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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성경자료 모음

구약 개관 {성서문학}

. 구약성서 개관

1. [구약성서]의 경전

같은 성서이면서도 유대교·가톨릭·개신교가 그들의 경전의 범위·내용·편집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성서의 형성과 발전을 보려고 할 때에는 유대교의 '히브리어 성서', 가톨릭의 '제1경전과 제2경전', 개신교의 '성경전서'로 나누어 정리해볼 수 있다.

 

1) 히브리어 경전

i) 유대교의 경전

유대교인들은 그들의 경전을 [율법서·예언서·성문서]라는 긴 이름으로 부른다. 율법서인 토라에는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가 들어 있다. 이 때문에 토라를 모세5경(Pentateuch)이라고도 한다. 예언서인 느비임은 전기예언서와 후기예언서로 나뉘며, 전기예언서에는 [여호수아]·[판관기](또는 [사사기])·[사무엘]·[열왕기]가 들어 있고, 후기예언서에는 [이사야] ·[예레미야]·[에제키엘]·12서(十二書)가 들어 있다. 느비임에는 이처럼 전·후기 예언서 각각 4권씩 모두 8권이 들어 있다. 12서는 '소예언서'라고도 하는데, 거기에는 [호세아]·[요엘]·[아모스]·[오바디야]·[요나]·[미가]·[나훔]·[하바꾹]·[스바니야]·[하깨]·[즈가리야]·[말라기] 등 모두 12권이 들어 있다. 12권이지만 일찍부터 한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1권으로 여겼다. 성문서인 케투빔에는 [시편]·[잠언]· [욥기] 등의 시와 지혜, [아가]·[룻기]·[애가]·[전도서]·[에스델]의 다섯 두루마리(하메시 메길로트), 이밖에 [다니엘]·[에즈라-느헤미야]·[역대기] 등의 책들이 들어 있다. 성문서에 들어 있는 책의 수는 시와 지혜 3권, 다섯 두루마리 안에 들어 있는 5권, 나머지 3권 등 모두 11권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경전에 들어 있는 낱권의 수는 토라 5권, 느비임 8권, 케투빔 11권 등 모두 합해 24권이다. 유대교에서 히브리어 성서가 어떤 경로를 거쳐 경전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율법서·예언서·성문서]라고 하는 이름이 암시하듯이, 일찍부터 율법서가 경전이 되고, 그다음에 예언서가, 마지막으로 성문서에 속하는 책들이 경전이 된 것 같다. 개략적으로 말하면, 먼저 율법서가 BC 5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돌아오던 때에 에즈라의 주도 아래 경전이 되었다. 예언서가 경전이 된 것은 일반적으로는 시몬이 대제사장직에 있던 때(BC 219~199)라고 본다. 성문서에 속하는 책들이 마지막으로 경전이 되기는 했지만 [시편]과 같은 책은 일찍부터 예언서와 함께 권위를 인정받았다. 90년 얌니아(Jamnia) 회의에서 히브리어 성서의 범위가 확정되었는데, 그동안 경전성 논란을 불러일으킨 [에제키엘]·[잠언]·[아가]·[전도서]·[에스델] 등이 이때 함께 경전이 되었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성서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ii) 사마리아 경전

그리스 시대 초기 예루살렘이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중심지였을 때, 옛 북왕국 이스라엘의 중심지 사마리아에 살던 야훼 숭배자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사회로부터 이탈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이 곧 사마리아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겜 근처의 그리짐 산을 그들 제사의 중심지로 정했다. 그들은 모세5경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외경으로는 [세페르 하야밈 Seper Hayyamim](역사서)과 [메마르 마르카 Memar Marqa](마르카의 교훈 속에 담긴 모세의 이야기)가 있다. 이 책들이 그 권위에 있어서 모세5경과 같지는 않으나 모세5경 버금 가는 경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세페르 하야밈]은 여호수아 시대부터 로마 시대를 거쳐 중세에 이르기까지의 그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특히 성서시대 해당 부분에는 [여호수아]를 비롯한 역사서에서 상당한 양의 자료를 발췌하여 그들의 신학적 입장에서 그것을 고쳐 인용한 예가 많이 발견된다.

iii) 알렉산드리아 경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대인들은 BC 3세기경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그리스어 [구약성서]를 그들의 경전으로 삼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 역시 사두가이파나 사마리아 사람들과 같이 모세5경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여 번역했다. 나머지 책들도 그 교육적 가치를 인정받아 번역되었으며,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외경도 성서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의 경전은 어디까지나 모세5경뿐이었다. 그들의 경전이 히브리어 원본에서 번역된 것이지만, 지금의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는 분량이나 편집이 다르다. 히브리어 경전은 [구약성서]를 율법서·예언서·성문서로 나누지만, 알렉산드리아 경전은 모세5경·역사서·문학서·예언서로 나눈다. 모세5경에는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가 들어가고, 역사서에는 [여호수아]·[판관기]·[룻기]·[사무엘 상]·[사무엘 하]·[열왕기 상]·[열왕기 하]·[역대기 상]·[역대기하]·[에즈라 1서](외경)·[에즈라 2서]([에즈라]와 [느헤미야])·[에스델]·[유딧]·[토비트]·[마카베오 1서]·[마카베오 2서]·[마카베오 3서]·[마카베오 4서]가 포함되었고, 문학서에는 [시편]·[송시]·[잠언]·[전도서]·[아가]·[욥기]·[지혜서]·[집회서]·[솔로몬의 시]를 편집해 넣었으며, 예언서에는 [호세아]·[아모스]·[요엘]·[오바디야]·[요나]·[나훔]·[하바꾹]·[스바니야]·[말라기]·[이사야]·[예레미야]·[바룩]·[애가]·[예레미야의 편지]·[에제키엘]·[다니엘]과 '수산나', '벨과 뱀' 등을 편집해 넣었다. 위에서 보듯이 배열과 분책방식(分冊方式)이 히브리어 경전과 다르다.

iv) 쿰란 경전

1940년대에 사해 서북부 유대 광야에서 [구약성서] 사해사본이 발견되면서 쿰란 종파의 경전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경전 전체의 윤곽을 파악할 길이 없다. [에스델]을 제외한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모두 발견되었다. 이것은 쿰란 종파의 경전이나 유대교의 경전이 거의 같았음을 암시한다. 다만 [에스델]의 경우는 그들의 경전에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은 것인지, 그들의 경전에 들어 있기는 했지만 우연히 발견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다.

 

2) 그리스도교의 경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서 말하는 70인역성서는 모세5경만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 경전은 모세5경만이었으므로 경전 전체와 외경까지 포함하고 있는 70인역은 그리스-유대교의 경전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경전이었다. [신약성서]에서도 [구약성서] 외경이 [구약성서]나 다름없이 인용된 예를 많이 볼 수 있다(Ⅰ 고린 2 : 9, 루가 11 : 49, 요한 7 : 38, 에페 5 : 14, 야고 4 : 5~6, 유다 14~15). 유대교와의 갈등 속에서 계속 성장한 초대 그리스도교가 히브리어 [구약성서]보다는 그리스어 [구약성서]에 더 의존하게 되고, 그것을 경전으로 받아들이자 유대교는 70인역을 버리게 되었다. 라틴 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실제로 70인역을 따랐다. 히에로니무스(제롬)와 그이후의 학자들이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우수성을 주장했으나, 크게 공명을 받지 못했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히브리어 성서를 대본으로 번역된 불가타 성서에 70인역의 외경을 포함시켜 공인 성서로 인정함으로써 70인역을 포함한 모든 책들을 경전으로 인정한 결과가 되었다. 개신교는 가톨릭 교회와 갈라지면서 70인역 [구약성서]를 버리고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택했다. 따라서 초대 교회에서 읽혀지던 외경은 경전 밖으로 축출당했다.

i) 가톨릭의 제2경전

가톨릭에서는 경전이 확대되고 재편집되었다. 확대되었다는 말은 히브리어 성서에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중간기에 형성된 제2경전이 첨가된 것을 일컫는 것이고, 재편집되었다는 것은 이와 같은 첨가 외에 히브리어 성서 24권을 70인역을 따라서 39권으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성서의 [사무엘]·[열왕기]·[역대기]를 [사무엘 상]·[사무엘 하]·[열왕기 상]·[열왕기 하]·[역대기 상]·[역대기 하]로 나누고, [에즈라-느헤미야]를 [에즈라]·[느헤미야]로 나누고, 소예언서 12서를 12권으로 나누어 [구약성서]를 모두 39권으로 재편집했다. 개신교에서 외경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第二經典 deuterocanonical)이라고 부르며, 히브리어 [구약성서]와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합친 성서를 가톨릭에서는 제1경전 혹은 원경전(原經典 protocanonical)이라고 한다. 제2경전에 들어가는 책은 역사적으로 변천되어왔다. 또 편집 형태에 따라 책의 권수도 일정하지 않다. 1977년에 한국에서 나온 신·구교가 번역한 '공동번역성서'(1977)에 보면, [토비트]·[유딧]·[에스델](제1경전 [에스델]의 추가부분)·[지혜서]·[집회서]·[바룩]·[다니엘](제1경전 [다니엘]의 추가부분)·[마카베오 상]·[마카베오 하] 등 9권이 들어 있다. [바룩]에는 '예레미야의 편지'가 마지막 장으로 편집되어 있으며, [다니엘]의 추가부분에는 '세 아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이 들어 있다. '개역 표준 성서' Revised Standard Version : 1957)에 실린 제2경전에는 [에스드라 1서]·[에스드라 2서]·'므나쎄의 기도'가 더 들어 있다.

