이다”
 
십일조는 신앙고백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서 지치도록 논쟁하고 있는 것은 십일조문제이다. 서구신학을 맹신하여 받아오신 분들이 십일조는 구약 율법이니 폐지하여야 한다면서 그것을 선전하고 새로운 학설인양 아니면 정통적인 학설인양 퍼뜨리고 있어 매우 혼란스럽게 하고 있어 안타깝다.

 성경을 보는 눈은 구속사적인 눈과 신앙고백적인 눈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이다. 율법적인 눈과 윤리적인 눈이 모든 것의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신앙고백이란 율법과 윤리 도덕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들의 아름다운 신앙고백들이 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를 고백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능력과 권세를 고백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각색 병인을 고치셨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보이셨다. 이런 능력과 권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행할 수 없기에 본대로 느낀대로 고백한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철저히 예수님을 높인 것이다.

 바울은 내 자신이 누구냐를 고백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고전 15:10)

핍박자가 사도가 된 것, 모든 사도보다 더 수고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의 은혜를 보고 철저히 예수님을 높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로 고백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 9) 바울 사도는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들이 있었지만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빌 3:4-8)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한다고 하였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므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과 부활의 능력 때문이었다.

말라기는 물질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며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3:10-12)

 말라기 선지자는 대담한 선지자이다. 그의 믿음은 영적인 세계 뿐만아니라 물질적인 세계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는 대담하게도 내기를 걸었다. 아니 믿음을 걸었다. 아니다. 믿음을 고백한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내 믿음대로 되리라"고 고백해버린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의 십일조 고백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고백이다. 왜 이런 고백을 서슴없이 하였을까? 그의 단순성 때문일까? 아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물질로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물질의 주인이신 하나님 만으로 만족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십일조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과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한 것이다.

 하박국은 하나님 만으로 만족함을 고백하였다.갈대아의 군대가 진격해 오는 상황에서 그가 의지해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어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 18)

 이와 같이 신앙의 세계란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아름답게 승화되어 고백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신앙이란 물질을 삶의 결과로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같이 하심을 믿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아무것도 없어도 만족하게 되고 그것이 복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인간의 잣대로, 이성의 잣대로 휘저으면 않된다.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구속사적이냐 아니면 신앙고백적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서구신학을 맹신해서는 않된다. 서구신학의 바탕에는 언제나 인간 이성이 그물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철저히 계산적이다. 인간 이성이 하나님의 주권 위에서 굴림한다. 그러나 참된 신앙고백은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가 고백한 십일조는 물질을 노린 것이 아니다. 물질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라기 선지자의 고백인 십일조 생활이 자신의 고백이면 그대로 할 것이요, 아니면 그만 두면 될 것이다.

 그러나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이니 폐지하라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율법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십일조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서 복을 받는다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고백대로 사는 자에게 영혼이 잘되는 복이 임하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보상에 눈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십일조를 드려서 물질의 복을 받는다는 고백은 물질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다.

 만일 욥과 같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시험이 왔다고 하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시니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자가 참된 신자인 것이다.

 예수님은 신행 일치를 가르치셨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 23:23); 눅 11:42)

율법주의 즉 행위강조주의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다. 그러나 의(크리시스=정의)와 인(엘레오스=자비)과 신(피스티스=믿음)은 버렸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의 행함은 철저히 지키면서도 인격의 행함은 버렸다. 인격없는 율법의 행함은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함도 중요하지만 인격의 행함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둘 다 지키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십일조를 드림으로서의 결과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신앙고백이 어떠한 것이냐에 달려있다. 참된 신앙은 그 원인 결과를 인간적 욕구에 따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 결과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이다. 물질이 있어서 복이 될 수 있는 자에게는 물질을 주실 것이요, 물질이 보류되어서 복이 될 사람은 물질을 보류하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요 주권이기 때문이다. 십일조의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십일조에 대한 현대식 "고르반"을 만들어서는 않된다.무엇이든지 "고르반"(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막 7:11) 하고 부모님께 드리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였던 바리새인들 처럼 다면 십일조는 율법이다 하고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십일조에 대한 "신형 고르반"(하나님께 드리지 않기 위한 새 율법)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지 말 장난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석봉 목사의 첫 번째 글인 “십일조는 신앙고백이다”라는
이윤근 목사의 반론의 글

십일조가 신앙고백이라고 가르칠 수는 없다.

