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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위해 온것들/이한규의 사랑 칼럼

이한규목사님의 사랑 칼럼중에서

축복나무의 비료

영어 단어 중에는 한국말의 한 단어로 그 뜻이 정확히 표현되지 않는 단어가 종종 있습니다.
그 중에 ‘패션(passion)’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보통 ‘열정’이라고 뜻풀이되지만 조금 세밀하게 뜻풀이하면
‘가슴 시린 열정적 감정’을 말합니다.

‘패션(passion)’의 파생어로 ‘컴패션(compassion)’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접두어 ‘컴(com)’은 ‘함께’라는 뜻이므로 ‘컴패션(compassion)’은
‘가슴 시린 감정을 가지고 함께 하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상처 많은 현대인들에게는 패션(fashion)보다 패션(passion)이 더 필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은 ‘컴패션(compassion)’입니다.

어느 날, 성 프랜시스가 제자들에게 근처의 마을로 설교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다친 사람을 만나자 프랜시스는 즉시 멈춰서 그 사람을 치료해주었습니다.
조금 더 가자 며칠 동안 굶은 노숙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프랜시스는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불쌍한 사람들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지내면서 프랜시스는 한 마디도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어둠이 깃들 때, 프랜시스는 수도원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마을로 설교하러 가자고 하지 않았나요?”
그때 프랜시스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여보게! 우리가 하루 종일 했던 것이 바로 설교이네." 
프랜시스에게 설교는 ‘컴패션을 가지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설교는 필요를 느끼고 그 필요에 반응하는 것입니다(The real preaching is to feel the need and respond to the need).

컴패션은 ‘연약한 사람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내 곁에 연약한 사람이 있는 이유는 ‘그의 부족함을 파헤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허물에 엄격하고 남의 허물에 관대할 때 컴패션이 생기고,
작은 자와 큰 자를 구별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컴패션이 생깁니다.

요즘은 많은 것들이 대형화되면서 작은 것들은 점차 설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그처럼 스타를 우러러보는 때일수록 작은 자를 더 살펴야 합니다.
힘없는 사람과 친구가 되어주면 육신은 힘을 얻지 못해도 영혼은 힘을 얻습니다.
소자에게 베푼 친절과 사랑은 어디선가 은밀한 곳에서
쑥쑥 자라고 있는 축복나무의 비료가 됩니다.

행복은 주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천국의 삶은 서로 주려는 삶이고,
지옥의 삶은 서로 받으려는 삶입니다. 어떤 부인은 말합니다.
“결혼생활이 항상 지옥 같았다!” 그 말은
“서로 항상 받으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주기를 연습하십시오.
주는 삶을 통해서 소유가 줄어들수록 삶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진정한 벗도 얻습니다.
컴패션을 가지고 나눔을 실천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화려한 말들은 한낱 소음일 뿐입니다. (06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