2경전에 속하는 이런 책들은 본래 '70인역'에 들어 있던 것들을 초기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이고, 그것이 그대로 가톨릭의 경전이 된 것이다. 히브리어 [구약성서]에 익숙하지 않던 초기 그리스도교가 70인역을 읽게 되면서 거기에 들어 있는 제2경전에 속한 책들까지 함께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대 라틴어 역 성서(Old Latin Version)는 바로 70인역에서 번역되었다. 교부들 사이에서도 히브리어 [구약성서]에는 없고 그리스어[구약성서]에만 나오는 책들에 대한 경전으로서의 권위를 문제삼기는 했으나,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그리스어 외경을 히브리어 성서가 들어 있는 39권의 책과 동일하게 영감받은 권위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성서]에 들어 있는 39권은 이미 경전으로 전해져온 것이므로 이것을 제1경전이라고 했고, 그리스어 구약에 들어 있는 나머지 책들은 뒤늦게 경전이 되었다고 하여 제2경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이런 용어는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부터 사용). 그러나 '므나쎄의 기도', [에스드라 1서],[에스드라 2서]는 불가타 역 성서에 들어 있었으나 경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불가타 역은 이 3권의 책을 부록으로 취급하여 별도로 편집했고, 나머지 책들은 [구약성서]의 여러 곳에 적절히 재배치했다. [토비트]·[유딧]은 [느헤미야] 다음에, [에스델] 추가부분은 [에스델] 안에, [마카베오 상]·[마카베오 하]는 [에스델] 다음에, [지혜서]·[집회서]는 [아가] 다음에, [바룩]은 [애가] 다음에, [다니엘] 추가부분은 [다니엘] 다음에 각각 편집해 넣었다.

ii) 개신교의 [구약성서] 경전

개신교의 경전이 유대교의 경전과 다른 것은 [구약성서] 외에 [신약성서]를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가톨릭과 다른 것은 가톨릭이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 외경을 경건문학으로 받아들일 뿐, 경전으로는 고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톨릭에서는 외경의 경전성 문제가 논의되어오다가 제2경전으로 정착되었지만, 개신교 쪽에서는 종교개혁 당시부터 외경의 경전성 문제가 논의되다가 끝내 경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개신교 목사들이 편집한 '취리히 성서' (Zurich or Swiss-German Bible : 1527~30)는 외경을 신약 다음에 부록으로 편집해 넣었다. 1534년에 끝난 루터의 독일어 역은 외경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에 부록으로 엮어 넣고, 그 서문에 "외경은 경전과 동등하지 않지만 읽어서 유익한 책"이라고 언급했다.

1535년에 프랑스 개신교가 처음으로 번역하여 발간한 성서도 외경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에 부록으로 넣고, 머리말에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씌어진 구약에는 없지만 불가타 역본에 들어 있는 외경"이라고 언급했다. 1535년에 마일스 커버데일이 번역한 영어 성서도 외경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에 부록으로 편집함으로써 [구약성서]의 일부로 다루지 않고 별도로 묶어 경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책임을 밝혔다. 1560년에 나온 ' 제네바 성서'는 본문을 절로 나누어 출판한 최초의 성서일 뿐만 아니라, 외경에 대해서도 그 서문에서 개신교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서문에서 외경이 교회가 공식적으로 읽고 해석하도록 공인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경전이 확증하는 내용에 일치할 경우에만 도움이 되는 책임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므나쎄의 기도'만은 [역대기 하] 끝에 편집해넣은 예외를 보인다. 1611년에 나온 '제임스 왕 역본'(King James Version : 또는 흠정역)도 외경을 경전과 구별하는 점에서는 개신교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지만, [신약성서] 관주(전후참조)에서 외경과의 관련구절을 여러 번 언급하여 외경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가 외경을 '제2경전'으로 결정하자 개신교 쪽에서도 외경에 대한 태도를 좀더 분명히 하기에 이른다. 1562년에 영국교회가 발표한 39개조 종교조항 제6조는 "(외경은) 교회가 신도에게 생활의 모범이나 교훈을 가르치려고 할 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외경을 근거로 하여 교리를 제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1647년 웨스터민스터 신학자 총회에서 결정한 신앙고백 제1장 3절은 "외경은 영감으로 씌어진 책이 아니므로 경전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외경은 성서와는 달리 교회 안에서 어떠한 권위도 갖지 못하고, 인정되거나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개신교 가운데서 어느 한 교회도 외경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교회는 없으나, 그중 성공회는 외경을 가장 존중하는 교회이다. 그들의 기도서에 붙어 있는 성구절에는 외경이 인용된다. 최근에 영국성공회에서 개정한 성구집을 보면 외경에서 인용한 것이 44개나 되고, 미국성공회가 사용하는 최신 개정판 성구집에는 110곳에 외경 인용이 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는, 종교개혁자들이 외경을 중요하게 권장했는데도 외경에 대해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 [구약성서]의 본문과 번역본

1)  본문비평(사본 문제)

인쇄된 히브리어 성서의 본문은 자음, 모음 기호, 가락의 3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모음 기호와 가락은 7~9세기 마소라(전통을 지키는 사람들) 학파가 만들어서 자음 본문에 붙인 것이다. 손으로 쓴 사본에는 여러 가지 오기가 들어 있다. 유형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i) 잘못 듣기

비슷하게 발음되는 낱말을 잘못 들어서 생기는 오기이다. 예를 들면 히브리어 부정사(lo )와 인칭대명사 여격 그에게(lo)의 혼용, 후음 헷( et)과 마찰음 카프(kaf)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흐(a : 형제)와 아크(akh : 반드시)의 혼용 등이 여기에 속한다.

ii) 잘못 보기

비슷하게 생긴 글자와 낱말들 사이에서 오기가 발생한다. 베트(bet : 안, 속)와 카프(kaf : ~처럼) 사이의 혼용이 사해 두루마리 [이사야]와 마소라 본문 [이사야]에서 많이 발견된다. 자음 글자의 자리가 뒤바뀌는 자순도치(字順倒置)의 오기도 있다. 키르밤(qirbam : 그들의 속 생각)이 키브람(qibram : 그들의 무덤)으로 바뀐 예가 [시편]에서 발견된다. 자음 글자나 낱말이 중복되는 중복오사(重復誤寫 Dittograpy) 현상도 사해 두루마리 [이사야]와 마소라 본문 [에제키엘] 등에서 확인된다. 겹쳐 나오는 자음 글자나 또는 낱말이 우연히 탈락되는 중자탈오(重字脫誤 Haplography) 현상도 사해 두루마리 [이사야]에서 발견된다. 유사한 어두나 어미를 가진 2개의 구나 절이 서로 몇 줄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을 때, 사본을 베끼는 사람의 눈이 그 몇 줄을 뛰어넘기 때문에 생기는 탈락이 있다. 사본에서는 이러한 유사문미(類似文尾 Homoioteleuton)나 유사문두(類似文頭 Homoioarchton)로 인한 본문 탈락현상도 발생한다. [사무엘 상] 14장 41절의 마소라 본문을 70인역이나 불가타 역과 대조해볼 때, 마소라 본문에서 이런 유형의 탈락이 많이 발견된다.

iii) 주석상의 문제

같은 자음 본문을 어떻게 발음하여 읽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본래 히브리어 성서 본문에는 모음이 없었으므로 DBR 같은 글자를 마소라 본문 [호세아]에서 보듯이 디베르(DiBeR)로 읽으면 '그가 말했다'가 되고, 70인역 [호세아]에서 보듯이 데바르(DeBaR)로 읽으면 명사 '~의 말'이 된다. 히브리어 성서에는 본래 낱말과 낱말 사이에 구분이 없었으므로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다른 뜻을 읽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모스]에 나오는 BBQRYM은, 마소라 본문에서 읽듯이 바베카림(BaBeQaRYM)으로 읽으면 '황소를 부려서'라는 뜻이 되고, 바바카르 얌(BaBaQaR YaM)이라고 읽으면 '황소로 바다를'이라는 뜻이 된다. 가끔 약자가 나오는데 그 약자를 잘못 해독한 경우도 있다. 마소라 본문 [사무엘 하] 1장 12절, [에제키엘] 12장 23절, [아모스] 3장 9절 등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마소라 본문과 70인역을 비교할 때 확인된다.

