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고대 오리엔티학은 언제 탄생했는가. 2.이집트.마라카나 유적 발굴의 성과 3.<오리엔트>지방은 어디인가. 4.고대문명은 언제 탄생했는가 5.인류 최고의 문명이,왜 오리엔트에서 발생했는가. 6.오리엔튼 역사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7.고대 오리엔트는 어떻게 변했는가. 8.오리엔트는 <인류의 도가니>인가 9.성서 전설의 무대(1) 10.성서 전설의 무대(2) 11.이스라엘은 어떻게 건국되었는가 12.<키브츠>란 무엇인가 13.이스라엘,헤브리아,사브라의 뜻은 무엇인가
1.고대 오리엔트학은 언제 탄생했는가.
유럽인이 고대 오리엔트의 역사나 풍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중근동을 여행하게 된 것은 지리적인 발견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고대 오리엔트학의 기초가 잡힌 19세기까지의 고대 오리엔트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주로<구약 성서>와 그리스.로마시대의 고기록이나 유럽인의 여행기에 한정되어 있었다,
즉 모세의 5경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여러 전승과 헤로도투스나 스트라본 등의 여러 기록을 중심한 것이었다. 즉 구약성서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확대경으로 삼아서 고대 오리엔트에 관한 지식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인으로서 이집트에 군림한 영주 프토레마이오스 2세.필라델퍼스(재위 B.C.285-46)가 당시 이집트의 테베의 신관이며 고사에 정통했던 마네톤(BC 3세기)에게 명해서 이른 시대부터의 이집트의 역사를 편찬시킨 <이집트지>나 마네톤과 함께 고문서 기록에 밝았던 바빌론의 신관 베롯소스(B.C.3세기)가 셀레우코스 왕가의 셀레우코스 1세(B.C.358-280)의 왕명에 의하여 집대성한 <바빌로니아지>(3권)가 고대 오리엔트에 관한 2대 명저로 알려져 있다. 이것들은 당시의 풍부한 사료를 구사하여 그리스어로 쓰여진 정확한 기록이었다고 하나, 고대 로마의 정치가,문인,웅변가로 이름 높은 키게로(B.C.103-63)시대부터 없어지기 시작하여 애석하게도 현재는 완본이 남아 있찌 않다. 따라서 19세기까지의 우리의 교대 오리엔트에 관한 지식은 원사료를 갖지 못한 간접적인 사료에 근거한 것이다.
나일강 유역과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양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고대 문명의 세쇠 전반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진짜 과학적인 학문이 생긴 것은 19세기의 서유럽에서였다. 이것은 당시의 유럽 열강,특히 프랑스,영국의 식민지 할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J.F.샨포리온(1790-1832)이 나폴레온 보나파르트(1769-1821)에 의하여 반입된<로제타 석비>의 성각체 문자(hieroglyph)를 해독(1822)하는 한편, 페르시아 주재 영국 사관 H.C.로린손 경(1810-95)에 의하여 메소포타미아의 평야에서 페르시아의 오지로 통하는 고대의 교통 요로의 하나인 오늘의 이란의 켈만샤와 하마단 사이에 있는 베히스툰 마애의 비문이 해독(1837-47년 입수,19세기 중엽 해독)되어,여기서 고대 오리엔트학의 쌍벽인(이집트학)과 <앗시리아학>학이 탄생했다.
이집트학은 그 대상 지역이나 인종이 단순하지만, 앗시리아학은 고바빌로니아,신바빌로니아 등 쐐기 글자가 사용된 문화 지역의 모든 민족을 포함한다. 그후 구미에서 고대 오리엔트에 관한 여러가지 문헌이나 유적,유물 등을 사용해서 고대 오리엔트의 역사,문화 및 사회 전반을 연구하는 고대 오리엔트학의 제분야의 연구가 전문화 되어, 현재에는 <슈멜학><바빌로니아학><엘람학><히타이트학><이란학><구약성서학><우가리트학>등 독립된 연구 분야가 있다.
일본의 오리엔트학은 고대 오리엔트사는 서양사의 테투리안에서,이스람(7세기) 이후는 동양사의 테두리 안에서 취급해 왔다. 그리고 고대 오리엔트 지방의 연구는 소수의 민간 독지가에 의하여 시작되어,1917년에는 고대 오리엔트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바빌로니아 학회>가 창립되었다. 다음해 기관지<바빌로니아>가 창간되고 4호까지 나왔다. 귀중한 자료이다.
오늘날 널리 쓰여지고 있는 <오리엔트>Orient라는 말은,보통 원동(또는 극동)을 포함한 전 아시아라는 뜻의 <동양>을 의미하는 말이 돼 있다. 지리적으로는 대강 다음 일곱 지방으로 나뉘어 있다. 즉 소아시아,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아르메니아,메스포타미아,아라비아,이란의 여러 지방이다.
인류의 역사는,학문적으로 문자 기록의 유무에 따라서 대강 200만년에 걸친 긴 선사시대와 약 5000년의 역사시대로 답변한다.
북반구의 대부분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만년 전의 홍적세시대에 전후 4번에 걸쳐서 빙하의 전진과 후퇴에 의하여 두꺼운 빙하에 덮혀 있었다. 빙하기에는 간빙기라고 하는 온난한 시기가 끼어 있었고, 인류는 그 온난한 기후 조건 아래서 나타났다고 하나,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 대륙에 걸친 지역은 역사적으로도 유구한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완결된 독자적인 역사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세계사는 동아시아,오리엔트,유럽의 3대 문명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리엔트사의 경우는 중국사처럼 통일 왕조의 교체로 시기 구분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 그리고 생산 양시개의 관점에서, 고대 = 노예제 사회, 중세=봉건제 사회, 근세 = 자본제 사회라는 식의 이른바 사회발전 단계설을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다.
