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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외경 및 자료 모음

이슬람교의 기원과 발전

집필자 : boolingoo  (2005-10-04 18

 

 

 

 

이슬람교의 기원과 발전과정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 이 문장은 쿠란에 나오는 위의 아라비아어 구절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문장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온 세상의 주님이시며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심판의 날을 주관하시는 알라께 찬미를 드리나이다. 우리는 당신만을 숭배하오며 당신께만 도움을 요청하오니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 길은 당신께서 은총을 내리신 길이며 당신의 노여움을 받는 자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는 길이 아니옵니다.”―쿠란, 수라 1:1-7.

 

모슬렘(무슬림)의 경전인 성 쿠란 혹은 코란의 첫째 장 곧 첫째 수라, 알-파티하(“개경장”[開經章])는 위와 같은 말로 되어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6분의 1이상이 모슬렘인데다 독실한 모슬렘은 이 문구를 하루에 다섯 번 하는 기도 때마다 두 번 이상 반복하므로, 이 문구는 틀림없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암송되는 말에 속할 것입니다.

 

한 자료에 의하면, 전세계에 9억 명 이상의 모슬렘이 있으며, 따라서 이슬람교는 수적인 면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바로 다음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슬람교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증가하는 주요 종교일 것입니다. 특히 아프리카와 서구 세계에서 모슬렘 운동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슬람이란 이름은 모슬렘에게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이름은 알라에 대한 “복종,” “굴복,” 혹은 “서약”을 뜻하는 것으로, 한 역사가에 의하면, “모하메드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지닌 마음속 깊은 곳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슬렘”이란 말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모슬렘은 자기들의 믿음이 충실한 히브리인들과 옛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계시의 절정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쿠란에서 히브리어 성경과 희랍어 성경을 둘 다 인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은 여러 면으로 성서에서 벗어납니다. (참조 285면 네모.) 모슬렘의 믿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종교가 어떻게, 어디서, 그리고 언제 시작되었는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무하마드가 부름을 받다

 

(참고 :  이 예언자의 이름은 여러 가지(모하메드, 무하마드, 마호메트)로 표기됩니다.  대부분의 모슬렘 자료에서 무하마드란 표기를 더 좋아하므로, 이 글에서도 그 표기를 사용했습니다.  터키계 모슬렘은 무하메드라는 표기를 더 좋아합니다.

 

모슬렘의 연대는 A.D.(라틴어, 안노 도미니[Anno Domini], 주의 해) 혹은 C.E.(통용 기원[Common Era]) 대신에 A.H.(라틴어, 안노 헤기라이[Anno Hegirae], 도피의 해)를 사용합니다.)

 

무하마드는 기원 570년경,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아라비아어, 마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압드 알라는 무하마드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였습니다. 어머니 아미나는 그가 여섯 살 정도 되었을 때 사망하였습니다. 그 당시 아라비아인들은 메카 골짜기에서, 검은 운석을 경배하던 장소인 단순한 입방체 모양의 건물, 카바 성지를 중심으로 일종의 알라 숭배를 행하였습니다. 이슬람교 전통에 따르면, “카바는 원래 아담이 하늘의 원형(原形)에 따라 지은 것을 대홍수 후에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아라비아인의 역사」[History of the Arabs], 필립 K. 히티 저) 카바는 태음년을 기준으로 하루에 하나씩, 360개의 우상을 섬기는 성역이 되었습니다.

 

무하마드는 성장하면서 당시의 종교 관습에 대해 의문을 품었습니다. 존 노스는 그의 저서 「사람의 종교」(Man’s Religions)에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무하마드는] 종교와 명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쿠라이시[무하마드가 속한 부족] 족장들 사이에 끊임없는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당혹하였다. 하지만 그를 더 크게 실망시킨 것은 아라비아 종교에 원시적 관습들이 존속한다는 사실이었다. 우상을 섬기는 다신 숭배와 애니미즘(정령 숭배), 종교적 회의와 행사에서의 부도덕, 만연한 술취함과 도박과 춤, 원하지 않는 딸을 낳으면 아기를 생매장하는 일 등이 메카뿐 아니라 아라비아 전역에 걸쳐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수라 6:137.