iv) 고의적 변경

사본을 복사하던 서기관들이 난해한 낱말을 설명하기 위해 쉬운 말로 난외에 주석을 단 것이 본문 안으로 들어간 경우가 있다. 때로는 사본을 복사하는 서기관이 두 사본을 앞에 놓고 비교해가면서 복사하다가 서로 다른 낱말이나 구절이 있을 때 그 이문을 융합시키는 이문융합(異文融合 conflation) 현상도 있다. 히브리어 성서 본문의 역사를 보면 본문을 정확하게 베끼고 전달하기 위한 장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세기 중엽에 나온 '아리스테아스의 편지'(Letter of Aristeas)에 보면, 그리스어 70인역의 원본 문제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에는 오기가 많은 모세5경 사본들이 유포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이 보관하고 있던 '성전 두루마리'가 권위있는 사본이라는 언급이 있다. 랍비 전통에서도 제2성전 시대에 히브리어 성서 본문의 최종 정착을 위한 본문비평이 성전 두루마리를 근거로 실시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2) 본문과 사본들

i) 70인역 성서의 원본

70인역 성서란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전설적으로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나온 70명 또는 72명의 번역자가 번역했다고 해서 70인역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번역자들이 100년 이상 걸려서 번역한 것이다. 70인역이 사용한 히브리어 원본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는 다르며 70인역의 히브리어 원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ii) 사마리아 5경

사마리아 5경은 히브리어 본문의 교정판이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서체는 마소라 본문에 사용된 네모꼴 히브리어 서체(square script), 일명 아시리아 서체(Assyrian script)가 아니라, 페니키아-고대 히브리어 서체(Phoenician-Old Hebrew script), 즉 고대 히브리어 서체(paleo-Hebrew script)로 씌어져 있다. 마소라 본문과 5경을 비교해볼 때 약 6,000여 곳의 차이가 있으나 철자상의 차이가 그 주종을 이루고, 다르다고 해도 본문의 의미상 다른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마소라 본문과 다른 6,000여 곳 중에서 1,900여 곳은 70인역과 일치한다. 마소라 본문과의 차이점 중에서 극히 일부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학을 반영하는 고의적 변경도 있다(출애 20 : 17 끝부분에 그리짐 산에 성소를 지으라는 말이 첨가됨).

iii) 쿰란 본문과 다른 두루마리들

유대 광야 두루마리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BC 150년경의 십계명과 [신명기]가 기록된 '나시 파피루스'가 가장 오래된 사본이었다. 그러나 유대 광야의 여러 동굴에서 두루마리가 발견되면서부터 BC 3~2세기의 것으로 추산되는 180여 종의 서로 다른 [구약성서] 사본들이 공개되었다. 이 사본들은 가죽과 파피루스 위에 씌어진 것들이다.

쿰란의 제1동굴에서는 2개의 [이사야] 사본이 발견되었다. 하나는 BC 100~75년경의 것으로 추산되는 [이사야] 전체가 기록된 1QIsab이고, 다른 하나는 [이사야]의 일부만이 기록된 1QIsaa이다. 전자는 마소라 본문 [이사야]와 차이가 많고, 후자는 몇 개의 차이가 있지만 마소라 본문과 매우 가까운 본문임을 나타내고 있다. 쿰란 제4동굴에서는 [창세기] 단편 5개, [출애굽기] 단편 8개, [레위기] 단편 1개, [신명기] 단편 14개, [여호수아] 단편 2개, [사무엘] 단편 3개, [이사야] 단편 12개, [예레미야] 단편 4개, 소예언서 단편 8개, [잠언] 단편 1개, [다니엘] 단편 3개 등이 발견되었다. 쿰란 제11동굴에서는 [레위기] 단편을 포함하여 마소라 본문과는 다른 본문 형태를 지닌 [시편]의 마지막 1/3이 발견되었다.

이들 사본들은 그 연대가 BC 250~200년에 이른다. 이들 중 더러는 70인역에 반영된 히브리어 본문과 그 형태가 유사하고, 더러는 사마리아 5경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대다수는 전(前)마소라 본문 형태와 유사하다. 이것은 마소라 본문이 7세기경에 확정되었다고 하지만 마소라 본문이 이미 기원전부터 현재의 본문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그것이 조금씩 개정되어왔을 가능성을 반영한다. 유대 광야에서는 쿰란 외에도 마사다(73년에 붕괴된 유대인의 요새)에서 [레위기]·[신명기]·[에제키엘]·[시편] 등의 단편이 발견되었고, 안무라바아트에서는 [출애굽기]·[레위기]·[이사야]·소예언서 등의 단편이 발견되었다. 나할 레베르에서도 약간의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이들 사본의 본문 형태는 마소라 본문 형태와 거의 같다.

iv) 마소라 본문들

현재 남아 있는 히브리어 성서 코덱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 카이로 예언서'이다. 이것은 895년에 팔레스타인의 티베리아에서 모세스 벤 아셰르가 쓰고 모음 기호를 붙였다. 그다음으로 오래 된 것은 레닌그라드 코덱스인 '후기 예언서'(916경)이다. 벤 아셰르가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모음 기호가 티베리아 마소라 체제를 따른 것이다. 그다음의 것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 알렙포 코덱스'이다. 솔로몬 벤 부야가 썼고, 아론 벤 모세스 벤 아셰르가 교정하고 구두점을 찍고 마소라 주기를 붙인 것으로서, 93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이 사본은 [구약성서] 전체를 포함한 것이었으나 모세5경과 성문서 부분이 거의 소실되고 예언서 부분만 그대로 남아 있다. 아론 벤 모세스 벤 아셰르의 체제를 따르는 또다른 두 사본이 있다. 하나는 BM(4445) 사본으로서 모세5경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95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본다. 또다른 하나는 레닌그라드 사본으로서 [구약성서]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는 MSB 19a 사본인데, 이것이 완성된 것은 1008년이다. 이밖에도 1105년에 씌어진 예언서 로이클린 코덱스(Codex Reuchliana of the Prophets)가 있다.

v) 마소라 자료들의 대조

일찍이(1050 이전) 미샤엘 벤 우지엘이 자신의 책 [키타브 알 훌라프 Kitab alHulaf]에서 벤 아셰르의 마소라 본문과 벤 납달리의 마소라 본문 사이의 차이를 비교한 바가 있다. 솔로몬 예디다 노르지는 [민하트 샤이 Minhath Shai]로 알려진 본문비평주석에서 방대한 양의 마소라 본문 자료들을 비교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1626년에 완성하여 1742년에 나온 '만투아 성서'(Mantua Bible)에 함께 인쇄되어 나왔다. 벤저민 케니콧은 615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52개의 인쇄본을 수집하여 2권으로 편집했다(1776~80). 조반니 베르나도 데 로르시는 731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300개의 인쇄본들을 수집하여 4권으로 펴냈고(1784~88), C.D. 긴스부르크는 70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17개의 초기 인쇄본들을 수집하여 4권으로 펴냈다(1908~26).

vi) 인쇄본들

1488년까지는 랍비의 주석성서에 포함되는 낱권들만 나왔다. [시편](1477)·[모세5경](1482)·[예언서](1485/86)·[성문서](1486/87) 등이 이탈리아에서 인쇄되어 나왔다.

[구약성서]의 첫 인쇄본은 1488년에 이탈리아의 손시노에서 나온 것이다. 이어서 1491, 1493년에는 나폴리에서, 1494년에는 브레스키아에서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인쇄되어 나왔다. 이상 3권은 유대교 쪽에서 만든 것이다. 그리스도교 쪽에서 나온 첫번째 [구약성서]는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시메네스가 감수한 전 6권의 '콤플루툼 학파 대역성서'(Complutensian Polyglot)이다. 이중 4권에는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온켈로스의 아람어역(타르굼) 모세5경이 들어 있다. 알칼라에서 인쇄되었으며(1514~17), 1522년에 유포된 것으로서, 이 성서는 서유럽에서 히브리어 본문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히브리어 자음 본문에 모음 기호와 억양 부호가 첨가된 본문을 중심으로 아람어역 타르굼이 대조되어 있고, 중세기에 나온 유대교 랍비들의 주석이 함께 편집되어 있는 성서를 ' 랍비 성서'라고 하는데, 최초의 '랍비 성서'는 펠릭스 프라텐시스가 편집하고 다니엘 봄베르크가 출판한 것(1516/17)이다. '제2 랍비 성서'는 야코프 벤 하임 이븐 아도니야가 편집하고 봄베르크가 출판한 것으로서, 모두 4권으로 되어 있는데(1524/25), 이것이 바로 현재까지 전해져온 히브리어 성서의 표준판이 되었다. 이 성서에는 그 이전의 어떤 편집에서도 볼 수 없던 광범위한 마소라 주기 곧 본문비평 자료들이 들어 있다. 다만 불행하게도 벤 하임이 사용한 사본들이 후대의 것이고, 히브리어 본문이 단일 전승을 반영하지 못하며, 여러 사본의 본문을 절충하여 만든 본문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런던에서는 긴스부르크가 편집한 히브리어 성서의 비평적 편집본이 나왔다(1894, 1908, 1926). 마소라 본문과 인쇄되어 나온 여러 사본들 및 고대역들과 대조하여 개정된 것이다. 긴스부르크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교 학자였으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긴스부르크가 편집한 이후에 독일의 성서학자 루돌프 키텔과 파울 칼레가 편집한 히브리어 [구약성서] ' 비블리아 헤브라이카'(Biblia Hebraica)가 나왔다. 이 책은 처음 2판에서 벤 하임의 '제2 랍비 성서' 본문을 사용했으나, 알브레흐트 알트와 오토 아이스펠트가 편집한 제3판(1937)부터는 벤 하임의 본문 대신 레닌그라드 코덱스(B 19a)를 사용했다. 이 편집본에는 2종류의 본문비평 장치가 있다. 하나는 편집자의 생각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사항이나 극히 경미하다고 생각되는 사본상의 차이점을 열거해 놓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문비평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이나 편집자의 판단에 사본상의 중대한 차이점으로 생각되는 사항들 및 편집자 자신의 비평적 견해를 적은 것이다. 1957년판에서는 유대 광야 두루마리와 비교한 것이 첨가되었다. 1960년대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에서 또다른 비평적 편집본을 출판하기 시작했는데, 3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기본 본문으로는 알레포 코덱스의 히브리어 본문을 사용했으며, 사본 비교, 고대역 비교 등이 포함된 본문비평 장치는 현재까지 나온 다른 어느 비평적 편집본보다 더욱 더 방대하고 철저하다. 1965년에 [이사야] 견본이 나왔다. 가장 최근의 비평적 편집본은 K. 엘리거와 W. 루돌프가 편집한 히브리어 성서인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슈투트가르텐시아'(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 1967/77)이다. 이것은 키텔의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3판을 거의 40여 년 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학계에 내놓은 것이다. 편집진과 본문비평장치 집필진이 거의 다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작성 원칙과 배열방식도 완전히 그 면모를 바꾸었다.

