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페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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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전 이곳 최고의 유적지 쉬라즈를 찾았을 때 페르세폴리스, 낙쉐로스탐, 낙쉐 라잡 그 외 이곳 유명 유적지를 둘러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된 파사르가데는 시간이 없어 둘러보지 못했다. 마침 12월 31일 연말 연시를 당해 사랑하는 아내가 며칠 전 이곳에 와 이곳을 방문하는 행운을 잡았다. 우리 내외는 아침 6시 45분에 출발하는 이란항공에 몸을 실었다. 항공 교통망이 거미줄 처럼되어 있어 이란에서 가장 안전하고 빠르게 이동할 있는 수단이 바로 비행기이다. 약 1시간 10분 만에 쉬라즈 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외국사람은 눈을 ㅤㄸㅏㄲ고봐도 한 사람도 없다. 우르르 택시 기사들이 따라 붙으며 호객을 한다. 짧은 영어로 핍티달러(50달러) 오케하면서 호객을 하는 데 거의 귀찮을 정도이다. 여기 한 5개월 정도 살면서 현지 언어인 페르시아를 열심히 한 덕분에 생활언어는 불편없이 구사할 수 있다. 그래 한 기사를 잡고 내 계획을 이야기했더니 당장 가격이 반으로 깎인다. 2만5천원만 내란다. 이곳에서 현지 언어를 조금만 하면 바가지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최종 흥정은 2만원에 7시간 정도 이용하기로 했다.
처음에 파사르가데를 가기로 했다. 공항에서 무려 120km나 떨어진 아주 먼곳이다. 워낙 길이 곧게 잘 되어 잇어 한 시간만에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곳은 원래 아키메네스 왕조(구약시대 고레스 왕부터 시작된 약 200여간의 왕조)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던 곳이다. 권위와 역사 산실이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로 그 본래 흔적은 사라지고 그 일부의 흔적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지금 우리를 맞고 있다. 우선 도착하니 사방으로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이런 분지형 지형 덕분에 땅이 기름지고 기후가 온화하여 사람 살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래 이곳에 구약시대의 한 왕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페르시아인의 본영’이란 뜻의 파사르가데는 세계 첫 통일제국이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첫 왕도다. 기원전 539년 왕조를 세운 고레스 대왕은 메디아군을 격파한 후 이곳에 왕궁을 지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죽음을 불결하다고 여겨 주검을 신성한 흙 속에 파묻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얹었다고 한다. 7세기 이슬람군 침입 때만 해도 무덤은 솔로몬 어머니의 것으로 알려져 왔으므로 이슬람군의 파괴를 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입장료 300원을 내고 임대한 차를 몰고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마주친 유적이 옛날 페르시아 대제국을 호령했던 고레스 왕 무덤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한창 보수 공사를 하고 있어 그 원형을 그대로 감상 할 수 없어 아쉬웠다. 고레스왕의 무덤은 석실 고분 모양으로 우리나라 장군총과 비슷하다. 하이얀 대리석으로 6층의 계단으로 쌓아올렸다. 그 위에 직사각형 석실을 만들고 지붕를 비스듬히 씌워 안전을 기했다. 크기는 기단 아래 부분 가로 세로가 각각 10m 정도이며 그 높이가 9,5m 로 약간 피라밋드형이다. 위에 석실은 대략 세로 5m 가로 3m 정도로 북쪽으로 석실문이 나 있어 여기로 시신을 안치했던 모양이다.
고레스대왕은 바벨론을 정복한 후 이 땅에 하나님을 대적한 상징처럼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바벨탑의 폐허를 보고 그 탑에 매료되어 바벨탑을 본떠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그 규모면에서는 부족하지만. 필자는 고레스대왕의 무덤 앞에서 깊은 감회에 젖었다. 하나님이 그를 선하게 쓰셨을 뿐 아니라 그 역시 포용력 있는 어진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성경 속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대왕을 지칭할 때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고 하였으며, 또 이사야45장에는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부음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서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고 덧붙이고 있다.
과연 그의 치세 동안 (BC 559-530) 일부 피지배 민족들에게 상당한 자율권이 부여되었으며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생활을 존중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BC 538년에는 칙령을 발표하여 유대들의 귀환을 허용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언급하였다. 고레스의 칙령이 공포된 후 페르시아 왕실은 유대인들이 공동체 재건을 위한 정치 작업을 하도록 허락하였으며, 대왕은 느브갓네살이 약탈하여 갔던 성전 기물도 되돌려 주기도 하였다.이 때 유대포로 42,000명의 대이동이 이루어져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 본토로의 귀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BC 331년 알렉산더대왕이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고레스왕 석묘까지 파괴하기 위해 이곳 파사르가데까지 왔다가 “인간은 영원하지 않고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나 고레스는 한때 세계를 지배했지만 이 땅이 다른 왕에 의해 점령될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 점령당할 것이니 내 몸을 덮고 있는 흙(묘)에 손대지 말라”는 고레스왕의 석묘에 쓰여있는 글을 보고는 감동받아 훼손하지 않고 왕복을 벗어 고레스왕의 묘에 덮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시대를 초월한 두 영웅의 만남의 현장에 필자가 서 있었다. 고대 역사가 아리아누스(Arrianus)의 글에 의하면 “고레스의 무덤 내부는 금으로 된 관이 놓여 있었고 옆자리에는 금으로 세공된 다리가 달린 침대가 있었으며 침대에는 바빌론산 이불과 자줏빛 망토가 깔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바빌론에서 만든 페르시아식 의복과 소매달린 옷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 한 때를 호령했던 고레스 무덤을 보면서 역사가 가져다주는 진실성과 인생의 유한성을 느끼며 이곳 탐방을 끝냈다.