기원전 제30세기까지는 고대 오리엔트의 2대 문명권,즉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각각 독자적인 생활을 영위하며 발전해 오면서 양자의 교류는 주로 경제적 문화적인 면에 한정되고 정치적인 지배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오리엔트 세계는 북쪽은 바다, 3면을 사막으로 둘러싸인 자연의 장벽으로 고립되어 있떤 이집트를 제외하고 <인류의 도가니>라고 일러지는 것처럼 선사시대부터 끊임없이 일어난 민족 이동에 의하여 인종의 혼혈이 격심하고 그 진행이 현저했다. (1) 셈.함어족의 이름은 창세기 10장 21절 이하의 노아의 아들 셈.함.야벳의 홍수 후 인류의 조상이 됐다는 기록에 따라서 A.L.폰.슈레처(1735-1809)나 J.G .아이히호룬(1725-1827)등에 의하여 1781년에 이름지어진 것이며, 옛부터 그렇게 불려온 것은 아니다. (2) 인도.유럽어족은 현대 유럽인의 조상이며 고대 오리엔트사 후반에 활약한 이른바 기마 유목 민족이며,힛타이트인, 미탄니인,카시드인,메디아인 등은 모두 정복자로서 제국을 건설하였다.
(3) 야벳어족의 이름은 금세기 초 이래의 연구에 의하여,이상 (1)(2)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많은 소속 불명의 제민족이 하나의 인종이라고 가정하고 창세기 10장의 기록에 따라 이름 지어진 것이다(이 명칭은 근년에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성서는 구약성서가 39권.신약 성서가 27권의 문서고 돼있다.
<오래고 새로운 나라> 이스라엘 공화국은 역사적으로는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려온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지리적으로는 세게의 3대륙을 연결하는 지중해 동부의 한 구석에 위치하고,바다와 사막 사이에 끼어있는 협소한 지대이다. 그 전역은 약 2만 7백평방 킬로미터이고 그중 445평방 킬로미터를 하천과 호수가 차지하고 있는 작은 나라이다. 북쪽에는 헤르몬산 (높이 2816미터)이나 레바논 산맥(최고봉 3086미터)이 서있고 서쪽의 동부 지중해 연안에는 비옥한 땅이,중앙부에는 해발 약 800미터의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구릉지대가 있다. (1) 가을 비(신명기 11장 14절, 야고보서 5장 7절, 10월말에서 11월에 걸쳐서 내리기 시작하는 비이며, 이 우량의 다과에 따라서 풍작 흉작이 결정된다고 한다).
(2) 겨울 비(즈가리아서 1장 1절,욥기 37장 6절12월 중순에서 2월말 사이에 대량으로 내리는 비).
(3) 봄비 (호세아서 6장 3절). 우량은 지대에 따라서 다르나 대체로 남쪽보다 북쪽이 많고 특히 산악지대에 많다.
19세기 중엽이 되어 세계 각지의 민족주의가 발흥하는 중에서, 그리고 동유럽,러시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민족적 억압이 강화되는 중에서 유대인 사이에 유대인의 국가를 <성서의 땅>에 건설하자는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프랑스의 자유 평등 사상에 심취한 오스트리아의 유대교 신문기자 데오돌 헤르트르 박사(1860-1904)의 제창으로 1897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제1회 시오니스트 회의가 개최되고, 1907년에는 세계 시오니스트 기구와 바젤 강령이 제정되어 정치 운동이 되어갔다. 헤르트르는 서방의 문명을 동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정치적인 운동과 함께 경제적 기반도 확립하여 이스라엘 국가 재건의 기운을 북돋아갔다. 이스라엘국은 그 모든 시민을 위해서 교조,인종,성별에 관계없이 완전한 사회적 정치적 제 권리의 평등을 보장할 것이다. 이렇게 원칙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으나 이스라엘의 국교는 <정통 유대교>이다. 이 계율을 지키는 신도는 전 인구의 약 반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초대 수상 다윗.벤구리온 등의 국가건설 계획은 <모든 사람은 노동할 것> <모든 사람은 농업 노동으로 돌아갈 것>을 원칙으로 하고,이것은 로버트 오엔(1771-1858)이나 F.W.라이판젠(1818-1888)등의 사상을 기초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걸친 인류의 역사와 지혜의 결집이라고 하는 세계 최초의 이른바 <협동조합 국가>(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라고도 한다)가 나타난 것이다.
건국의 기초와 실천의 상징으로 우리가 잘 아는 <키브츠>라고 하는 이스라엘 특유의 이른바 농촌 공공체가 있다. 키브츠는 토지,생산,소비,교육,문화 등 전체적인 것은 모든 구성원의 공동 소유가 돼있으며,협동의 원리가 모든 면에 관철돼 있는 농업 집단촌이다. 그곳에서는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활을 키브츠에서 하는 것이며 소련의 콜호스와도 닮은 데가 있다. 키브츠의 운영은 구성원의 직접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임원 (보통 임기는 1-2년)에 의하여 집행되며, 구성원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공급받는다>는 신조 아래 키브츠의 결정에 따라 노동은 능력에 따라 분담하고 의복,식품,주거,사회적 서비스 등의 지급이 공평하게 분배된다. 키브츠는 중앙(공동)식당,저장고,공동 보육원,아동원,문화 센터 등이 있다. 즉,일상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을 충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은 원래 부족동맹의 명칭이었던 것이 뒤에 민족의 명칭이 된 것이며, <하나님이 지배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신정 정치의 이념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이 이기신다><하나님과 겨룬다><하나님을 의지한다>등의 해석도 있다. 털에 싸인 사보텐 열매는 부주의해서 이것을 다치면 무수한 바늘로 변해서 살갗을 찌른다. 그러나 이것을 솜씨있게 겉 껍질을 벗기면 그 속에는 달콤한 과육이 있다. 즉,이것은 다루기 어렵고 한번 마음을 허락하면 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사보텐의 열매에 비유한 것이다. <사브라>는 이스라엘 태생의 사람이 지은 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오늘날에는 이스라엘 태생의 유대인도 해외에서 아주 해 온 사람도 함께 친숙해진 말이다.2.이집트.마라카타 유적 발굴의 성과
그 이후 오늘날까지 훌륭한 여러가지 연구가 발표되었는데,특기할 것은 와세다 대학 고대 이집트 조사대에 의한 마르카타 유적의 발굴 조사이다.