 

3) 초기 역본들

i) 아람어 타르굼

BC 5, 6세기경부터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아람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었고, 팔레스타인 유대 사회와 디아스포라(여러 나라로 흩어진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아람어를 쓰게 되자, 유대인 회당에서는 예배 때 통역자(메투르게만)가 등장하여 예배 때 낭독되는 율법서와 예언서 관련 본문 등을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통역했다. 처음에는 구두로 통역되고 전승되던 것이 후대에 이르러 통역 내용이 일정한 형식으로 굳어졌고 드디어 기록으로 정착되었다.

율법서 타르굼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온켈로스의 타르굼으로 알려진 바빌로니아 타르굼(Babylonian Targum)이다. 이것은 본래 팔레스타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바빌로니아로 건너가 거기에서 개정되고 크게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9세기 직후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와 다른 여러 종류의 타르굼들을 제치고 독자적 위치를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문자적인 번역이면서도 랍비들의 주석을 번역에 반영시키고 있다.

팔레스타인 타르굼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요나단의 타르굼이다. 요나단은 14세기경부터 생긴 이름으로서 예루살렘 타르굼(Targum Jerusalem)을 뜻하는 히브리어 약자 'TJ'를 요나단의 타르굼(Targum Jonathan)으로 잘못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옛 팔레스타인 타르굼(Old Palestinian Targum)과 온켈로스의 초기 번역을 뒤섞은 것이다. 랍비들의 주석·설교·교훈 등이 번역에 많이 첨가되어 있다.

사마리아 5경을 번역한 타르굼도 있다. 유대인의 타르굼이 문자적인 번역인 데 비해 이것은 좀 자유스러운 번역이다. 본문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적은 없다. 예언서 타르굼도 본래는 팔레스타인에서 나왔으나 바빌로니아로 건너가 최종적으로 개정되었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완성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BC 1세기말에서부터 AD 1세기초까지 활동한 유명한 랍비였던 힐렐의 제자 요나단 벤 우지엘의 번역으로 본다. 이것이 엄격한 문자적 번역은 아니지만 온켈로스에 의존한 증거가 많이 나타난다. 성문서의 아람어 역은 모두 5세기 이후에 나온 것들이다.

ii) 70인역성서(LXX)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배경에 관해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언급되어 있다. 이 편지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BC 285~246)가 이집트를 다스릴 때 기록된 편지임을 드러내려고 당시 관리로 있던 아리스테아스라는 그리스 사람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편지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요청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교 학자들이 와서 히브리어 율법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된 사정을 언급하고 있다.

같은 이야기가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여 필로·요세푸스·[탈무드]·교부들의 글에도 나타난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 편지의 저자가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으로서 율법서 번역이 끝난 다음에 이와 같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70인역이란 BC 3세기 중엽에 번역된 구약의 모세5경 곧 율법서 부분을 일컫는다.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모두 그리스어로 번역되기까지는 그후 1세기 이상이 걸렸다고 보고, BC 1세기까지는 번역이 완료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하여 70인역 성서는 한편으로는 유대교를 이방 세계에 알리는 통로가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70인역을 자기들의 성서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유대교에서는 70인역을 버리고 자기들의 히브리어 본문성서를 다듬는 일에 더 열성을 보였다. 제2성전 파괴 이후 새로운 히브리어 본문이 편집되면서, 히브리어 본문과 70인역 사이의 차이점들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게 되자, 그리스어로 [구약성서]를 읽던 사람들 쪽에서 최신 히브리어 본문을 대본으로 하는 새로운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iii) 아퀼라역본

아퀼라는 소아시아의 폰투스 출신으로 유대교인이 된 사람으로서, 랍비 아키바의 지도를 받으면서 130년경에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는데, 극도로 직역을 했다. 전체 역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인용된 부분들과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Hexapla : 6개 언어 대조성서)에 그 단편이 남아 있고, 카이로의 고본 서고에서 나온 재활용 양피지(palimpsests : 한 번 쓴 양피지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에 단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iv) 테오도루스의 개정본

그리스어 번역본의 2차 교정이 70인역을 개정한 것인지, 아니면 70인역 외에 다른 그리스어 역을 개정한 것인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2세기 후반에 테오도루스라는 사람이 개정했다. 히브리어 음역의 빈도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v) 심마쿠스의 역본

2세기말 심마쿠스가 번역했다. 번역자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번역은 우수하지만 영향력은 미미했다. 히에로니무스가 그의 불가타 역에서 심마쿠스의 번역을 활용하긴 했으나, 오늘날 그의 번역은 '헥사플라'를 통하여 단편만이 알려져 있다.

vi)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

여러 가지 상이한 번역판을 갖게 된 3세기에 이르러서 성서 본문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함으로써 혼란이 생겼다. 230~240년경에 카이사리아에서 활동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헥사플라'를 편집했다. 히브리어 본문, 히브리어 본문의 그리스어 음역, 아퀼라 역, 심마쿠스 역, 70인역, 테오도루스의 개정본을 평행으로 편집하여 비교해볼 수 있게 했다. 오리게네스의 주요관심은 70인역이었다. 그는 70인역 본문을 히브리어 본문과 비교하여,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는데 70인역에만 있는 첨가된 본문에는 의구표(疑句標)를 했고, 히브리어 본문에는 있는데 70인역에 그 본문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곳에는, 다른 그리스어 번역에서 그 부분을 가져와서 70인역에 삽입시키고 앞뒤에 의구표를 붙여 놓았다. 의구표란 고사본의 의심스러운 본문이나 재생시킨 본문을 표시하던 단검표(+), 마이너스표(-), 나누기표(÷), 별표(*) 등을 일컫는다. 헥사플라의 원본은 600년경까지는 존속되었던 것 같으나, 오늘날에는 단편만 남아 있다.

vii) 70인역 성서 사본들과 인쇄본 사본

편의상 파피루스 사본, 대문자 사본(Capitalletters : Uncials), 필기체 소문자 사본(Cursive script : Minuscules)으로 나뉜다. 파피루스 사본의 수는 수백 개에 이르고, 크기는 다양하며, 70인역이 형성되던 초기에서 7세기 중엽의 것까지 있다. 특히 이집트에서 발견된 [신명기] 파피루스는 기원전의 것이다. 파피루스에 씌어진 것이 아니고 양피지나 가죽에 씌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쿰란에서 발견된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단편 조각 사본들, 그리고 나할 레베르에서 발견된 그리스도교 형성 초기시대의 두루마리 사본도 중요한 고대 사본들이다. 가장 중요한 파피루스 사본은 구약에 속하는 9권의 단편들을 보여주고 있는 11개의 코덱스로 되어 있는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이다. 이 사본이 만들어진 것은 2~4세기경이다. 그후 300여 년 동안 파피루스 본문들이 급증했고 현재 200여 개의 사본들이 남아 있다.

대문자 사본들은 4~10세기에 나온 것들로서 모두 코덱스(책 모양)로 되어 있다. 괄목할 만한 것들로는 4세기의 바티카누스 사본(Codex Vaticanus : [구약성서] 전체), 4세기의 시나이티쿠스 사본(Codex Sinaiticus : [구약성서] 일부),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누스 사본(Codex Alexandrianus)이다. 이 셋은 본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다 포함한 것들이었다. 이밖에도 성서의 일부만 보여주고 있는 사본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예언서를 보여주고 있는 6세기의 마르칼리아누스 사본(Codex Marchalianus)은 값진 것이다.