파샤르가데 다 무너져내린 고레스왕의 궁전터에 남아있는 유적
외국사람은 눈을 ㅤㄸㅏㄲ고봐도 한 사람도 없다. 우르르 택시 기사들이 따라 붙으며 호객을 한다. 짧은 영어로 핍티달러(50달러) 오케하면서 호객을 하는 데 거의 귀찮을 정도이다. 여기 한 5개월 정도 살면서 현지 언어인 페르시아를 열심히 한 덕분에 생활언어는 불편없이 구사할 수 있다. 그래 한 기사를 잡고 내 계획을 이야기했더니 당장 가격이 반으로 깎인다. 2만5천원만 내란다. 이곳에서 현지 언어를 조금만 하면 바가지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최종 흥정은 2만원에 7시간 정도 이용하기로 했다.
처음에 파사르가데를 가기로 했다. 공항에서 무려 120km나 떨어진 아주 먼곳이다. 워낙 길이 곧게 잘 되어 잇어 한 시간만에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곳은 원래 아키메네스 왕조(구약시대 고레스 왕부터 시작된 약 200여간의 왕조)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던 곳이다. 권위와 역사 산실이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로 그 본래 흔적은 사라지고 그 일부의 흔적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지금 우리를 맞고 있다. 우선 도착하니 사방으로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이런 분지형 지형 덕분에 땅이 기름지고 기후가 온화하여 사람 살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래 이곳에 구약시대의 한 왕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페르시아인의 본영’이란 뜻의 파사르가데는 세계 첫 통일제국이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첫 왕도다. 기원전 539년 왕조를 세운 고레스 대왕은 메디아군을 격파한 후 이곳에 왕궁을 지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죽음을 불결하다고 여겨 주검을 신성한 흙 속에 파묻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얹었다고 한다. 7세기 이슬람군 침입 때만 해도 무덤은 솔로몬 어머니의 것으로 알려져 왔으므로 이슬람군의 파괴를 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입장료 300원을 내고 임대한 차를 몰고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마주친 유적이 옛날 페르시아 대제국을 호령했던 고레스 왕 무덤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한창 보수 공사를 하고 있어 그 원형을 그대로 감상 할 수 없어 아쉬웠다. 고레스왕의 무덤은 석실 고분 모양으로 우리나라 장군총과 비슷하다. 하이얀 대리석으로 6층의 계단으로 쌓아올렸다. 그 위에 직사각형 석실을 만들고 지붕를 비스듬히 씌워 안전을 기했다. 크기는 기단 아래 부분 가로 세로가 각각 10m 정도이며 그 높이가 9,5m 로 약간 피라밋드형이다. 위에 석실은 대략 세로 5m 가로 3m 정도로 북쪽으로 석실문이 나 있어 여기로 시신을 안치했던 모양이다.
고레스대왕은 바벨론을 정복한 후 이 땅에 하나님을 대적한 상징처럼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바벨탑의 폐허를 보고 그 탑에 매료되어 바벨탑을 본떠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그 규모면에서는 부족하지만. 필자는 고레스대왕의 무덤 앞에서 깊은 감회에 젖었다. 하나님이 그를 선하게 쓰셨을 뿐 아니라 그 역시 포용력 있는 어진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성경 속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대왕을 지칭할 때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고 하였으며, 또 이사야45장에는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부음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서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고 덧붙이고 있다.
과연 그의 치세 동안 (BC 559-530) 일부 피지배 민족들에게 상당한 자율권이 부여되었으며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생활을 존중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BC 538년에는 칙령을 발표하여 유대들의 귀환을 허용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언급하였다. 고레스의 칙령이 공포된 후 페르시아 왕실은 유대인들이 공동체 재건을 위한 정치 작업을 하도록 허락하였으며, 대왕은 느브갓네살이 약탈하여 갔던 성전 기물도 되돌려 주기도 하였다.이 때 유대포로 42,000명의 대이동이 이루어져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 본토로의 귀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BC 331년 알렉산더대왕이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고레스왕 석묘까지 파괴하기 위해 이곳 파사르가데까지 왔다가 “인간은 영원하지 않고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나 고레스는 한때 세계를 지배했지만 이 땅이 다른 왕에 의해 점령될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 점령당할 것이니 내 몸을 덮고 있는 흙(묘)에 손대지 말라”는 고레스왕의 석묘에 쓰여있는 글을 보고는 감동받아 훼손하지 않고 왕복을 벗어 고레스왕의 묘에 덮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시대를 초월한 두 영웅의 만남의 현장에 필자가 서 있었다. 고대 역사가 아리아누스(Arrianus)의 글에 의하면 “고레스의 무덤 내부는 금으로 된 관이 놓여 있었고 옆자리에는 금으로 세공된 다리가 달린 침대가 있었으며 침대에는 바빌론산 이불과 자줏빛 망토가 깔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바빌론에서 만든 페르시아식 의복과 소매달린 옷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 한 때를 호령했던 고레스 무덤을 보면서 역사가 가져다주는 진실성과 인생의 유한성을 느끼며 이곳 탐방을 끝냈다.
파샤르가데 다 무너져내린 고레스왕의 궁전터에 남아있는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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