와세다 대학 고대 이집트 조사위원회는 고대 이닙트 문명의 형성 과정을 해명하기 위해서 1971년 이래 조사대를 현지에 파견하고, 그 조사대는 나일강 중류지역 루크소르대안의 마르카타 유적에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하고 있다.
1966년-67년의 현지 답사와 1969-70년의 예비조사를 거쳐, 현재까지 제1차 (1971-72),제2차(1972-73),제3차(1973-74),제4차(1974-75)까지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마르카타 유적은 루크소르의 나일 서안에 있으며,고대의 서 테베,현재의 크루나 마을의 남단에 위치한다. 라아메스 3세(B.C.1198-66경의 장제전이 있는 메디네트.하브에서 약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이시스 여신을 모신 로마시대의 작은 신전이 있고, 그 부근 일대는 델.에스-샤르비트라고 불리며, 그 수 킬로미터 사방이 조사 대상 지역이 된다.
유적은 경작지에 인접한 사막에 있다. 이집트 발굴사상 특히 국제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은, 제3차 조사에서의 <고기언덕>의 채색 계단의 발견이다.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신전의 북방 2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통칭 콤 엘-사마크(고기의 언덕이라는 뜻)는 전에 도굴할 때에 만들어진 도랑으로 대소 두 개의 언덕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중에서 작은 언덕에서 이집트 제18조 왕조의 것으로 생각되는 채색 계단이 발견되었다.
계단은 폭이 3,5미터,너비가 0.55미터,높이가 5-7미터,중앙의 1.93*0.45미터 부분에 포로라고 생각되는 인물과 두 개 활 그림이 각단에 엇갈려 그려져 있다. 인물은 두 손을 결박 당한 느비아인, 서아시아인,소속 불명의 민족 등 세 종류이고, 얼굴 방향은 서로 반대로 돼있다. 그림은 벽돌을 쌓고 진흙을 반죽해서 바른 위에 그려졌고, 큰 언덕 위에서는 벽돌을 쌓은 건물의 기초가 발견되고,경사 면에서는 건물의 벽면을 장식했던 채색 변화 조각이 발견되었다. 이집트의 유적이 거의 석재인데 반해서 이 계단과 주위의 건물 유적은 흙벽돌인 것이 특징이다.
유적 전체가 제전인지 왕의 별저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이지만,제18왕조 제9대의 아멘호텝 3세(B.C.1414경-1379경)의 건물 유적인 것같다. 제4차 조사에서의 최대의 수확은 채색 계단 부근에서 아멘호텝 3세의 상형 글자로 기록된 왕명 각인(흙벽돌에 찍은 문서)가 발견되었다.
3. [오리엔트]지방은 어디인가
<오리엔트>라는 말은 본래는 고대 로마인이 자기 나라 이탈리아 반도를 기준으로 해서 서쪽을 <오키덴스>Occideus라고 부른데 반해서 동쪽을 막연히 <오리엔트>Orient)라고 브른데서 시작됐다.
<오리엔트>는 라틴어의 동사 오리올 Orior(일어나다,나타나다의 뜻)의 명사형 오리엔스Oriens에 유래하는 것이며, 오리엔스는 <해가 뜬다>는 의미에서 <해가 뜨는쪽,지방><동방>이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이다.
<오리엔스>와 대조적으로 사용되는 <오키덴스>(서쪽의 뜻)는 라틴어의 동사 오키도 Occido(떨어지다,넘어지다.해가 지다의 뜻)의 명사형이다.
<빛은 동방으로부터>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다. 이 말은 원래 그리스 문화에서 많은 것을 배워 개화한 고대 로마인이 이탈리아 반도의 동방에 있는 그리스가 로마에 빛을 가져왔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시작이며, 중국이나 극동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현재에는 널리 서양의 고전 문명이 동방 오리엔트 문명에 의하여 개화됐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후 로마인의 지리적 지식의 증대와 동방과의 비단 교역의 발달과 함께 오리엔트가 가리키는 지역은 점점 동방으로 확대되고 그 범위는 시대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역사적 명사로 사용하고 있는 <고대 오리엔트>의 지리적 범위의 중심은 근대 미국의 이집트 학자 J.H.브레스테드(1865-1935)가 명명한 이른바 <비옥한 초생달(지대)> The Fertile Crescent이다.