필기체 소문자 사본은 9세기 이후부터 나타난다. 11~16세기에 1,500여 개의 사본들이 발견되었으나 그들은 모두 같은 본문을 반영하는 사본들이다. 비록 후대의 것이지만 좋은 본문을 간직한 대문자 사본을 베낀 것일 때에는 가치가 있다. 가장 먼저 인쇄된 70인역은 '콤플루툼 학파 대역성서'1514~17)이다. 이것은 1522년에 비로소 유포되었으므로, 1518년에 베네치아에서 나온 알다인판(版)이 실제로는 맨 처음에 나온 인쇄본이라고 할 수 있다. 1587년 로마에서 식스투스(교황 식스투스 5세) 판이 나왔고, 19, 20세기에 들어서서 여러 가지 비평적 편집본들이 나왔다.

viii) 콥트어 역본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어권 밖으로 퍼져가면서 그곳 언어로 성서가 번역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콥트어 성서이다. 3세기말 4세기초에 번역된 것으로 보이며, 번역 대본은 그리스어 성서이다. 부분적으로는 고대 라틴어 역본과 유사성도 보인다.

ix) 아르메니아어 역본

5세기초까지 아르메니아 민족 교회는 그동안 문학과 예배 의식에서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를 함께 사용해왔으나, 성 메스로프(361~439)가 아르메니아어 알파벳을 만들어 아르메니아 민족 문학의 기반을 닦았는데, 이때 성서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었다. 첫 번역은(414경) 시리아 역 페시타(Peshitta)를 대본으로 번역했고, 곧 이어서 개정했다.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최종적인 공인 번역은 70인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지만 여기에도 페시타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x) 그루지야어 역본

아르메니아의 전승에 따르면 그루지야어 역본도 메스로프의 번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루지야어 [구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부분인 [시편]도 5세기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지는 않는다. 사본들은 그리스어 역본이나 아르메니아 역본에 근거해 있다.

xi) 에티오피아어 역본

4, 5세기경에 에티오피아에 그리스도교가 자리잡으면서 성서 번역이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것은 70인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13세기의 것이다. 14세기 이후의 사본들에는 아랍어 역과 콥트어 역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많은 부분이 히브리어 본문과 일치하고, 70인역 본문과는 큰 차이를 나타낸다.

xii) 고트어 역본

고트족은 오늘날 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로 알려진 지방에서 살았다. 4세기 중엽 그리스도교 선교사였던 울필라스가 고트어 알파벳을 발명하여 성서를 번역했다. [구약성서] 번역은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극히 일부 단편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다 없어졌다. 그리스어 역을 대본으로 번역했다. 고트어로 기록한 문헌이라고는 성서 단편적 사본뿐이다.

xiii) 고대 라틴어 역본

2세기 중엽 라틴어 역 [구약성서]가 북아프리카와 갈리아 지방에 유포되고, 3세기 초에는 로마에도 유포된 흔적이 있다. 아프리카의 로마 점령지에 살며 라틴어를 쓰던 유대인들이 번역한 것을 그리스도교에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원본도 히브리어가 아니고 그리스어 역이다. 고대 라틴어 역본은 '라틴어 옷을 입은 70인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70인역과 관계가 깊다. 고대 라틴어 역본에는 오리게네스가 개정하기 이전의 70인역의 상태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본문비평에 있어서 고대 라틴어 역의 비중이 크다. 3세기까지 여러 종류의 라틴어 역들이 유포되고 있었다. 그 번역이 하나의 번역본에서 나온 개정판들인지,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번역된 것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382년경 교황 다마수스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고대 라틴어 역본들을 정리했다.

xiv) 불가타 역본

신학적 토론과 예배의식에서 사용되는 통일된 본문이 필요하게 되자, 다마수스가 이 일을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에게 맡겼다. 히에로니무스는 라틴어와 히브리어 실력을 고루 갖춘 그리스도교 성서학자였다. 그는 3종류의 라틴어 [시편] 개정판을 낸 바 있다. 첫번째 개정은 70인역에 근거하여 개정되었으므로 '로마 시편'이라고도 한다. 2번째 개정은 팔레스타인에서 펴낸 것인데, 헥사플라 70인역에 입각하여 라틴어 역을 히브리어 원문 쪽에 가깝게 개정했다. 갈리아 지방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으므로 갈리아 시편이라고도 한다. 후에 이 시편이 불가타 역에 그대로 들어간다. 3번째 개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개정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번역이다.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된 것이지만 널리 유포되지는 못했다. 이것을 준비하는 동안 히에로니무스는 고대 라틴어 역을 다만 그리스어 역에 근거하여 개정한다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에로니무스는 라틴어 성서를 히브리어 원문 성서에서 직접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390년에 시작하여 405년에 끝냈다. 그러나 이미 서방교회에서는 그리스어 70인역이 굳게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역은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정착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그의 라틴어 번역이 70인역의 내용과도 달랐고 고대 라틴어 역과도 다른 곳이 많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읽어오던 본문과 다르다고 하여 오히려 라틴어 역의 권위가 도전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지도자는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역 성서로 인해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가 갈라지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걸렸지만 결국 히에로니무스의 새 라틴어 역은 우수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8세기에 비로소 그의 번역은 라틴어 불가타가 되어서, 종교개혁 때까지 서방교회의 성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후로도 상당 기간 고대 라틴어 역과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 역을 손으로 베껴서 보급하는 과정에서 번역문에 많은 변화가 가해져 일종의 종합 본문이 되고 말았다. 손으로 베끼는 과정에서 본문의 변화까지 겹치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8, 000여 개의 사본들 사이에 이독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 중세기에 불가타 역 회복을 위한 몇 번의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하다가,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불가타 역을 공인하게 됨에 따라 개정본의 필요성이 더 절실해졌고, 15세기 중엽부터 인쇄술이 발달하자 번역 본문을 정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식스투스판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했으므로 교황 클레멘스 8세가 1592년에 새 판을 간행했는데, 이것이 로마 교회의 공인 불가타가 되었다.

xv) 시리아어 역본

시리아 교회가 가지고 있던 시리아 역 성서는 '페시타'(단순한 번역)라고도 알려져 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누가 언제 번역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번역은 본래 1세기경에 번역되었던 것 같고,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아리아베네 지역에 있던 유대인 사회에서 번역하여 사용했던 것 같다. 페시타는 문체도 다양하고 채택한 번역 방법도 다양하다. 모세5경 부분은 마소라 본문과 아주 가깝지만, 다른 부분은 70인역과 가깝다. 마소라 본문과 가까운 본문은 유대교인들이 번역한 것이고, 70인역과 가까운 본문은 그리스도교 쪽의 개정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5세기 시리아 교회가 네스토리우스파(동시리아)와 야코부스파(서시리아)로 나뉘면서 페시타의본문사도 2갈래로 갈라진다.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고립되어 있었으므로 그 교회가 간직하고 있던 사본이 덜 손상되었을 것으로 본다. 6세기초에 마북의 감독 필록세노스가 70인역의 루시아 개정본을 근거로 페시타를 개정했다. 617년에는 헥사플라에 들어 있는 시 리아어 역을 텔라의 주교인 파울루스가 헥사플라 70인역에 근거하여 개정했다. 지금 단편만 남아 있는 팔 레스타인 시리아 역은 에데사 야코부스(708 죽음)가 새롭게 개정한 것이다. 현존하는 페시타 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442년에 나온 것이다. 완전한 형태로보존된 4권의 코덱스는 5~12세기 때의 것이다. 아직 비평적편집본은 없으나, 국제구약학회가 준비하고 있다.

xvi) 아랍어 역본들

최초의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역본은 사디아 벤 요세프(892~942)가 히브리어에서 번역한 것으로서 히브리어로 씌어진 아랍어 역본이다. 이 번역은 이집트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아부 알 하산이 이것을 대본으로 모세5경을 번역했으며, 11~12세기에 아랍어 역 사마리아 5경으로 받아들여졌다. 또다른 아랍어 역 사마리아 5경은 아부 사이드가 13세기에 번역한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다른 여러 번역들 중에 10세기에 야피트 이븐 알리가 번역한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946년 스페인 코르도바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벨라스케스의 아들 이삭이 복음서를 라틴어에서 번역했다. 아랍어 역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본으로는 16세기에 번역된 것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관되어 있다. 19세기의 것으로 파리와 런던에 있는 '대역성서'(Polyglots)에 아랍어 역이 보존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아랍어 역 사본들은 히브리어·그리스어·사마리아어·시리아어·콥트어·라틴어 중에서 번역된 것 등이 함께 전해져오기 때문에 번역판들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 만큼 아랍어 역은 본문비평 자료로서는 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19, 20세기에 개신교와 가톨릭이 번역한 현대 아랍어 역들이 있다.

