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성경자료 모음

로마 카톨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박해 하다

로마 카톨릭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박해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한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고 구원이 나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합니다.
믿음 이후에 따르는 죄사함이나 거듭남이나 의로운 행위조차도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또한 바른 믿음은 오직 성경을 중심으로한 진리 말씀을 통해서만 소유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8~9 이는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세례, 성만찬, 각종 성사, 교황과 마리아 숭배 등으로 통해 천주교회 안에서만 구원 받는다고가르치니 성경과 모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웠으며, 성경이 자국어로 번역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였고, 자신들에게유리하게 변조된 성경을 보급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카톨릭의 신학적 기반을 마련한 사람은 카톨릭의 대표적인교부 신학자인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일부 신학적 업적을 이루긴 했지만, 연옥이라는 성경에 근거 없는 거짓 교리를 만들어 내었고, 성경을비유적으로 해석했으며, 천주교의 일곱가지 성사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로마 카톨릭의 권위를 높히기 위해 하나님의 왕국이 로마 카톨릭을 통해 세상 권력과 연합해 이루어진다는 정교일치적 사상을 가졌고, 이 세상에 천년왕국이 먼저 이루어진다는 '후천년주의'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카톨릭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어서라도 믿게 해야 한다고 했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카톨릭에서 이단으로 정죄한 이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주후 4~5세기 경에도 회개와 믿음을 구원에 요소로 여기고, 성직자 중심이 아닌 회중 중심의 교회를 이끌며,
성경대로 믿는
도나티스트(Donatists)라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천주교회에서 주는 세례는 유효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들의 교회에서 성경적 방법에 따라 다시 침례를 준다하여 '다시 침례를 주는 자들'이란 의미에서
'재 침례교도'(ana baptist)라고 불리웠습니다.

도나티스트들은 카톨릭의 교회관과 교리를 거부했기 때문에 세상 권력과 손을 잡은 카톨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귀양을 가거나 순교하였습니다.
유럽에 성경이 보급되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늘어나자 로마 카톨릭은 '제롬'이란 신학자를 통해 '소수 본문'을 라틴어로 번역해 14권의 외경을 포함한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란 변개된 성경을 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쳔은 수백년 동안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를 사용하지 않았고, 주로 '구 라틴 벌게이트'를보았습니다.
고대로부터 중세 유럽은 라틴어가 세계 공용어였기 때문에 주로 라틴어가 읽혀졌고, 중세 이후 영국 독일 등의 지역 언어가 정착했을 때부터 자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대로 믿었던 또 다른 그룹은 6세기부터 로마제국 동부의 알메니아 지방에서 활동한 바울파(Paulicians) 교회로지도자는 콘스틴티누스 실바누스(Constontinus Sylvanus)였고, 바울의 서신서를 소중히 여겨 바울파로 불리웠습니다.
이들은 카톨릭의 교권을 거부했고, 침례를 시행했으며, 교회안에 인간 지도자를 두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인정했습니다.

바울파는  A.D. 845년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큰 박해를 받아 재산은 몰수 되었고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되었습니다.
그들의 성경은 불 태워졌으며, 지도자 콘스타니누스는 A.D. 690년에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후의 지도자도 살해되었지만 남은 사람들이 유럽 각 나라로 피하여 갔고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바른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온전한 믿음을 통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왈덴스파(Waldenses)교회(A.D. 426-1686년)는 북부 이태리, 스위스, 남부독일, 프랑스지방 등에서 활동하던교회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박해를 피하여서 알프스의 골짜기에 내려와서 붙여진 이름(골짜기의 사람들)입니다.
지도자 피터 왈도(Peter Waldo)는 동료와 함께 신약성경을 번역했고, 당시 교황이었던 알렉산더 3세에게 자신들이번역한 성경을 인정해 줄 것을 요수하였으나 거절당했습니다.

피터 왈도는 원래 프랑스 리용 출신의 상인이었으나 카톨릭의 모순과 타락에 실망하고, 자기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준 뒤 성경을 연구하기 위한 연합체를 형성했습니다.
그들은 피드몽 골짜기에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정착했고, 당시 남부 유럽의 공통어였던 로망어(Romaunt Language)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17세기에 왈덴시안에 대한 박해가 있을 때 왈덴시안 교회의 목사였던 레거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고대 사본은거짓으로 가득차다."고 기록했습니다.
왈덴시안들은 성경을 독일어와 프랑스어로도 번역했고, 신구약 성경의 많은 부분을 암송했으며, 구원 받기 위해서는성경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는데 많은 이들이 얼어 죽거나 절벽에서 떠밀려 죽었고,동굴에 갇혀 질식사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목 매달려 죽었고, 배를 가른 채 죽었고, 익사했으며, 말에 사지가 묶여 사지가 찢어져 죽었고,
매 맞아 죽거나 칼에 맞아 죽었으며, 개 밥이 되거나 화형을 당했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계속되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왈덴시안들은 성경을 들고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에는 주후 14세기 경 거의 모든 사람들이 왈덴시안의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서기 1686년 로마 카톨릭교회는 프랑스왕 루이 14세를 움직여 그 군대를 파견하여 알프스 골짜기의 왈덴스파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여 그들을 알프스의 골짜기에서 추방하고 말았습니다.

A.D. 1517년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비덴부르크 성당의 문에 역사적인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못 박음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성경적 진리에 의해 로마 카톨릭의 권위는 크게 흔들렸고, 마침내 유럽의 2/3가 종교 개혁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루터의 무기는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독일어 신약성경'이었고, 이로 인해 보편적 다수 본문이 진리에 굶주린 크리스쳔에게도 돌아갔습니다.
이에 대항해 로마 카톨릭은 A.D. 1545년에 '트랜트 공회'를 구성해 종교 개혁을 비판하고, 카톨릭의 전통을 성경과 같은 권위로 만들었으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도 부정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에 관하여 > 성경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0) 2006.12.27
예수회  (0) 2006.12.27
오리겐과 성경부패  (0) 2006.12.27
변개된사본  (0) 2006.12.27
성경의 필사본  (0) 2006.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