 

무하마드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것은 그의 나이 40세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무하마드는 혼자서 가르 히라로 불리는, 근처 산에 있는 동굴로 명상하러 가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자신이 어느 날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모슬렘 전통에 따르면, 무하마드가 동굴에 있을 때, 나중에 가브리엘로 밝혀진 한 천사가 그에게 계시되는 내용을 알라의 이름으로 암송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무하마드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그를 꽉 붙잡고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껏 눌렀’습니다. 그리고 나서 천사는 똑같은 명령을 되풀이했습니다. 이번에도 무하마드가 대답을 못하자, 천사는 다시 ‘그의 목을 졸랐’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있고 나서, 무하마드는 쿠란을 구성하는 일련의 계시 중 첫 번째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을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전통에 의하면 마치 종이 울리는 소리처럼 신의 영감이 무하마드에게 계시되었다고 합니다.―「사히 알-부카리」 중에서 「계시의 책」(The Book of Revelation).

 

쿠란의 계시

 

무하마드가 처음으로 받았다는 계시는 어떤 것입니까? 이슬람교 권위자들은 그것이 알-알라크 곧 “응혈”(凝血)이라는 표제가 붙은 제96수라의 처음 다섯 구절이라는 데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그대 주님의 이름으로, 읽으라.
그분은 응혈로 인간을 창조하셨느니라.
읽으라. 그대의 주님은 가장 은혜로운 분으로
연필로 쓰는 것을 가르쳐 주셨으며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도 가르쳐 주셨느니라.”

 

아라비아의 자료인 「계시의 책」에 따르면, 무하마드는 “저는 읽을 줄을 모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므로 무하마드는 그 계시를 반복하고 암송할 수 있기 위해서 그것을 외워야 하였습니다. 아라비아인들은 기억력을 사용하는 데 능숙했으며, 무하마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무하마드가 쿠란에 담긴 소식 전체를 받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일반적으로 그 계시는 기원 610년경부터 기원 632년에 그가 사망할 때까지, 약 20년 내지 23년 기간에 걸쳐서 있었던 것으로 믿어집니다.

 

모슬렘 자료들의 설명에 의하면, 무하마드는 계시를 받을 때마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즉시 그 계시를 암송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다시 그 계시를 기억하고 암송하여 생생하게 보존하였습니다. 아라비아인에게는 제지술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무하마드는 서기관들을 시켜서 낙타 견갑골·야자잎·나무·양피지 같은, 당시에 구할 수 있었던 원시적인 재료에다 그 계시들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쿠란이 현재와 같은 형태를 띠게 된 것은 예언자 무하마드가 사망하고 난 뒤, 그의 후계자들과 반려자들의 지도 아래서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것은 처음 세 칼리프 즉 모슬렘 지도자들의 통치 때였습니다.

 

번역가인 무하마드 피크탈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예언자의 죽음 이전에 쿠란의 모든 수라가 기록으로 보존되었으며, 많은 모슬렘은 쿠란 전체를 외웠다. 그러나 기록된 수라들은 사람들 사이에 흩어졌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 쿠란 전체를 외우고 있던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자, 전체 쿠란을 수집하여 기록으로 보존하게 되었다.”

 

이슬람교의 생활은 세 가지 권위―쿠란, 하디트, 샤리아―에 의해 지배됩니다. (아래 네모 참조.) 모슬렘은 아라비아어로 기록된 쿠란이 가장 순결한 계시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브리엘을 통해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언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수라 43:3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우리는 쿠란을 아라비아어로 계시하였으니 이로 하여 너희가 이해하고 배우도록 함이니라.” 그러므로 어떤 번역본이든 희석되어 순수성을 잃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실제로, 일부 이슬람 학자들은 쿠란을 번역하기를 거절합니다. 그들의 견해는 “번역은 언제나 반역”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모슬렘은 그것을 다른 언어로 옮기려고 시도하는 것을 항상 반대했으며 때로는 금지하기도 했다”고 이슬람 역사 강사인 J. A. 윌리엄스 박사는 기술합니다.

 

이슬람교의 확장

 

무하마드는 새로운 믿음을 창시하면서 큰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메카 사람들, 심지어 같은 부족마저 그를 배척했습니다. 13년 동안 박해와 미움을 받은 후에, 무하마드는 자신의 활동 중심지를 북쪽의 야트리브로 옮겼는데, 그후 그곳은 알-마디나(메디나) 곧 예언자의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기원 622년에 있은 이 이주 곧 히지라(헤지라)는 이슬람교 역사에서 의미 깊은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 연대는 나중에 이슬람력이 시작되는 때로 채택되었습니다.

