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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주시는 하나님/빌려온 것 들

[스크랩] 앤지 연재 2탄: 퍼온글: 김장환 목사의 미국인 부인 트루디 여사

트루디 여사에 관한 글 입니다.

 

이래도 된장들은 한국남 백녀들에게 인기 없다고 억지 주장 부릴래?

 

 

말미에 한국에 오래 살면서 느낀 된장에 대한 엄정한 평가 부분이 주목 할만 합니다.

 

 

 

----------------------------------  퍼  온  글  -------------------------------------

 

 

세계적인 종교지도자 김장환 목사의 미국인 부인 트루디 여사. 그녀는 고상한 '사모님'의 삶이 아닌 빵을 만들어 장애인을 돕는 사랑의 실천을 선택했다. 한 달에 60만 원으로 생활하며 무소유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 트루디 여사의 삶이 화제이다.

1959년의 한국은 어떠했을까? 당시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100달러도 안 되었고, 전기를 제한적으로 공급했으며, 재래식 부엌에서 가마솥 걸고 장작불로 밥을 했다. 마당 후미진 곳에 있는 뒷간은 고약한 냄새에다 위험천만하기까지 했다. 그 시절 미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대학을 졸업한 트루디가 대학에서 만난 김장환과 결혼하여 가난한 한국으로 들어왔다. 열여섯 살 때부터 자동차를 운전하고 온갖 전자제품이 갖춰진 집에서 매일 샤워를 했던 트루디는 시골의 초가집으로 들어서면서 '이토록 가난한 곳에서 어떻게 살까'라고 걱정하기보다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사랑이 부푸는 파이 가게'(조선일보사)의 저자 트루디 김(65) 여사의 긍정적인 삶이 화제다. 지난 1월 9일, KBS TV '아침마당'은 트루디 여사를 '청국장을 잘 먹는 미국 할머니'로 소개했는데, 실제로 트루디 김 여사는 배추김치, 총각김치, 고들빼기, 갓김치 등 순토종 한국음식을 먹으며 생활한다. 집안에 초대한 외국 손님들에게 스테이크와 김치를 함께 내놓을 정도로 한국음식 애호가이다.
트루디 김 여사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받는 이유는 이른바 '사모님'이 아닌 일하는 여성으로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 때문이다. 트루디 김 여사의 남편 김장환 목사는 1만5,000명의 교인을 거느린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이면서 전국에 8개 네크워크를 갖고 있는 극동방송 사장이다. 전 세계 1억6,000만 명의 침례교 신자를 대표하는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으로 한 달의 반은 해외에서 보내는 국제적인 뉴스메이커이기도 하다.
트루디 여사는 김장환 목사와 함께 다니는 '사모님'의 삶을 제쳐두고 중앙기독초등학교 건물 한켠에 'Trudy's Pie Shop'을 내고 빵을 만드느라 바쁘다. 중앙기독초등학교는 장애아동과 통합교육을 하고 있는데, 장애아동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특수 교사들에게 월급을 주느라 그녀는 하루에 여덟 시간씩 빵을 만든다. 늘 앞치마를 두르고 있어 '부지런한 외국인 파출부'로 오해받는 일이 많다.