고대 오리엔트의 지리적 범위는 개강 북쪽은 흑해,카프리카스 산맥,카스피 해 및 이란의 북쪽 기슭을 경계로 하고, 남쪽은 사하라 사막과 인도양으로 제한 되고,서쪽은 보스포로스 해혁과 나일강 협곡, 동쪽은 인더스 강 하구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키며,거의 북위 10도에서 40도 정도의 사이이고, 북해도에서 대만을 조금 남하한 지역이다. 즉 오른쪽 끝을 페르샤 만의 충적층 평야에서 시작해서 이란 고원 및 재크로스 산맥의 서쪽을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양강을 따라 북상하여 그 수원지대인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소아시아의 토로스 산맥의 동쪽을 동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시리아.팔레스타인으로 남하하는 초생달형의 이른바 흑토지대에 나일강 하류의 충적층 평야를 보탠 지역이다.
이들 여러 지방은 대부분 불모의 사막이나 황야이지만,그 중심을 이루는 것은 강유역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이며, 두 큰 강의 유역에서는 대규모의 인공 관계에 의하여 정주 농경생활이 영위되고,거기에 양지역을 연결하는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해안 평야를 보태서 전체적으로는 사막 속의 녹지대를 형성하여 <비옥한 초생달(지대)>를 이루고 있다.
4. 고대 문명은 언제 탄생했는가
역사를 협의로 해석하면 그것은 글자에 의한 기록과 함께 시작한다. 그리고 선사시대는 석기시대이며 역사시대는 금속시대이다.
구석기시대, 중석기 문화에 이어 신석기시대락 시작되는 것은 인류가 자기 손으로 식량 생산을 시작한 때부터이며,그것은 오리엔트에서이고 가장 오랜 농경 정주 집락이 형성된 것도 오리엔트이다. 지금으로 부터 약 1만년 전에 인류가 오리엔트에서 농경과 목축을 시작했다. 이것은 불의 발견에 이은 중요한 단계이다. 그것이 사방으로 전반되어 유럽으로 인도로, 그리고 중앙 아시아를 넘어 화북에까지 농경 문화가 전해진 것이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전에는 오리엔트에 인류 최고의 도시 문명이 일어나고 그들은 글자를 발명하고 금속기를 사용하고 통일적인 정부 조직을 형성하여 여기에 인류 최고의 문명이 발생했다.
영국의 역사가 A.J.토인비(1889-1975)는 그의 대저<역사의 연구>에서, 세계의 문명 사회를 29가지로 구분하고 각 문명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였으며, 그 중에서 다른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의 문명을 창조한 것은 이집트와 슈메르 문명 뿐이라고 했다. 사실 이 이집트와 슈메르 문명만은 그들이 영향을 받을 앞선 문명을 갖지 못했다.
인류의 역사가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 역사시대가 시작된 시기는 메스포타미아 및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3000년 전후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보다 조금 늦게 인더스와 크레타 문명이 시작되고, 동아시아에서는 더 늦은 은인이 문명 단계에 들어간 것이 기원전 1500년전 경이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 이전의 약 1천년간, 즉 기원전 제4천년기.이른바 금석기 병용 시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오리엔트에서는 문명 개시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최고의 문명 사회에 공통적인 점을 들자면, 그것은 어느 것이나 도시 문명이었다는 것이다. 영국의 고고학자 V.G차일드(1892-1957)는 식량 생산의 개시를 인류사의 제1차 혁명(<신석기 혁명>)이라고 하며, 문명의 개시를 제2차 혁명(<도시 혁명>)이라고 한다.
인류사의 제1차 혁명은 그 후 세계 각지에 일어난 제 민족의 전형이 됐으며, 18세기 후반에 시작되는 산업 혁명까지 인류의 생활은 실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물질 상의 혁명인 산업 혁명과 거의 동시에 사상상에는 계몽사상이,정치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으며, 이 세가지 혁명에 의하여 계속 일어난 여러가지 사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5.인류 최고의 문명이,왜 오리엔트에서 발생했는가?
4항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의 역사시대는 기원전 3000년경의 오리엔트의 도시 문명의 성립으로 시작되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충적층 평야는 강의 정기적인 범람으로 매년 비옥한 흙이 퇴적하는 혜택 받은 땅이었기 때문에 그 땅에 인류 최고의 문명이 발생하였다>고 했는데, 과연 그랬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은 그 반대였다. 역사시대 이후의 지구에는 기후, 풍토 상의 변화는 국부적인 것이었고, 큰 역사적 현상을 설명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와는 반대로 선사시대에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변화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예를 들자면 지중해가 아직 없었거나, 사하라 사막이 대밀림이었던 것이 그것이다.
지금의 중근동지방은 구세계의 서남에서 동북에 걸친 대건조시대가 돼있으나 페르샤만 입구에서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북상하여, 다시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나일강에 이르는 지역은 지금으로부터 약 2만년 전까지는 우량이 풍부하여 초목이나 동물이 번식하고 그 전역은 원시림에 뒤덮인 습윤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빙하의 후퇴와 함께 북극 고기압이 수축해서 이 지대에 비를 몰아오고 있던 온대성 저기압이 차츰 북방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그 결과 오리엔트 전역에 이상 건조가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인류는 물론 그들과 생활을 함께 하고 있던 동식물도 이 기후의 격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어떤 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어떤 자는 종래의 생활을 계속하다가 사멸하고, 어떤 자는 기후의 변화에 대응한 수렵 채집의 생활을 계속하여 생존하고, 또 어떤 자는 목축과 농경의 새로운 생활로 들어간 것이다. 약 1만년 전의 일이다.