 

 마침내, 기원 630년(A.H. 8년) 1월에 무하마드는 메카를 항복시킴으로써 지배권을 획득하고 그곳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을 장악한 무하마드는 카바에서 우상들을 없애버렸고, 그곳을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메카 순례의 중심지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기원 632년에 무하마드가 사망하고 나서 불과 몇십 년 만에, 이슬람교는 멀리 아프가니스탄과 심지어 북아프리카의 튀니지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8세기 초엽, 쿠란에 대한 믿음은 스페인으로 침투해 들어가서 프랑스 국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니니언 스마트 교수가 그의 저서 「기나긴 탐구의 배경」(Background to the Long Search)에서 이렇게 기술한 바와 같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 이후 6세기와 7세기에 살았던 아라비아의 한 예언자가 성취한 업적은 깜짝 놀랄 만한 것이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볼 때는 그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문명이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슬렘에게 있어서, 그 일은 물론 신의 일이었고 그 업적은 알라의 업적이었다.”

 

무하마드의 죽음이 가져온 분열

 

예언자 무하마드의 죽음으로 위기가 일어났습니다. 무하마드가 죽을 때 그에게는 남자 후손이 아무도 없었으며 분명하게 정해진 후계자도 없었습니다. 필립 히티가 이렇게 기술하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칼리프의 직위는 이슬람교가 직면해야 했던 가장 오래 된 문제다. 이 문제는 아직도 쟁점이 되고 있다. ··· 모슬렘 역사가 알-샤라스타니[1086-1153년]의 말대로, ‘칼리프의 직위(이마마) 문제보다 더 많은 피흘림을 초래한 이슬람교의 문제는 결코 없었다.’”

 

기원 632년 당시에는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습니까? “아부-바크르가 ··· 그 당시 수도인 알-마디나에 있던 지도자들이 참여한 일종의 선거를 통해 (632년 6월 8일에) 무하마드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습니다.―「아라비아인의 역사」.

 

 예언자의 후계자들은 통치자인 할리파 곧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하마드의 진정한 후계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이슬람교 신자들을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수니파 모슬렘은 예언자의 후손이라는 혈연 관계보다 선출에 의한 임명의 원칙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처음 세 칼리프, 즉 아부 바크르(무하마드의 장인), 우마르(예언자의 고문), 우트만(예언자의 사위)이 무하마드의 합법적 후계자였다고 믿습니다.

 

 시아파 모슬렘은 그 주장을 반박하여, 진정한 지도권은 예언자 무하마드의 혈통을 통해서, 다시 말해서 예언자의 사촌이자 그의 사랑하는 딸 파티마와 결혼한 사위인 최초의 이맘(지도자이자 후계자),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통해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 무하마드의 손자인 하산과 후사인이 태어났습니다.

 

시아파는 또한 “애당초 알라와 그의 예언자는 알리를 유일한 합법적 후계자로 분명히 지명하였는데, 처음 세 칼리프가 그를 속여 정당한 직위를 가로챘다”고 주장합니다. (「아라비아인의 역사」) 물론, 수니파 모슬렘은 그 문제를 달리 봅니다.

 

 알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알리가 넷째 칼리프(기원 656-661년)로 통치하던 중, 그와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사이에 지도자 자리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후 그들은 모슬렘의 피를 더 이상 흘리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분쟁을 중재에 부쳤습니다. 알리가 중재를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입지는 약화되었고, 많은 추종자가 그를 떠났습니다. 그중에는 그의 철천지원수가 된 하와리지파(이탈자)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기원 661년에 알리는 하와리지파 열심당원에 의해 독을 묻힌 군도에 찔려 살해되었습니다. 두 그룹(수니파와 시아파)은 끊임없이 서로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후 수니파 이슬람교는 예언자의 가계에 속하지 않은, 메카의 부유한 족장 우마이야드 가문에서 지도자를 택하였습니다.

 

 시아파의 경우에는 알리의 장남이자 예언자의 손자인 하산이 진정한 후계자였습니다. 그러나 하산은 사임한 후에 살해당하였습니다. 동생 후사인이 새로운 이맘이 되었지만, 그 역시 우마이야드 군대에 의해 기원 680년 10월 10일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후사인의 죽음, 혹은 시아파의 견해로 순교는 시아트 알리 곧 알리당에게 오늘날까지도 깊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알리가 무하마드의 진정한 후계자였으며 “잘못과 죄를 범하지 않도록 신의 보호를 받는” 최초의 “이맘[지도자]”이었다고 믿습니다. 시아파는 알리와 그의 후계자들을 “신으로부터 무죄함의 선물을” 받은 무류한 스승들로 여겼습니다. 시아파 중에서 가장 큰 분파는, 진정한 이맘이 단지 열두 명뿐이었으며 그중 마지막 이맘인 무하마드 알-문타자르는 (기원 878년에) “후손을 남기지 않고 사마라의 대 모스크 동굴에서” 사라졌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숨은(무스타티르) 이맘’ 혹은 ‘고대하는(문타자르) 이맘’이 되었으며 ··· 정해진 때가 되면 마디(신의 인도를 받는 자)로 나타나 진정한 이슬람교를 회복하고 온 세상을 정복하여 만물의 끝이 오기 전에 짧은 천년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합니다.―「아라비아인의 역사」.

