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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세계 의 역사 속으로

다니엘의 묘

이란 남부 수사(Shush)에 있는 다니엘 묘 그리고 수산궁 블로거 기자단 뉴스에 기사로 보낸 글 | 이란의 성경유적지
2007.04.15 14:15

이란 남부 수사(Shush)에 있는 다니엘 묘 그리고 수산궁

  초가잔빌(Choqa Zabil) 탐방을 다 끝내고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40여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다니엘 묘와 수산궁을 찾기로 했다. 그렇게 심술을 부리던 안개도 이젠 사라졌다. 위도상으로 남쪽 지방이라 한겨울인데도 별로 춥지 않다. 우리나라 봄날씨 같다.

  수산(수사)은 이란 남서쪽에 있는 아와즈에서 북서쪽으로 117㎞쯤 떨어져 있다. 오늘날 수사(Shush)라고 불리는 수산은 선사시대에서 페르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란 문명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이었던 도시이다.

   특히 이곳은 사르디스(성경의 사데)와 엑바타나(성경의 악메다),페르세폴리스로 가는 길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 수산은 5000여년 이상이나 되는 역사적 도시임이 밝혀졌다. 이 지역에는 기원 전 4000년경부터 엘람 민족이 거주하여 신석기 문화를 이룩하였고 아케메니아인들의 지배 기간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기원전 324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신하와 병사들 1만명이 이 지역의 처녀들과 집단 결혼을 한 역사도 지니고 있다.

  이후 사산조 왕조의 사푸르 2세(309∼379년)는 기독교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수산을 파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후에 에란샤르사푸르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으며 아랍에 다시 점령된 이후부터는 점차 쇠퇴하여 오늘날에는 중소도시(인구 6만 정도) 규모를 갖고 있다.

   수산에 도착하여 먼저 수산궁터가 있는 곳을 찾았다. 수산궁터는 시내 나즈막한 산 언덕 위에 있었다. 궁터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 위해 19세기 말 프랑스 고고학자에 의해 수산궁터에서 발굴된 벽돌로 세운 아파다나성 위로 올라갔다. 이 성은 당시 다리오왕이 페르시아제국에 적군이 쳐들어오는가를 살피는 전망대 역할을 했으며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접견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진흙 벽돌로 쌓아 올려 만든 성이 무척이나 견고해 보였다. 이 성을 지금은 이란 문화재청에서 사용하고 있단다.

   성위에서 내려다보니 어마어마하게 넓은 수산궁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성에서 내려와 궁터에 가보니 화려했던 수산궁터의 모습은 건축물의 기초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넓은 궁터의 자취를 살펴보니 식당, 회의실,도서관,귀빈 접대실, 창고 등 있을 것은 다 있었던 모양이다. 한창 유적 발굴을 하고 있었다. 그 넓이도 대단했지만 당시의 유적 일부를 발굴해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북쪽 끝에 대리석 기둥의 추줏돌이 몇 개 발국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돌로 된 쌍사자 석상이 원형에 가깝게 발국되어 홀로 옛궁터를 지키듯 서 있었다.

   성경에서 수산은 느헤미야 1장 1절과 다니엘 8장 2절에 한번씩 소개되었고 에스더서에는 여러 번 기록돼있다(1:2,5:2,9:6). 아하수에로왕 시대에 수산궁은 화려와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 다리오(다리우스) 대왕 때의 비문에서 수산궁의 건축에 언급된 부분을 보면 레바논과 간다라에서 많은 재물을 가져왔으며 사르디스와 박트리아에서는금,코라스미아에서 터키옥을 가져왔다. 또 은은 이집트, 벽 장식품들은 이오니아, 상아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져왔고 돌기둥은 엘람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각국에서 기능공(목수 석수 벽돌공 세공인 등)이 징발되어 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사치와 화려함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 수 있다.

  에스더 당시 페르시아의 수도인 이곳 수산궁에서 아하수에로는 즉위식을 갖고 3년째에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에1:1∼3). 다니엘은 벨사살왕 3년에 엘람의 수도인 수산성에 있었으나 숫양과 숫염소의 이상을 본 것은 을래강변이었다(단8:1∼2).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즉위 20년 기슬르월에 수산궁에서 예루살렘성이 훼파되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울며 금식하며 기도한 후(느 1:1∼40) 왕의 허락를 받아 위험하지만 빠른 길을 선택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다.

  수산궁터에서 아래 마을로 내려가면 사우르 강둑의 동쪽에 다니엘의 묘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필자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도 많은 사람이 다니엘의 묘가 있는 곳을 참배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현장 체험 학습으로 온 학생들이 무척 많았다. 관리인은 멀리 한국에서 온 필자를 특별 대우해 다니엘의 묘가 있는 곳으로 곧바로 안내주했다.

   다니엘의 묘는 이슬람교는 물론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지로 여겨지는 이란의 구약 성경 유적지다. 수산에 있는 묘지는 이슬람교적인 해석으로 인해 이슬람 시아파 교도들에게 중요한 성지순례지로 여겨지며 항상 수많은 참배객들로 붐빈다. 이유는 묘지에 "모하메트가 올 것을 예언한 구약의 선지자 다니엘"이라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금빛 찬란하게 장식된 다니엘의 석관은 일종의 가묘이지만 이슬람교에서는 가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니엘의 묘는9∼18세기까지 아랍인 작가들에 의해 자주 언급됐다.1164∼1173년 사이 이란을 여행했던 투델라의 벤야민(Benjamin)에 의하면 셀주크 왕조의 산야르(Sanjar 1117∼1157) 도시에 살던 두 지역 주민들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다니엘의 관을 유리관에 넣어 그 도시 중앙에 있는 강의 다리에 매달아 두도록 했다고 전한다. 수산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와 살던 곳 중의 하나로 다니엘과 느헤미야,에스더의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수산에서 우리는 다니엘의 절개 있는 신앙과 느헤미야의 예루살렘성에 대한 간절함,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민족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아침부터 기동력있게 움직이는 바람에 이곳 유명 유적지를 거의 다 둘러보는 행운을 잡았다. 분주한 일상을 접고 과거가 살아 숨쉬는 이곳을 찾으면서 순수한 철학자가 되고 찬란한 페르시아 역사 문화에 애착심이 생기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해 동경심을 가지게 되는 가보다.
 

 유네스코 등록 문화재 초가잔빌 성 안개에 휩싸여 있어 조금은 아쉽다.



다니엘 묘가 있는 이슬람 사원의 모습 




 실내에 있는 화려하게 장식된 다니엘 관


 이슬람 신자들이  다니엘 관에 얼굴을 맞대고 복을 빌고 있다.


 

 다니엘 시신이 안치된 바로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이슬람 신자들




 이곳 수사의 역사를 알리는 안내문(BC 5000년경 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다.)

아파다나 궁터 위에서 바라 본 수사 도시 전경




아파다나 궁터 위에 새로 지어진 성.    현재 이란 문화재청으로 활용  




앙상한 수산궁 터 





 

 수산궁터  안내문  BC  521년 경 다리오 왕의 유적터라고 알리고 있다.



 수산궁터에서 발굴된 유일한 사자상(원형임)




 수쉬타르에서 흘러내리는 이 폭포가 이곳 수사의 사우르 강을 이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