그후, 오리엔트 여러 지역에서의 생활의 기본 조건과 생활의 실체는 모두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고 건조가 시작된 시기의 여러 큰 강의 유역은 늪이나 큰 숲이었고 그곳에는 맹수나 독사가 살고 강이 범람할 때마다 홍수가 일어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아주 살기 어려운 환경이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문명에 이르는 길은 이 최대의 역경에 도전하여 이것을 극복한 사람들의 노력의 결과로 이룬 것이며,좋은 환경은 인력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에게 이런 어려운 환경을 개척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지혜와 힘의 결집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렇기 해서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양강 유역 및 나일강 유역이 비로소 좋은 옥토가 되고, 여기에 인류 최고의 문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6. 오리엔트 역사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이러한 전제에 서서 오리엔트가 제민족 제국가의 항쟁과 경함과 협력 가운데 만들어진 하나의 역사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면,거기에는 오리엔트 독자의 시기 구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고대 세계의 한 영역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거기에는 그 나름의 고대도 중세도 근세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념과 파악 방법은 학자에 따라서 다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시기 구분의 원형은 이른바 3구분법이라고 해서 그 착상은 르네상스기에 이미 나왔으며 유럽사를 기준으로 해서 형성된 것이다.
보통은 7세기의 이스람 발흥을 중심으로 해서 전후 두 시기로 대별된다. 즉,이스람 이전은 고대라 불리고, 다시 기원전 331년의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으로 그 고대가 둘로 나뉘어 전기는 고대 오리엔트 시대,후기는 헬레니즘 시대라 하고, 전기는 편의상 다시 기원전 제30세기까지를 동 20세기,동 10세기의 세 시기로 대별한다. 이스람 이후는 다시 19세기 이후의 근현대와 그 이전의 중세로 나눈다.
어떤 학자는 오리엔트사를 고대.중세.근세의 세기로 대별하는 사람도 있다. 먼저 고대는 가장 오랜 시대에서부터 기원전 331년의 페르샤 제국 멸망까지의 시대이며, 세계 최고의 고도한 문명이 발생하고 오리엔트적인 전개가 일단락되기까지의 말하자면 오리엔트적인 고유한 문명의 성립 발전의 시대를 말한다.
이어서 중세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으로 오리엔트의 통일 제국이 멸망하고 여러 소국으로 분립하게 되는데, 동시에 그리스.로마와 정치적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맺어지고 지중해 세계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어 서방의 영향 아래 새로운 오리엔트 지방 문화가 발생한 약 1000년간을 가리킨다. 즉 이 시대의 오리엔트 세계의 서반부는 그리스.로마적 세계이고 그 동반부는 이스라니즘,다시 말해서 고대의 전통을 계승한 팔티아, 사산조 페르시아 등의 오리엔탈즘의 전통적 세계이며, 이것은 마치 서양중세에 있어서의 로마적 게르만적 세계의 성립 발전과 유사한 것이다.
근세는 7세기에 이슬람교의 성립과 이슬람 제국의 발생등의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오리엔트 세계가 새로운 의미에서 고유한 문화를 형성한 시대이며, 그후 바그다드와 카이로가 동서로 확대되는 이스람 세계의 중심이 되어 이스람계의 제 왕조가 흥망하였다.
7.고대 오리엔트는 어떻게 변했는가
그러나 기원전 제20세기 초에 북방에서 고대 오리엔트 지방으로 스테프 민족의 대이동의 물결이 밀려들어 기원전 1600년경까지의 오리엔트 세계는 제민족의 대이동과 충돌이 일어나는 대혼란이 계속됐다.
이것은 많은 경우 인도.유럽어족계의 지배층을 내포한 푸르리인(슈메르인도 셈어족도 아니다)의 민족 이동에 의한 것이었고,그 결과 소아시아의 선주민 하티를 정복하고 힛타이트 왕국과 유프라테스강 종류에서 시리아 북부까지를 지배한 미탄니 왕국, 그리고 바빌론 제1왕국을 쓰러뜨린 카시드 왕국 등이 발흉했다.
이 대이동에 의하여 시리아.팔레스타인 지방도 그 여파를 받아 종래의 셈어족계 유목인은 서쪽으로 이동해 갔다.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쇠퇴에 따라 기원전 18세기 종반부터 아시아에서 이집트에 침입해 와서 1세기 이상이나 나라 태반을 지배한 힉소스는 풀르리인을 기간으로 하고 거기에다 고래로부터 고대 오리엔트 지방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셈어족을 포함한 혼성 민족군이었다.
이 민족 대이동에 의하여 오리엔트 세게는 교란 되고 옛 문명의 중심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이민족의 지배 아래서 침체하였다.
그러나 이제까지 이 큰 강 유역 지방에만 한정돼 있던 두 문명은 반대로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어 오리엔트 세계의 일체화가 진행되어 갔다.
이집트 제 18왕조 에서 비롯되는 신왕국의 대외 정책에서 나타난 이른바 고립주의에서 국제주의로의 정책 전환은 이런 국제 정세가 배경이 되어 있다.
이어서 기원전 15.14세기에 이집트,힛타이트,미탄니등의 대국의 쟁탈의 표적이 된 것은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방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선진 오리엔트의 여러 영향을 받기만 했던 크레타가 동부 지중해의 해상 무역을 지배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오리엔트의 대국들이 쇠퇴한 뒤에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폐니키아의 여러 도시 국가나 이스라엘인의 왕국 등의 소국가가 대두했다. 그 결과 오리엔트 세계 제국의 모든 정책은 제20왕조 이래 나일강 유역으로 후퇴한 이집트를 대신해서 앗시리아가 계승하고, 앗시리아는 기원전 7세기에는 서아시아 및 이집트를 포함한 데제국이 된다. 앗시리아 제국이 멸망한 후 칼디아(신바빌로니아).이집트 소아시아의 리디아,이란의 메디아 등의 네 나라가 분립했으나 곧 메디아에게 복속하고 있던 이란 고원의 페르시아가 나타나서 퀴로스 2세,감뷰세스 등에 의해서 이들 나라들은 차례로 멸망하고, 다류스왕(BC 522-486)에 이르러 인더스강에 이르는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한 전무한 대제국으로 세웠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통일된 동방 오리엔트 세계와 서방과의 관계가 경제적 문화적으로 더욱 긴장하게 되어 알렉산드르 대왕의 정복에 의하여 오리엔트는 지중해 세계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어 헬레니즘 시대로 들어간다.