한달 생활비 60만 원

트루디 여사는 20년간 중앙유치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월급을 개인용도로 쓴 적이 없다. 직원에게 월급 통장을 맡겨놓고, 유치원 운영비로 사용하고 있다. 매달 남편에게 받는 100만 원이 생활비의 전부. 그 가운데 40만 원은 학교 관사 사용비로 내고 60만 원으로 생활한다. 생활비가 모자라지 않느냐고 묻자 트루디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기념일이 되면 교인들이 선물 대신 돈을 주곤 해요. 남편 몰래 비자금을 조성해놓았다가 모자라면 그 돈을 쓰지요. 하지만 60만 원이면 충분해요. 내가 쓰는 돈은 차비와 교회 헌금밖에 없어요. 가끔 미장원에 가고 옷을 살 때 외에는 돈 쓸 일이 없어요.”
우리 사회 상류층, 지도층 인사들이 사는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놓는 경우가 흔치 않다. 하지만 2000년 8월에 김장환 목사가 '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는 평전을 냈고, 이번에 아내 트루디 여사가 '사랑이 부푸는 파이 가게'를 펴내 이 가정의 일거수 일투족이 다 드러난 셈이다. 이 가정이 자신들의 삶을 모두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로서 물질을 멀리하는 삶을 살았고, 세 자녀를 훌륭하게 키웠기 때문이다.
1959년 미국 세계기독봉사회 선교사로 파송된 김장환 트루디 부부는 40년 넘게 선교활동을 하면서 많은 미국인과 미국단체, 국내 뜻 있는 사람들로부터 선교 자금을 많이 받았지만, 그 돈을 투명하게 관리해왔다. 선교자금으로 산 땅을 팔고, 집안의 선산을 판 자금과 미리 받은 퇴직금으로 중앙기독초등학교를 설립, 학교법인으로 등록하여 일체 재산권을 행사하지 않고 있다. 지금 이 부부는 집 한 채 땅 한 평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다 김장환 목사는 교회에서만 사례비를 받을 뿐 방송사나 다른 단체에서 일체의 사례금을 받지 않는다. 두 아들도 목사가 되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청빈한 삶을 살고 있으며 딸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외딴집에 국제결혼 부부들이 견학와

김장환 목사는 200여 명의 청년들을 후원자와 연결하여 국내 대학과 미국 대학에 유학시켰다. 무소유와 봉사하는 삶이 우리 사회에 흔치 않아 이들 부부의 사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1959년에 미국 여자가 한국으로 시집오는 것은 지금 한국 여자가 아프리카로 시집가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고들 하는데, 트루디 여사는 현재 학교 관사로 이사오기 전까지 30년 동안 주변에 집이 없는 외딴 곳에서 살면서 40분간 걸어서 시장에 다니고 교회도 1시간 동안 걸어다녔다. 외딴집에는 6년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10년간 버스도 다니지 않았으며 20년간 전화도 없었다. 어떻게 선진국에서 최빈국으로 시집와서 역경을 이겨냈느냐는 질문에 트루디 여사는 활짝 웃으면 말했다.
“다 재미있었어요. 우리 오빠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에 선교사로 가서 40년 넘게 선교하고 있어요. 함께 일하던 간호사는 에이즈에 감염되어 죽었어요. 오빠는 아무도 없는 아프리카로 갔지만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왔는데 뭐가 어려워요.”
미국에서 온 여자가 시골 외딴집에서 잘 산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에서 '트루디의 삶'을 견학하러 오는 국제결혼 부부가 많았다고 한다. 그들에게 트루디 여사는 “놀리는 사람들에게 활짝 웃어주세요. 그러면 돼요”라고 말했다.
트루디 여사는 한국이 너무 빨리 발전하여 현기증이 일 정도라며, 한국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일한 덕분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한국사람들이 정이 많고 인간적인 점, 치안이 잘되는 점, 마약퇴치에 열심인 점을 높이 샀다. 그와 함께 한국의 칠보그릇, 은제품, 목기, 작은 서랍장 등은 세계적으로 훌륭한 상품이며, 한국음식은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고 감탄했다. 한글이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우리말을 능숙하게 하면서도 한국말이 갈수록 어렵다고 엄살을 부렸다.


트루디 여사가 한국여성에 대해 내리는 점수는 그리 후한 편이 아니다. "옷과 장신구에 관심이 많고", 화제가 자녀자랑과 "어디로 놀러갈 것인가"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국이 IMF 관리체제가 되었을 때 '과소비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며 미국의 중산층이 매우 검소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트루디 여사는 미군철수 목소리가 나왔을 때 걱정이 많았다며, 대다수의 미군들이 성실하고 정의롭다는 것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했다.
미국에 가면 빨리 한국에 오고 싶어 조바심이 난다는 트루디 여사의 좌우명은 “Bloom where you are planted.”이다. 자신이 선택한 땅 한국에서 역경을 이기고 뿌리내린 트루디, 그녀의 삶이 물질만능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무언의 교훈을 주고 있다.

출처 : 된장들의 저녁식사
글쓴이 : 앤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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