 

4) 후기 및 현대 역본들(영어)

i) 위클리프역본들

飜譯이라 부를 수 있는 최초의 영어 번역 성서는 '위클리프 역'(Wyclif's Version : 1382)이다. 이것은 영어로 번역된 최초의 성서이다. 영국에 그리스도교가 들어간 지 1,000여 년 만에 번역된 것이다. 그는 일반신도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성서를 번역했다. 그를 일컬어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와 함께 번역한 사람으로는 허포드의 니콜라스가 있다. 니콜라스는 [구약성서] 번역을 맡았으나 후에 추방되었다. 위클리프는 1380년에 [신약성서]를 번역했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완역은 1382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인쇄된 성서가 아니고 손으로 쓴 성서이다. 후에 J. 퍼비가 '위클리프 역'을 전체적으로 개역했다(1388). 위클리프는 1384년에 죽었다. 그러나 44년 후인 1428년에 그가 성서를 번역했다는 이유로 그의 묘가 파헤쳐지고 그의 시신이 화형당했다. 위클리프가 번역한 성서는 나온 지 33년 후인 1415년에 불태워지고 말았다. 당시 교회는 신도들이 성서 읽는 것을 금했었다. '위클리프 역'의 단점으로는 그것의 번역 대본이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나 그리스어가 아니라 라틴어 불가타였다는 점, 이미 낡은 번역이었다는 점, 고어투성이었다는 점, 독자를 별로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ii) 윌리엄 틴들의 역본

윌리엄 틴들은 먼저 [신약성서] 번역에 착수하여 1525년 쾰른에서 그것을 인쇄하여 4절판으로 출판했다. 보름스로 쫓겨간 다음 그곳에서 신약을 8절판으로 출판하여 3,000부를 몰래 영국으로 들여 보냈다. 일반신도들은 그것을 읽으려고 샀고, 워럼 대주교는 불태워버리려고 그것을 사들였다. [신약성서] 번역을 마친 틴들은 곧바로 [구약성서] 번역에 착수하여 1530년 히브리어 성서에서 번역된 모세5경이 나온다. 그의 친구 G. 조이가 [구약성서]의 나머지 부분을 번역했는데, [시편]에서 [애가]까지만 히브리어 성서에서 번역했고, [이사야]는 라틴어 역에서 번역했다. '틴들 역 교정본'이 1535년에 나왔지만 아직 [구약성서]는 완역되지 않았다. 드디어 1536년 10월 6일 틴들은 교살되고 화형당했다. 틴들은 7개 언어에 능통했으며 특히 그리스어에 능통했고 문장과 문체에도 유능한 학자였다. 1611년에 나온 '제임스 왕 역본'의 80%가 틴들의 문체라고 한다. 그의 평생 목표는 평신도들에게 그들이 읽을 수 있는 그들의 언어로 번역된 성서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iii) 마일스 커버데일의 번역본

1535년 10월에 나온 최초로 인쇄된 영어 성서이다. 번역자 마일스 커버데일은 함부르크에서 틴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번역은 유럽 대륙 취리히에서 인쇄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을 헨리 8세에게 봉헌했으며, 독일어 역과 라틴어 역 성서를 번역했다. 틴들의 [신약성서]와 모세5경도 참고했다고 한다. 커버데일 역은 틴들의 번역에 크게 의존하면서 아직 틴들이 완성하지 못한 부분을 독일어 역과 라틴어 역에서 거듭 번역하여 완성시켰다.

iv) 토머스 매튜 역본(1517)

틴들 역의 또다른 교정판이다. 1517년 유럽 대륙 안트웨르펜에서 인쇄된 것으로 생각된다.

v) 큰 성서(La Grande Bible : 1539)

커버데일이 맡아서 펴낸 것으로, 틴들-토머스 매튜 역본(1537)의 재교정판이다. 이것을 '큰 성서'라고 하는 까닭은 판형이 유난히 컸기 때문이다. 1539년에 완성되어 성직자들에게 배포된다.

vi) 제네바 성서(1560)

틴들의 번역 성서가 나오면서 1525~39년은 성서의 번역과 개역이 활발하던 기간이었다. 왕실 쪽에서의 묵인이 이런 번역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헨리 8세 때부터 가톨릭 쪽의 압력으로 번역이나 개역이 금지되기 시작한다. 틴들의 이름으로 된 성서 번역은 모두 금지되었고, 노동자나 여성은 성서를 읽는 것이 금지되었다. '큰 성서' 외에는 모든 성서가 금지되었고, '큰 성서'도 상류계급 사이에서만 읽혀졌다. 1547년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개신교도인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자 일반 백성에게 성서를 보급하고 개방하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대주교였던 크랜머가 이 일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자 타국으로 떠났던 종교개혁자들도 귀국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치세 기간이 짧았고, 그의 뒤를 이은 메리 여왕은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과 성서학자들이 약 300여 명이나 순교했다. 대주교 크랜머도 이때 순교했다. 커버데일은 유럽 대륙으로 피신하여 제네바로 갔다. 제네바는 신학자 테오도르 베자와 장 칼뱅의 고향이다. 칼뱅의 동서였던 윌리엄 위팅엄이 존 녹스에 이어 제네바의 잉글랜드 교회 후계자가 되었는데, 바로 이 사람이 '제네바 성서' 발행에 가장 책임이 컸던 인물이다. 제네바 성서는 1560년에 완역되었다. 이 성서가 나오기까지 위팅엄을 도왔던 인물이 바로 커버데일 역을 냈던 커버데일이다.

제네바 성서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영어 성서로서는 처음으로 절 구분이 되었다는 점인데 로베르 에티엔이 그의 그리스어 [신약성서]에 적용했던 절 구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제네바 성서는 큰 성서의 교정판이다. 틴들의 공헌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구약은 히브리어 본문과 라틴어 역 본문에 따라 철저히 교정된 것이다. [신약성서]는 주로 틴들 역의 교정이다. 이 성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봉헌되었다. 엘리자베스는 1558년에 즉위했고, 개신교 편을 강하게 들던 왕이었다. 제네바 성서가 당시 교회에서 '큰 성서'를 대신하지는 못했지만, 일반신도들 사이에서는 널리 유포되었다. '감독성서'(1568)가 나올 때까지 이 두 성서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제임스 왕 역본이 나올 때까지 제네바 성서는 140여 회나 판을 거듭하면서 출판되었다. 올리버 크롬웰 장군과 그의 군대가 바로 이 성서를 읽었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신대륙 북아메리카로 간 청교도들, 존 버니언, 셰익스피어, 심지어는 '제임스 왕 역본'을 낸 제임스 왕도 바로 이 제네바 성서를 읽었다. 제네바 성서의 [신약성서]는 1557년에 나왔으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다 번역되어 나온 것은 1560년이다. 이것이 로마자로 인쇄되고 절 구분이 된 최초의 영어 성서인 제네바 성서 초판이다. 로렌스 톰슨(1539~1608)이 1576년에 제네바 성서의 신약을 교정하여 내놓았다. 주로 베자의 라틴어 역 [신약성서](1565)와 비교하여 교정했는데, 이 교정도 1615년까지 45판이나 판을 거듭했다. 이것을 흔히 제네바 톰슨 성서라고 한다. 톰슨이 교정한 제네바 성서를 유니우스(1545~1602)가 계속 교정하여 1592, 1594, 1596년에 나왔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교수인 유니우스가 [요한의 묵시록]의 주석을 내면서 제네바 톰슨 성서의 묵시록 부분을 교정하여 [요한의 묵시록] 교정을 합친 제네바-톰슨-유니우스 성서가 1603, 1606, 1607년에 출판되었다.

vii) 감독성서

교인들 사이에서는 제네바 성서가 읽히고, 교회의 강단에서는 '큰 성서'가 읽히고 있었다. 제네바 성서의 우수성을 잘 알고 있던 대감독 파커는 '큰 성서'를 교정하여 기존의 두 번역성서를 대치하고자 했다. 교정 작업에 대거 참석했던 이들이 감독들이었으므로 이것을 감독성서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약성서] 본문은 제네바 성서 그대로이고, [신약성서] 본문은 파커 대감독 자신이 많이 교정했다.

viii) 두에랭스 성서

(1582/1610)로마 가톨릭 측에서 번역해낸 일상어역이다. 프랑스 랭스의 알렌 추기경이 시작했고, 본격적 작업은 두에대학교 히브리어교수였던 그레고아르 마르탱이 맡았다. [신약성서]가 1582년에 나왔고, [구약성서]도 곧이어 완역되었으나 출판 비용이 없어서 지연되다가 대학이 랭스에서 두에로 옮긴 뒤인 1609~10년에 출판되었다. 그래서 [신약성서]는 랭스 [신약성서]로 알려졌으나, [구약성서]·[신약성서]는 두에 성서로 불린다.

ix) 제임스 왕 역본(1611)

엘리자베스의 오랜 통치가 1603년에 끝났다. 여왕이 통치하는 동안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갈등이 크게 진전되었다. 1604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제임스 1세로 등극했다. 즉위하던 첫해 그는 원전에 근거한 새로운 성서 번역을 지시했다. 1604년 6월 30일 제임스는 학자 54명을 임명하여 새 번역에 참여하게 했다. 현존하는 기록에는 실제로 번역에 참여한 학자가 49명으로 나온다. 모두 6개 반으로 나뉘어 4개 반은 구약을 번역했고 2개 반은 신약을 번역했다.

웨스트민스터 1반은 5경을 포함하여 [역대기 상]까지, 케임브리지 1반은 [역대기 하]에서 [전도서]까지, 케임브리지 2반은 외경 나머지와 므나쎄의 기도까지, 옥스퍼드 1반은 예언서를, 옥스퍼드 2반은 복음서·[사도행전]·[요한의 묵시록]을, 웨스트민스터 2반은 나머지 서신을 번역했다. 번역을 시작한 지 7년 만인 1611년에 번역이 완성되었다. 70인역 이후 2번째로 왕의 지원으로 번역된 성서이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전에서 번역된 것이지만, 틴들과 커버데일 번역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라틴 역본, 랭스의 신약, 루터의 독일어 역 성서의 영향도 받았다.