8.오리엔트는 <인류의 도가지>인가.
고대 오리엔트사에서 활약하는 제 민족을 얻어 상으로 대별하면, (1) 셈.함어족, (2) 인도,유럽어족 (3) 야벳어족으로 나눌 수 있다.
셈어족은 북아라비아와 남시리아를 원주지로 해서 고대 오리엔트사의 주역을 맡았던 민족이다. 아카도인,아물인,바빌로니아인,앗시리아인,칼디아인 등은 정복자 제국의 건설자로 알려졌고,아랍인, 페니키아인은 상업 민족으로 활약하고,이스라엘인은 구약성서를 남겼다. 현존하는 아랍인.유대인(이스라엘인),에쵸피아인 등은 셈어족에 속한다.
함어족은 셈어족과 근친 관계에 있으며, 양자의 공통 조상은 북아프리카에 살고있었다고 생각되며, 이집트인은 그 대표적인 종족이다.
최근의 여러 연구에 의하여 이집트어는 그 구조와 어휘에 있어서 셈계의 언어와 아프리카의 여러 언어 양자와 유사하다는 것이 밝혀졌고,함계의 언어와의 관계는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깊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셈어의 분류를 도표로 나타내면 별표( 페이지)와 같이 된다. 동서 두 파로 나뉘는 것은 19세기 말에 F.혼멜(1854-1936)에 의하여 분류된 이래 일반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 이외에 남북의 두 파로 나누는 설도 있다.(셈어 분류표 참조).
선사시대에 전오리엔트에서 번창했던 채색토기 문화는 이 야벳어족의 소산이며, 그들은 카프카스,알메니아를 원주지로 해서 고대 오리엔트의 인종 형성의 기반을 이루고 거의 모든 민족에 혼혈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원형의 창시자 슈메르인,엘람인,풀르리인,힛타이트,미틴니,카시트제 제국의 인민은 이에 속하며, 바빌로니아인,앗시리안에는 그 혼혈이 심하게 돼있다.
크레타인,에투르리아인,현재의 아르메니아 제족, 스페인의 바스크인,그리고 인더서 문명인도 이에 속한다고 하나 그 계통은 분명치 않다. 어느 민족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혼혈이 돼있는 것은,그것이 역사적인 형성물이라는 증거이다.
9. 성서 전설의 무대(1)
저작 연대는 가장 오랜 것이 기원전 2천년대 말로 소급되며 가장 늦게 나온 것이 기원후 2세기이므로 그 기간은 약 1천년의 오랜 사이를 가지고 있다.
성서의 역사 무대는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남쪽으로는 이집트,서쪽으로는 지중해와 로마로 확대되고 그 중심은 가나안(=시리아,팔레스타인)이다. 성서 지리학자 D.베일리는 이 지역들을 <다섯 바다와 육지?라고 부르고 있다. 즉 거인이 다섯 손가락을 바다에 박고 - 즉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지중해에,인지를 흑해에,중지를 카스피해에, 약지를 페르시아만에 새끼 손가락을 홍해에 박고 - 육지를 잡은 모양이라고 했다.
성서의 역사에 깊은 관계가 있는 국토는 오늘의 이스라엘 공화국을 중심으로 레바논 공화국(페니키아),시리아.아랍공화국.요르단 왕국.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이집트 아랍공화국(시나이 반도를 포함). 이란 제국(페르시아) 이라크 공화국(메소포타미아),터키 공화국령 아나토리아 (소아시아),그리스 공화국, 이탈리아 공화국(로마)를 포괄하는 반경 약 1600킬로미터의 지역이다.
성서 역사의 주요 무대는 성서가 <가나안의 땅> (창세기 13장 12절.신명기 32장 49절)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이곳은 오늘날 레바논 공화국.이스라엘 공화국 및 요르단 왕국에 걸친 지방이며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방의 고대 명칭이다. <가나안>은 바그다드의 북쪽 약 240킬로미터의 구릉지대에 있는 고도 누즈에서 출토한 점토판 (<누즈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아카도 말의 기나프(자홍색 염료)의 뜻에 관련한 것이라고 하며, 지중해 특산의 조개(학명 물레크스)에서 취한 자홍색 염료에 근거해서 (자색의 나라)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 자홍색 염료는 조금 밖에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대단히 비싼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색 옷을 입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색 옷을 입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에 한했다.
<가나안>은 원래 자홍 염색공장으로 유명한 페니키아 (그리스 명의 포이니케오스는 <자홍색>이라는 뜻)와 관련이 있는 것같다. 이곳은 또한 성서에서 <약속의 땅> (히브리서 11장9절,사도행전 7장 9절),<성지>(즈가리야서 2장 12절,마케베오서 하 1장 7절),<이스라엘의 땅>(사무엘상 3장 19절)등으로 불렸다.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은 성지를 가리키는 근대의 명칭이다. 이것은 1919년에서 1948년까지 영국의 위임 통치 기간에 공인된 명칭이며, 이 경우에는 요르단강 서안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명칭은 기원전 13세기 말, 연안 평원 남부를 점령했던 <페리시테인>의 명칭에 유래하며 성서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헤로도투스는 <팔레스타인.시리아> 또는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는 시리아의 일부>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페니키아 이남의 연안지방 및 그 배후의 내륙 지방을 의미하며,뒤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정복한 땅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자홍의 나라>가 가나안에 관해서는 다시 다루겠다.