 

 해마다, 시아파는 이맘 후사인의 순교를 추도합니다. 그들은 행렬을 벌이는데, 그중 어떤 사람들은 자기 몸에 칼로 상처를 내거나 다른 방법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가합니다. 더 현대에 이르러, 시아파 모슬렘은 이슬람의 대의에 대한 열심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전세계 모슬렘의 2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며, 대다수는 수니파 모슬렘입니다.

 

일부일처인가 아니면 일부다처인가?

 

 일부다처가 모슬렘의 규정입니까? 쿠란에서 일부다처를 허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많은 모슬렘은 아내가 한 명뿐입니다. 큰 희생을 치른 전쟁 후에 과부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쿠란에서는 일부다처를 허락하였습니다.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정하게 대하여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마음에 드는 두 명, 세 명, 또는 네 명의 여자와 결혼함이 나으니라. 그러나 그들에게 공평을 베풀어 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한 여성이거나 너희 오른손이 소유한 것[포로][으로 하라.]” (수라 4:3) 이븐-히샴의 무하마드 전기에서는 무하마드가 15년 연상의 부유한 과부, 하디자와 결혼했다고 알려 줍니다. 하디자가 죽은 후에, 무하마드는 여러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 아홉 명의 아내를 과부로 남겼습니다.

 

32 이슬람교의 또 다른 형태의 결혼으로 무타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정된 기간의 결혼 생활을 위해 구혼하고 이를 승낙하며, 영구적 결혼 계약에서와 같이 명시된 신부값을 치름으로써 맺어지는 특별한 계약”으로 정의됩니다. (「이슬라무나」, 무스타파 알-라피 저)

 

수니파에서는 그것을 쾌락을 위한 결혼이라고 부르며, 시아파에서는 특정 기간에 종식되는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자료는 “[그 결혼에서 생긴] 자녀는 합법적이며 영구적인 결혼에서 생긴 자녀와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고 알려 줍니다. 분명히 이런 형태의 임시 결혼은 무하마드 시대에도 행해졌으며, 무하마드는 그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수니파는 그것이 나중에 금지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시아파의 최대 그룹인 이마미파는 아직도 그것이 유효하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그런 결혼을 하는데, 특히 남자가 오랫동안 아내와 떨어져 있을 때 많이 합니다.

 

이슬람교와 일상 생활

 

 이슬람교에는 다섯 가지 중요한 의무와 다섯 가지 기본 신앙이 있습니다. (참조 296, 303면 네모.) 그 의무 중 하나는 독실한 모슬렘이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것(살라트)입니다. 모슬렘의 안식일(금요일)에는, 모스크의 뾰족탑에서 무에진이 잇달아 외치는 고함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모스크에 모여서 기도를 합니다. 요즈음 많은 모스크에서는 실제 목소리로 외치는 대신에 녹음한 것을 틀어 줍니다.

 

 모스크(아라비아어, 마스지드)는 모슬렘의 숭배 장소인데, 사우디아라비아의 파드 빈 압둘 아지즈 왕은 그것을 “하나님을 향한 외침의 모퉁잇돌”로 묘사합니다. 아지즈 왕은 모스크를 “기도·연구·법률 및 사법 활동·자문·전도·지도·교육·준비 등을 위한 장소”라고 정의하면서, “모스크는 모슬렘 사회의 심장”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숭배 장소는 지금 세계 도처에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모스크 중 하나는 스페인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모스크)로, 여러 세기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였습니다. 지금은 가톨릭 대성당이 그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국과의 충돌 및 그리스도교국 내에서의 마찰

 

 7세기 초엽, 이슬람교는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로, 동쪽으로는 파키스탄·인도·방글라데시 그리고 아래로 인도네시아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당연히, 이슬람교는 호전적인 가톨릭 교회와 충돌하게 되었으며, 가톨릭 교회는 모슬렘으로부터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서 십자군을 조직하였습니다.

 

1492년에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가톨릭의 스페인 재정복을 완수하였습니다. 모슬렘과 유대인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스페인에서 추방당하든지 해야 하였습니다. 모슬렘 통치 당시 스페인에 존재했던 상호 관용은 나중에 가톨릭 종교 재판의 영향력 아래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슬람교는 존속하였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소생하여 크게 부흥하고 있습니다.

내용출처 :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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