1611년 이 번역본이 나올 때 'He'판과 'She'판, 2가지 판으로 나왔다. 이것은 일부러 2가지 판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쇄자의 오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룻기] 3장 15절 끝에 성 안으로 들어간 사람을, 보아스로 보아서 "He went into the city"라고 한 인쇄본과, 룻으로 보아서 "She went into the city"라고 한 인쇄본 때문에 본의 아니게 He판과 She판이 생긴 것이다. 한국어 개역 성서의 본문은 "(보아스가) 보리를 6번 되어 룻에게 이워주고 성으로 들어가니라"라고 하여 He판의 이해를 따르고 있고, 난외주(欄外註)는 시리아어 역 페시타와 라틴어 역 불가타를 따라 "이워주니 그가(룻이) 성으로 돌아가니라"라고 번역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She판의 이해를 따른 것이다. 1631년판에는 아주 치명적인 오기가 생겼는데, 이 오기 때문에 '악한 성서'(Wicked Bible)라는 별명이 생겼다. [출애굽기] 20장 14절 "간음하지 못한다"가 not이 빠져서 "간음 할지니라"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인쇄소는 이것 때문에 당시 300파운드의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1717년판에는 [루가의 복음서] 20장의 머리제목의 포도원(vineyard)이 초(vinegar)로 잘못 인쇄되어, 그만 '초 성경'(Vinegar Bible)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비록 왕의 후원으로 번역된 것이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많은 반대에 부딪혀야 했으며, 거의 40여 년 동안이나 반대자들과 싸워야 했다. 또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전에서 번역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때 사용된 원본이 그다지 좋은 사본이 아니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1611년 발간된 이래 1615, 1629, 1638, 1654, 1701, 1762(케임브리지 성서), 1769년(옥스퍼드 성서)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x) 영어 개역 성서(English Revised Version : 1881/85)

제임스 왕 역본의 본격적 개정작업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제임스 왕 역본의 [신약성서]가 대본으로 사용한 그리스어 사본은 아주 빈약한 것이었고, 그후 새로이 권위있는 사본들이 발견되었으므로 개역의 필요성이 고조되었다. 1870년에 개역에 착수하여 1881년 [신약성서] 개역이 나왔다. 영국에서는 그해 5월 17일, 미국에서는 3일 후에 같은 [신약성서]를 출판했다. 제임스 왕 역본에서 거의 3만 여 곳을 고쳤다. 그중에 5,000여 곳은 제임스 왕 역본이 사용한 사본과 영어 개역 성서가 사용한 사본과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성서]가 나온 것은 1885년이었으며 [신약성서]에 비해 개정범위가 좁았다.

xi) 미국 표준역 성서(American Standard Version)

영어 개역 성서가 제임스 왕 역본의 영국 개정판이라면, 미국 표준역 성서는 미국 개정판이다. 1900년에 [신약성서]가 나오고, 1901년에 [구약성서]가 나왔다. 이때 외경은 제외되었으며, 영국식 영어 표현들이 미국식 영어표현으로 바뀌었다.

xii) 개역 표준 성서

새로운 번역이 아니라, 1901년에 나온 미국 표준역 성서의 개정판이다. 1928년 미국교회협의회 그리스도교 교육부가 미국 표준역 성서에 대한 판권을 갖게 되면서, 번역 본문에 대한 보호를 더욱 철저히 하게 되었다. 1937년 그리스도교 교육부에서는 미국 표준역 성서를 개정할 것을 결의하고 작업을 시작한 결과 1946년에 [신약성서] 개정판을 출판하고, 1952년에 [구약성서] 개정판을 출판했다. 이것이 바로 개역 표준 성서이다. 20여 개 대학과 신학교에 적을 둔 32명의 성서학자들이 작업을 맡았으며, 그중에는 유대인 학자도 1명 있었다. 1957년에 개정판이 나올 때 외경도 번역되어 나왔는데, 이것은 성서 번역에서 사해 두루마리 이사야를 반영시킨 최초의 번역이기도 하다.

xiii) 유대교 영어 역본들

영어권에 살던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 동안 제임스 왕 역본과 영어 개역 성서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교인들로서는 그리스도교 쪽에서 번역한 이런 성서들을 사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히브리어 본문 전승이 제대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것, [구약성서]에 대한 유대교적 해석과는 전혀 다른 번역, [구약성서]의 몇몇 절들에 대한 그리스도론적인 해석들이 그들에게 불편을 주었다. 그리하여 미국에 있는 유대교 출판협회가 1955년에 유대교 학자들로 번역위원회를 구성하고, 새로운 번역에 착수하여, 율법서(1962)·예언서(1978)·성문서(1982)를 출판했고, 1985년에 개정판을 출판했다.

xiv) 새 영어 성서(New English Bible : 1961, 1970)

기존 번역의 개정이 아닌, 철저한 새 번역이고, 영국식 영어 번역이다. 또한 전통적인 성서식 영어가 사라진 번역이다. 1946년에 번역을 시작하여, 1961년에 [신약성서]를, 1970년에 [구약성서]를 출판했다. 1970년에 완역이되어 나온 성서는 1주일 만에 3만 3,000부가 매진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xv) 가톨릭 역본들

가톨릭 쪽에서는 20세기 전반부까지는 두에랭스 성서를 사용했으나, 중세기 후반부터는 독자적인 번역본을 갖게 되었다. R. 녹스가 번역한 [신약성서](1945)와 [구약성서](1949)가 나왔고, 1955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1936년에 그리스도교 교리협회에서 새 번역 계획을 세워 라틴어 불가타 역을 대본으로 [신약성서]를 번역했다(1941). 그러나 1943년 교황청 성서위원회가 라틴어가 아닌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문 성서를 대본으로 하는 새로운 번역을 계획하여, 협회번역 (Confraternity Version)이 나오게 되었다(1952/61). 이것이 나중에 새 미국 성서(New American Bible)가 되었다. 구어체 성격의 또다른 역본인 예루살렘 성서 (Jerusalem Bible : 1966)는 프랑스어판 예루살렘 성서(La Bible de Jerusalem : 1956)를 대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xvi) 현대 영어 성서(Today's English Version : 1966/76)

복음 성서(Good News Bible)라고도 한다. 미국 성서공회가 구어체 영어로 번역한 것으로, 번역원칙상 전통적인 형식일치의 문자적 번역을 피하고, 내용일치의 의역을 시도했다. 1966년에 [신약성서]가 나왔고, 1976년에 [구약성서]가 나왔으며, 1979년 외경이 번역되었고, 1992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xvii) 새 국제역 성서(New International Version : 1973/78)

미국을 비롯하여 캐나다·영국·아일랜드·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의 개혁교회가 연합하여 번역했다. 1973년에 [신약성서]가 나왔고, 1978년에 [구약성서]가 나왔다. 발행자와 판권 소유자는 뉴욕 국제성서공회(New York International Bible Society)로 되어 있다. 전통적 어법과 표현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본문비평의 결과를 번역에 많이 반영시킨 것이 특징이다. [구약성서] 중에서 특히 [사무엘]과 [이사야] 등에는 사해 두루마리 사본도 많이 반영되어 있다.

xviii) 새 제임스 왕 역본(New King James Version : 1979/82)

1611년에 나온 제임스 왕 역본을 현대화한 것이다.

xix) 신개역 표준 성서(New Revised Standard Version : 1989)

미국에서 나온 개역 표준 성서의 새로운 개정판이다. 1974년에 개정 작업이 시작되어 1989년에 출판되었다. 30여 명의 학자들로 구성된 개정위원회에는 가톨릭 학자 6명과 동방정교회 소속학자, 유대교 학자도 각각 1명씩 있었다. [구약성서]의 경우는 사해 두루마리 사본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xx) 개역 영어 성서(Revised English Bible)

영국에서 나온 새 영어 성서의 새로운 개정판이다. 1989년에 나온 것이다.

 

5) 후기 및 현대 역본들(유럽 대륙)

i) 프랑스어역본들

처음으로 프랑스어 완역 성서가 나온 것은 13세기였다. 파리대학교가 중심이 되어 학자들을 동원하여 번역했는데, 그 대본은 라틴어 성서였다. 1487년에는 가톨릭 학자들이 성서를 번역하여 '큰 성서'로 출판했다. 개신교 쪽에서는 1535년에 올리베탕으로 알려진 피에르 로베르가 성서를 번역했다. 몇 차례 개정을 거듭했고, 1546년판을 낼 때에는 칼뱅이 서문을 썼다. 1553년 인쇄업자 로베르 에티엔이 이 번역을 제네바에서 출판할 때 원문의 장절을 구분하여 출판했다. 19세기 후반에 루이 스공이 프랑스어 역 [구약성서](1874)와 [신약성서](1879)를 출판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20세기에는 1956년에 완역된 도미니쿠스 수도회 학자들이 번역한 예루살렘 성서 (La Bible de Jerusalem)와 1971~75년에 나온 공동번역 성서(Traduction Oecumenique de La Bible)가 있다.

ii) 독일어 역본들

6세기에 고트어로 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있었으며, 8세기에 와서 라틴어 역에서 번역된 [마태오의 복음서]가 바이에른(독일 남부) 방언으로 번역되었다. 9세기에 복음서들의 발췌 번역과 [시편] 번역이 나왔다. 아우크스부르크 성서(Augsburg Bible)로 알려진 [구약성서]는 1389~1400년에 나왔다. 최초의 인쇄본 성서인 멘텔 성서(Mentel Bible)가 1466년에 나와 1533년까지 18판이 나왔다.