10. 성서 전설의 무대 (2)
팔레스타인은 남북으로 이어지는 단층에 따라서 네 층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 남쪽 네게브를 합해서 다섯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신명기 1장 7절의 <아라바,산지,저지,네게브,해변>이라고 하는 것은 이 다석 지역의 구분이다. 즉,(1) 동부 지중해 연안의 평원지대(a.악고평원,b 샤론평원,c페르시데 평원, 세펠라 구릉지대),(2) 요르단강 서쪽의 산악지대(a 갈릴리아 고원, b 에스드라에론 평원 c 사마리아 고원 d 에프라임 산악지, e 유다 산악지대). (3) 요르단 저지대(a 프레호 지역, b 갈릴리아 분지, c 요르단강 유역 d 사해, e.아라바 저지). (4) 요르단강 동쪽의 산악지대 (a 바샨고원, b 길르앗 산악지대 c모압암몬의 고원 d 에돔의 산악지대), (5) 네게브 지대(남부의 고원 건조시대)로 나누어진다.
북쪽에서 남쪽으로는 함몰된 저지대가 있고 해면보다 약 200미터가 낮은 갈리리아호에서 흘러나와 해면 하 약 400사해로 흘러드는 요르단강이 있다.
기후는 온대동우이며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이다. 편서풍대의 남단에 해당하며 온대에 위치하고 해양을 서쪽에 두고 있기 때문에 남캘리포니아, 이탈리아,그리스와 마찬가지의 기후라고 한다.
계절은 여름(=건조기)과 겨울(=우기)로 나뉘고,여름에는 전혀 강우가 없이 건조하고 더우며, 겨울에는 강우가 있고 드물게 조금 눈이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으나 대체로 온난하다.
11월초부터 3월말까지가 우기이며 이 시기에 습기를 띤 서풍이 불어 비를 실어온다.
강우는 옛부터 팔레스타인 주민의 생존에 중대한 의미를 주고 있었다.
옛부터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관개 농업은 인공 관개로는 그 효과를 볼 수 있었으나 팔레스타인에서는 하늘이 주는 빗물 이외에 관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11. 이스라엘은 어떻게 건국되었는가.
시오니즘 운동은 민족주의적인 운동이기는 하지만 역사적 문화적으로도 서방쪽이라고 한다.
헤르트르의 공적은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조직을 만든 점에 있다.
그후 준비가 착착 진행되어 1948년 5월 14일에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서 그날 텔아비브에서 다윗.벤구리온(1886-1973)이 이스라엘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국가 건설의 사상은 전세계의 유대인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 국토를 개발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국 독립 선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국가는 종교,양심,언어,교육,문화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국가는 모든 종교의 유적을 보호할 것이다.
건국 이래 지중해 연안에는 연이어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흥미있는 것의 하나는 인공 도시 아슈드드이다. 이곳은 남부 네게브 사막의 광물 자원의 수출을 위해서 건설된 항만 도시이며, 현재는 인구 4만여 명의 이스라엘 주요 도시의 하나가 돼있다.
유대민족 이민사에 관해서는 별표(43페이지)참조
12. <키브츠>란 무엇인가
최초의 키브츠 데카니아 알파가 말라리아가 만연하는 갈릴리아 호반의 습지대 데카니아의 황무지에 세워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인 1909년의 일이다. 그러나 7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의 키브츠 데카니아는 근대적 주택,공공 시설,과수원,오렌지 밭 등을 갖춘 이스라엘 키브츠 운동의 모델이라 할 정도로 성장 발전하였다. 국내에는 현재 230여개소의 키브츠가 있으며, 키브츠의 구성은 대소 여러가지이며 작은 것은 60명 정도에서 큰 것은 2000명의 집단으로 돼있고, 보통은 500명에서 700명 정도이다. 9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키브츠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인구의 약 3퍼센트가 되고 농업 생산은 전이스라엘의 약 430퍼센트가 되고 농업 생산은 전이스라엘 의 약 40퍼센트가 된다고 한다.
키브츠의 중요 사업은 과수,낙동,곡물 등의 농업 생산이지만 그밖에 농산물 가공,합판 등의 경공업의 기업도 적지 않다.
그 밖에 이스라엘의 농업을 지탱하고 있는 이른바 협동조합으로 <모샤브>라고 하는 협동 소경영자 입주촌이 있다. 이것은 토지의 공유, 자력 노동,상호 부조, 판매 및 구입의 협동등을 주요 원칙으로 하는 협동촌이며,키브츠에서 파생된 것이다. 각 가족은 자기 집에 살며, 각자의 농지를 경작하고 생산과 소비는 개인 자유에 맡겨져 있다. 단지를 경작하고 생산과 소비는 개인 자유에 맡겨져 있다. 단 생산 계획은 협동으로 하고 생산물의 판매나 물품의 구입은 마을의 중앙협동조합을 통해서 하고 농기구와 물은 공유 공동으로 이용한다. 모샤브가 최초에 건설된 것은 1921년 서에즐루 협곡의 습지 나하르에서 였다. 현재는 그 수가 340여개소나 된다.
또 한가지 키브츠와 모샤브와 중간적인 협동촌이며 모샤브.시두피(협동 모샤브)라는 뜻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지단 경영,집단 소유라는 점에서는 가족 전원이 모여 가정 생활을 하고, 취사,세탁,보육 등은 각 가족의 책임으로 행해진다는 점에서는 모샤브와 같다.
