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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세계 의 역사 속으로

사라센 제국

사라센제국
사라센제국
1. 서론
로마제국이 망한 후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로마제국이 망한(476) 후 지중해 세계의 주인으
로 부상한 사람들은 무슬림이었다. 말하자면 이슬람교화 그 교도들이 지중해 세계의 문화창
조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로마를 대신해 유럽기독교세계를 장악한 크고 작은 게르만족
국가는 새로이 지중해세계의 문화창조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로마를 대신해 유럽기독교
세계를 장악한 크고 작은 게르만 족 국가는 새로이 지중해의 주인으로 등장한 이슬람교도
및 여타의 이민족과 싸워 유럽을 지켜나가는 일에 매달려야 했을 뿐 고전문화의 중심지였던
지중해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기독교도의 손을 떤단 지중해는 이슬람들의 무대가
되었던 것이다.
정교일치 차제인 이슬람제국을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시키고 발전 시컨 것은 7세기 총에 창
시된 이슬람교의 발전은 곧 이슬람세계의 발전이었고 이슬람세계의 성장은 이슬람교의 성장
이었다. 이슬람교는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가장 늦게 창시된 종교이나 오늘날 3억 5천만에
달하는 신도들은 중동지역, 이집트, 터키,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을 중심으로 흑해 연안
의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 일부 및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와 필
리핀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특히 소련으로부터 분리하여 독립했거나 현재의 러시아연방으
로 분리 독립하려는 흑해연안의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타슈켄트, 체첸 등은 모두 이슬
람교 지역이다. 세게적 종교가 된 이슬람교의 성장 배경과 함께 그들이 이룩한 사라센제국
의 문화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이슬람교의 성장
1)역사적 배경
7세기 초엽의 아라비아반도는 정치적으로는 분열된 상태에 있었고 문황적으로도 변방지역적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아라비아 사막지댕에는 베두인족등이 유목생활과 오
아시스농업을 영위하고 있었고, 북부의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의 접경지대, 그리고 홍해
연안의 인구밀접지역 등에는 이들보다는 문명생활을 영위하는 아랍인들이 거주했다. 특히
비잔틴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사이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페르시아·메소포타미아·시리
아를 잇는 교역로가 막히게 되면서 아라비아반도 서부 홍해연안의 대상로를 통한 동서무역
이 활발해지고 그 지역의 대상도시가 상당히 번창하였다. 이에 따라 도시에는 부유한 지배
계층이 나타나게 되고, 빈부의 차가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교역중심지로 발전했다. 당시
아랍인들은 지중해, 홍해, 인도양 등의 바다 혹은 육로를 통해 中繼貿易을 활발하게 했을 뿐
만 아니라 향료(주석1) 와 같은 아랍세계의 물산을 유럽등지에 수출했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는 정치적 통일의 가능성이 적었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우상숭배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돌이나 나무같은 物神을 숭상했는데, 앎의 중심지로
성장하던 메카에는 이교적인 여러 神殿들이 있어 여러 지역의 巡禮者딜이 모여 들었다. 특
히 메카의 카바(Kaaba) (주석2)신전에는 수많은 彫像과 함께 카바가 안치되어 있었다.
이슬람 학자들이 '무지시대'라 부르는 6,7세기 아라비아 반도는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전반에
걸쳐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고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러한 상태는 극
에 달했는데 반도의 심장부에 위치한 메카는 이 모든 양상의 축소판과 같았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유태교와 기독교의 영향으로 우상숭배 같은 낡은 신앙에서 탈피하려는 일조의 신앙
개혁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2)이슬람교의 성립
이슬람교를 창시한 모하메드(Mohammed, 570?-632)는 670년경에 메카의 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된 그는 친척들에게 양육되었으며, 청년이 되자 연상의 부자 과부
하디자에게 고용되어 낙타몰이꾼으로 隊商에 참가하여 북쪽 시리아 지방을 자주 왕래했는데
그 때 기독교, 유대교를 비롯하여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대상으로 성공한 그는 25
세때 15세 연산의 하디자와 결혼하게 됨으로써 그는 사업보다 명상과 수도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메카 부근에 있는 '히라'라는 동굴에 들어가 수도했다. 기독교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했겠지만 그도 단식과 명상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나이 마흔이 되었을
무렵에 명상 중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알라(Islam)'의 뜻에 따르라는 계시를 들었다고 하
는데, 이때부터 그는 사람들에게 '이슬람(islam)' 주석3)을 외치고 알라의 뜻을 따르라고 가
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신이 자신에게 진리를 계시하고 자기를 사자, 즉 라술라흐(알라가 보
낸 사람)로 뽑았음을 확신했다.
무하메드는 신이 이전에 아브라함과 모세와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몸소 나타났음을 믿었으
며, 이제 마지막으로 자기 앞에 나타났다고 믿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과거의 예언자들 중 가
장 위대한 자로 인정하였으나 그의 가르침을 자기 자신이 가르침 다음의 자리에 놓았다. 또
한 그는 그리스도는 물론 자신의 신성을 결단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철
두철미한 일신사상에 있었다. 그는 그의 추종자들의 자기를 신격화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
해서도 이를 금지하였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 모하메드는 그의 예언자이다." 그는 그가
숭배한 알라신 이외의 것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三位
一體는 3신이고 따라서 우상숭배라고 여겼다. 그는 유일신 신은 알라 앞에 모든 사람은 평
등하며 신과 예언자의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가르
쳤다.
모하메드는 이슬람교를 유태교와 기독교의 완성이며, 따라서 신성한 진리의 마지막 계시라
고 했다. 그는 다만 최후최대의 예언자일뿐이었다.
모하메드는 알라신의 계시를 받은 후 메카에서 자신의 종교를 전도하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만 그도 처음에는 적지 않은 저항에 부딪혔다. 모하메드는 사람들의 우상숭배적 신앙을 공
격했고, 메카의 유력자들은 그것을 구실로 그를 박해했다. 메카에서 이처럼 어려움에 봉착해
있을 때 야트리브에서 온 순례자들이 그의 교리를 받아들인 후 그에게 야트리브의 파당적
정쟁을 조정해 주도록 요청했다. 그리하여 622년 야트리브로 옮긴 모하메드는 이 때부터 <
메디나 헌장>을 반포하고 신정적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건설하는 역사적 일을 시작했다.
융성해진 새 신앙의 중심지가 된 야트리브는 이 후 메디나(Medina, 聖市)로 고쳐 불려졌고,
622년 은 헤지라(Hegira, 聖遷)라 하여 후에 이 해를 이슬람의 기원 원년으로 삼게 된 까닭
이 여기에 있다.
모하메드는 메디나에서 新政國家를 세운 후 메디나를 중심으로 교세를 키운 후 그는 다시
메카에 쳐들어가 630년 정복자로서 금의 환향했다. 그는 카바신전에서 모든 우상을 제거하
는 대신 '카바'만은 자신의 종교에 들여놓고, 카바신전을 알라의 신전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는 아라비아반도의 통일에 진력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둔 후, 632년에 시리아 원정을 꾀하다
가 죽었다.
모하메드는 이슬람교도들, 즉 무슬림(Muslims)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義務를 규정하였는
데 ①하루에 다섯 차례 메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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