독일에서 성서 번역의 신기원을 이룬 것은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역 성서이다. 1522년에 비텐베르크에서 [신약성서]가 나왔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서] 제2판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다. 뒤이어 나온 [구약성서]는 브레시아 히브리어 성서(Brescia Hebrew Bible : 1494)를 대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루터의 히브리어와 아람어 독해력은 제한된 것이었으나, 그의 번역에는 11~12세기 프랑스의 랍비였던 라시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 있다. 1534년 루터 역 성서가 완역되었다. 루터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번역을 계속 개정했으며, 1534~46년에 11번이나 개정을 거듭했다. 마지막 판은 그의 사후에 나온 것이다.

루터의 번역은 가톨릭 번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히에로니무스 엠세르의 번역은 불가타를 대본으로 하여 번역한 것이지만, 루터 역의 영향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1534년 요한 디텐베르거가 마인츠에서 엠세르의 번역·개정판을 낼 때 재세례파(개신교의 한 분파) 역과 1529년의 취리히 번역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가톨릭의 표준 번역이 되었다. 20세기에 와서 그뤼네발트 성서(Gruenewald Bible : 1956년에 7판이 나옴)는 가장 주목할 만한 역본이다.

12~13세기에 독일어로 번역되고 히브리어로 씌어진 이디시어 역본들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인쇄본으로서는 야콥 벤 이삭 아슈케나지의 [체나 우레나(Tzenah u-Rena : 1616)가 있다. 유대교에서 번역한 최초의 독일어 역 [구약성서]는 모세 멘델손의 번역으로 1780~83년에 나왔다. 독일어로 번역된 것이지만 히브리어로 쓴 것이다. [구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독일어 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역본은 고트홀트 살로몬의 역본이다(1837). 마르틴 부버와 프란츠 로젠바이크가 히브리어 문체의 특성을 살린 번역을 했다(1925). 최근의 역본으로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Die Bibel Einheitsübersetzung : 1980), 현대 독일어 성서(Die Bibel im heutigen Deutsch : 1982), 공동번역 성서에 프랑스어 예루살렘 성서의 해설을 함께 단 새 예루살렘 성서(Neue Jerusalemer Bibel : 1985)가 있다.

 

6) 아시아의 역본들

i) 중국어역본들

중국에 그리스도교가 들어간 것은 7세기에 경교(景敎 Nestorianism)가 전파된 것을 시작으로, 13세기에 가톨릭이, 19세기에 개신교가 들어갔다. 본격적인 성서 번역은 개신교가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810년에 선교사 마르시만이 [마태오의 복음서]를 번역했다. 1822년에는 [구약성서]·[신약성서]가 간행되었다. 중국어 성서의 대표적인 두 역본은 대표역본(Delegates Version : 1854)과 화합역본(和合譯本 Union Version)이다. 대표역본은 '하느님'을 '신'(神)으로 표기한 '신판'(神版)과 '상제'(上帝)로 표기한 '상제판'(上帝版)으로 출판되었다. 화합역본은 중국의 표준 역본으로서 1891년에 시작하여 1919년에 완료된 것으로서 현재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최근의 역본으로는 홍콩 성서공회에서 간행된 현대중문역본(現代中文譯本 Todays Chinese Version : 1979)이 있다.

ii) 일본어역본들

최초의 번역은 귀츨라프의 [요한의 복음서]를 번역한 것이다(1837). 1880년에 [신약성서]가 번역되고 1888년에 [구약성서]가 번역되었는데 이것이 메이지 역[明治譯]이다. 1917년에 [신약성서] 개정판이 나왔으며, 1954년에는 메이지 역에 이어 2번째로 완역 성서가 나왔다. 이것은 구어(口語)로 개정되어 나온 성서로서 현재까지 가장 널리 쓰인다. 1970년에 기존 역본을 개정한 신개역이 나오고, 1978년에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신약이 나왔고, 1987년에는 신공동번역 성서가 나왔다.

 

7) 한국어역본들

i) 예수 셩교젼셔(1887)

한국어로 완역된 최초의 [신약성서]이다. 번역자들은 J. 로스, J. 매킨타이어, 이응찬(李應贊), 김진기(金鎭基), 백홍준(百鴻俊), 이성하(李成夏), 서상륜(徐相倫) 등이다. '로스 역 [신약성서]라고도 한다. 1887년에 [신약성서] 27권의 합본이 나오기에 앞서, 1882년에 [루가의 복음서]부터 낱권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ii) 신약젼서 (1900)

H.G. 언더우드, H.G. 아펜젤러, M.N. 트롤롭, S. 게일, W.B. 스크랜턴, 최병헌(崔炳憲), 조한규(趙閒奎), 정동명(鄭東鳴), 이창식(李昌植), 김명준(金明濬), 홍준(洪埈) 등이 번역하여 한국어로 완역된 최초의 공인번역 신약전서가 되었다. 1900년 9월 9일 정동감리교회에서 이것을 감사·봉헌하는 예배가 있었다. 1904, 1906년에 걸쳐 부분적인 개정이 있었다.

iii) 구약젼셔(1911)

레이놀스, 언더우드, 게일, 이승두(李承斗), 김정삼(金鼎三) 등이 번역한 최초의 완역 한국어 [구약성서]이다. 이것이 나옴으로써 한국에서는 한국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합친 성서를 가지게 되었다.

iv) 신역 신·구약전서(1925)

게일과 이원모(李源謀)의 역본이다. 성서공회에서 다른 역자들과 함께 성서를 번역하다가, 번역원칙에 뜻을 달리한 게일과 이원모가 개인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짧게 줄인 풀이역이 특징이다.

v) 셩경 역(1938)

1900년의 [신약성서]와 1911년의 [구약성서]를 개정한 것이다. 1936년에 구약전서(개역)가 나왔고, 1938년에 신약전서(개역)가 나왔다. 이 둘을 합본하여 펴낸 것이 셩경 역이다. 개역된 것이지만 옛 맞춤법으로 출판했다.

vi)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1952)

성경 역을 '한글 맞춤법통일안'에 따라 다시 출간한 것이다. 1933년에 조선어학회에서 맞춤법통일안이 발표된 뒤로, 한글학자들을 비롯하여 각계에서 성서공회에 개역 성서에 새 맞춤법을 채택해줄 것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1938년 개역은 끝내 옛 맞춤법을 채택했었다. 그러다가 1952년판에 이르러서 '한글 맞춤법통일안'에 따라 개역을 다시 편집·출간했으므로, 이 성서를 개역 한글판이라고 했다. 여기서 '한글판'이라고 한 것은 아직 옛 맞춤법 표기를 그대로 쓴 개역성서가 계속 출판되고 있었으므로 그것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vii)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1956)

개역 성서의 최종 개정판이다. 1952년판 개역 성서를 800여 곳이나 고쳐서 출간했다. 신약전서 개역 한글판을 1956년에 출판했고, 다음해인 1957년에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합친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을 출판했으나, 여전히 남은 오기와 오역이 있었으므로 다시 300여 곳을 고쳐서 1961년에 최종 수정판을 출판했다.

viii) 신약전서 새 번역(1967)

한국의 성서학자들이 그리스어 원어에서 직접 번역한 것으로서, 개역 성서 이후의 첫번째 새 번역이다. [신약성서]만 나오고 뒤이어 [구약성서]가 나오지 못했다.

ix) 공동번역 성서(1977)

대한성서공회는 1968년에 세계성서공회연합회와 바티칸의 교회일치진흥국 사이에 개신교와 가톨릭의 성서 공동번역 계획이 합의됨에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와 가톨릭교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성서 공동번역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여 1971년 공동번역 신약을 출판했고, 1977년 [구약성서]와 외경까지 완역하여 공동번역 성서를 출판했다. 1977년판 [구신약성서]는 개정판이다.

x) 성경전서 표준 새 번역(1993)

1983년 번역에 착수하여 1993년에 출판한 새 번역이다. 개역 성서의 개정이 아닌 새로운 번역이다. 현대 한국어, 쉬운 한국어로 번역하고, 원어의 뜻을 분명하게 파악한 다음에 한국어의 어법에 맞게 표현하고, 교회에서 실시하는 예배와 교육에 적합한 번역이 되도록 했으며, 고유명사의 음역은 개역 성서를 따르고, 한국교회가 중요하게 여기고 써온 용어는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서 번역되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 네 글자 YHWH를 '여호와'라고 번역하지 않고, 마소라 본문의 전통과 그리스도교 2,000년의 번역 전통을 따라 '주'(主)로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