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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인
그리스도인 이라면 부정직하거나 포악하거나 음란하거나 잔인하거나 심보 사나운 사람들과는 무례를 범하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한 만남을 피하는 것이 현명한 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 지낼 수 없을 만큼 우리가 너무 선한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도 좋을 만큼 우리가 충분히 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의 유혹들을 다 이겨 낼 수 있을 만큼 선하지 못하고, 발생하는 문제들을 다 처리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슬기롭지 못합니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줄곧 우리는 묵과하고 묵인하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말과 웃음과 표정으로 동의해 달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우리는 저급한 이야기를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인양 떠들어 대는 말을 듣습니다. 흔히 동정이나 유우머로 포장되지만, 그 자리에 없는 사람들에 관한 흉과 험담이 오가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신성하게 여기는 것들이 조롱받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잔인함이 교묘하게 옹호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모든 선한 삶의 바탕을 이루는 요소들, 곧 사심없는 태도와 영웅적인 용기, 진정한 용서 등을 명확한 말로 부정하지는 않지만(차라리 부정하면 그에 관해서 토론이라도 할텐데), 어린아이들이 믿는 환상이나 바보짓 정도로 은근히 깍아 내립니다.
이런 자리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대체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대화에 아무런 대항도 하지않고 참여하는 것은 대단히 옳지 못한 행동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암묵적으로 우리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하며 토를 달아 대화의 흐름을 끊거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 버리는 행동은 자칫 하면 혼자 잘난척하는 위인이라는 편견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침묵이 좋은 도피처 입니다만, 잘난척 하지 않으면서도 주제를 진지한 토론의 장으로 이끌어 갈 수만 있다면 더욱 좋은 방법입니다. 토론에서 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수년이 지난후에 여러분의 말을 통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고백을 상대방으로 부터 들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악이 어느 선을 넘을 경우에는 아무리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반드시 맞서야 합니다. 모두들 냉소와 잔인함을 즐기고 있지만 나 혼자라도 분명한 태도로 항의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잘난 척하는 위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 해도 전면에 나서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남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실지로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입니다. 가능한 한 적대적인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그냥 넘어가 버릴까 하는 유혹을 느끼면서도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는 상대에게 맞서야 합니다.
악한 사람들과의 교제가 이렇듯 어려운 것은, 아무리 겸손과 용기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우리의 선한 의도 만으로는 역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지적 재능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악한 사람들과 교제를 피하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의가 아니라, 신중한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씨 에스 루이스의 시편사색 중에서(일부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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