십일조는 구원과 관계가 없음은 성경에서 말하는 가르침이다.그렇다고 십일조 하지 아니하여도 된다는 괴변은 아니다.십일조는 구원받은 사람이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과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의 증거지 신앙고백은 아니다.이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하는 구원과 관계가 있는 신앙고백과는 거리감이 있다.십자가의 한편 강도는 십일조 했다는 기록이 없다.

성도로서 하나님의 명령 따라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명령 따라 순종하는 것뿐이지 십일조 드리지 않았다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그리고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도 잘못된 표현이다. 믿음으로 행치 않는 모든 것은 죄가 되듯이 십일조도 믿음 없이 드리는 것은 십일조 자체로 신앙고백과 동일시하여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십일조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지 구원받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므로 신앙고백과 같이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은 무리다.

물론 십일조를 강조하다보니 신앙고백과 같이 말을 했겠지만. 엄격히 따지면 엄청난 차이가 있음도 관과 해서는 아니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십계명을 지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 해방되고 광야에서 십계명을 주시며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다.

구원이 먼저요 계명은 후라는 말이다. 계명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듯이 십일조가 구원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과 같이 신앙고백과 동일시하는 것은 교리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미국시민이 되고 싶다고 미국의 헌법 책을 구하여 한국에서 그 법대로 살아도 미국시민 되지는 아니하는 것과 같이 진정한 신앙고백 없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천국의 시민이 되기는 어렵다.

미국의 시민이 먼저 되어야 그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과 같이 천국 시민이 된 후에야 하나님의 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십일조 강조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 같이 신앙고백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문제가 있다.십일조와 헌금은 성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일 뿐이다.


이윤근 목사의 “십일조가 신앙고백이라고 가르칠 수는 없다.”라는 글에 대한 이석봉 목사의 “여러형태의 신앙고백 이해”

여러 형태의 신앙고백 이해

신앙 고백이란 자기가 믿는 바를 고백하는 행위이다.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창조주 하나님, 구세주 예수님, 중생케 하고 인치시는 성령님을 믿는다.

신앙 고백이라 할 때는 일반적으로 구속사와 관계된 고백으로써 믿고 구원받음에 대한 확고부동한 고백일 것이다. 그러한가 하면 신앙생활을 통해서 얻은 바나 깨달은 바 또는 믿는 바를 고백하는 신앙생활 신앙고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생활 중의 신앙고백이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1. 구속사와 관계된 신앙 고백

1)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베드로의 고백은 구속사와 관련된 고백으로써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구약의 예언되신 그리스도(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는 신앙 고백이다.

 2)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상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는 신앙 고백이다.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구원받고 영생한다는 구속사와 관계된 신앙 고백이다.

2. 생활과 관계된 신앙 고백

1) 다윗의 만족 신앙 고백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다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로 감사와 관계된 신앙 고백이다.다윗은 어떤 환경에서라도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푸른 초장이시며 안위이시며 넘치는 상급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만족의 핵심이 하나님이시라는 신앙 고백이다.

  2) 하박국의 만족 신앙 고백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 18)

 하박국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 만으로 만족함을 고백하였다. 갈대아의 군대가 진격해 오는 상황에서 그가 의지해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이는 인간생사화복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함과 동시에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한다는 고백인 것이다.

 3. 은혜와 관계된 신앙 고백

1) 바울의 감사 신앙 고백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고전 15:10)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자가 사도가 된 것, 복음을 위해 모든 사도보다 더 수고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감사의 신앙 고백이다.

 2) 요나의 감사 신앙 고백
"2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4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6...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9내가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욘 2장)

요나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고백하는 내용이다. 요나의 위대한 신앙 고백은 아직 고기 뱃속에 있으면서 살고 있음을 감사하고 다시 토해 구원받을 것을 내다보며 구원받은 자로 감사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신앙고백이다.

  4. 헌물과 관계된 신앙 고백

 1) 말라기의 고백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모든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말라기 선지자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예언을 전파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에서 보는 바 말라기 선지자는 본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전파하였다. 전파자는 그 전파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하지 않고는 전파할 수 없다. 믿고 전파하는 것이다. 믿지 않는다면 전파하지 않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전파하는 자의 신앙 고백이 되는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십일조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릴 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복을 내리신다는 신앙을 고백하며 선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말라기 선지자의 십일조에 대한 강조는 그의 신앙 고백이라는 점에서 전혀 흠이 없다. 그 뿐만이 아니라 십일조를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하여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요 생사화복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신앙행위요 신앙 고백인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이요,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는 신앙 고백이며,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리기를 순종하는 신앙 고백인 것이다. 

리폼드뉴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