13.이스라엘,헤브리아,사브라의 뜻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인 자신은 자기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나 다른 민족은 <헤브라이인>이라고 불렀다. 그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전민족에 대한 국민적인 신성한 호칭으로 사용되고,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뒤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한편 유대인이라는 호칭은 남쪽 유대왕국이 세워진 후에 생기고 제2성전시대(BC 6세기말 이후)에는 정치적 국민적 호칭이 되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권에 있어서는 항상 유대인이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
<헤브라이>는 본래 헤브라이어의 이브리( )에서 유래한 것이며,<나아간다><넘어간다>등의 뜻을 가진 동사 이브르( )에서 나와 <강(유브라테스강>건너서 온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아마르나시대(BC 14세기)에 시리아.팔레스타인 지방에 출몰한 <하피르>라는 집단과도 관계가 있다.
<이스라엘>이 주로 선민이라는 자각으로 자칭하는 명칭인데 반해서 <헤브라이>는 타민족이 세속적으로 부른 명칭이다.
필자가 이스라엘에게 자주 들은 명칭으로 <사브라)라는 것이 있다.
<사브라>란 근대에 있어서의 유대인의 조직적인 팔레스타인 이주(1880년대부터 동유럽에서 이주하기 시작했다)이후 팔레스타인(=이스라엘)땅에서 나서 성장한 유대인의 애칭이다.
현대 헤브라이어로는 <사보텐의 열매>를 뜻한다.
이스라엘에서 나서 외국에서 자란 사람, 외국에서 나서 이스라엘에게 자란 유대인도 많으나,사브라라는 명칭은 이스라엘에서 나서 이스라엘에서 자란 유대인에게만 사용된다.
이 세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가 빠져도 그것은 <사브라>가 아니다. 1972년의 이스라엘 공화국 국세조사에 의하면,이스라엘 총인구는 312만이며, 그중에 유대인이 85.2퍼센트,아랍인,투르즈인,기타가 14.8퍼센트이다. 유대인 중 이스라엘 태생(사브라)이 47.2퍼센트를 차지하고,구미 출신 유대인이 27.1퍼센트,아시아,아프리카 출신이 25.7퍼센트이다. 시 대 유대민족의 이동방향 이민의 이유
BC 13세기 이전 바빌로니아 -> 팔레스타인 유 목 생 활
팔레스타인 -> 이 집 트
BC 13세기경 이 집 트 -> 팔레스타인 정복자 생활
BC 1300-800
BC 8세기- 팔레스타인 -> 앗사리아 정복자에 의한
AD 1세기 바빌로니아 강제 이주
이 집 트
로 마
BC 4세기 - 팔레스타인 -> 아라비아 상 업 생 활
AD 200 지중해방면
AD 200-1000 팔레스타인
바빌로니아 -> 중앙아시아 상 업 생 활
이 집 트 서 유 럽
1000-1500
1300-1750 서 유 럽 -> 네덜란드
( 스페인 ) 터 키 추방에 의한
중앙유럽 -> 슬라브제국
1750-1880 동유럽 -> 중유럽및서유럽 경제적 필요로
미 국 (일부는 정치
남 미 적 동기 때문
중유럽 -> 미 국 에)
1880-1933 동유럽 -> 영 국 정치적 종교적
미 국 박해및경제적
남아프리아 극 동 필요 때문에
1933-1963 전유럽 미 국 정치적 인종적
서아시아 -> 팔레스타인 박해와 전쟁을
(이스라엘) 피해서, 또한
북아프리카 영 연 방 재건 이스라엘
에 끌려서
민족 생활의 중심지 유대민족사의 방향
족장시대
<출애굽>(BC 13세기 후반)
통일 이스라엘왕국과 그분열(BC 1020-922)
북왕국의 멸망(BC 722), 남왕국의 멸망
과 바빌로니아의 포로(BC 586)
팔레스타인 성전의 복구와 유대교 근간의 성립(BC 450)
로마에 의한 유대국가의 멸망(AD 70)
헬레니즘적 권력과 문화의 지배(BC 332-
팔레스타인 BC 2세기 후반)
예수의 활동(AD 1세기 초)과 그리스도교
의 분립
팔레스타인 탈무드의 집대성 ( AD 500경 )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에서의 <가온> (정신적 지도자)
이 집 트 의 시대 (최성기도 8 -10 세기)
서 유 럽 스페인 유대문화의 황금기 (10-14세기)
1300까지 프랑스
1400까지 이탈리아
1500까지 스페인
네델란드 흑사병기의 유대인 박해와 폴란드에의
폴 란 드 유대인 이민 (14세기 중엽)
리투아니아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 (1492)
터 키 북미 최초의 유대인 집단 (1654)
도 이 치 폴랜드 분할시작 (1772)
폴 랜 드 M.멘델스죤의 근대화운동 (1783 전후)
러 시 아 프랑스의 유대인 해방 (1791)
러시아의 유대인 학살 (Pogrom)의 빈발
도 이 치 과 유대인 이민의 획기적 개시 (1880년
러 시 아 대)
폴 랜 드
미 국 시오니즘의 전개(1897~)과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1920 - 48)
러시아의 유대인 해방 (1917)
미 국 나찌스 . 도이치의 반유대주의 (1933-45)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의 독립 (1948)
(이스라엘)
영 국
![](http://kcm.co.kr/bible/new/new.gif)
'나의 하나님에 관하여 > 구약 핵심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대와바사 (0) | 2008.01.25 |
---|---|
바이블? (0) | 2007.08.22 |
구약성경과 고대 근동 (0) | 2007.08.22 |
문학비평과 구약성경 (0) | 2007.08.22 |
구약 총개론 (0) | 2007.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