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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주시는 하나님/성도의 생활

[스크랩] 오늘날 바람직한 영성의 모습은?

오늘날 바람직한 영성의 모습은?

“영성”이란 말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신학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인데, 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영성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한 마디로 표현해 본다면,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지성일변도인 시대 흐름에 싫증을 낸 서구 사람들이 동양의 영성(힌두교의 요가, 불교의 선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기독교에도 영향을 주어, 그동안 잠자고 있던 기독교 영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결과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현대인은 물질문명의 급속한 발달의 결과로 편리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해가고 있지만, 이에 반비례하여 정신세계의 황폐화와 가치관의 혼돈으로 인해 오는 정신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인들도 자기를 초월하고자 하는 갈망 즉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보다 깊은 정신적 세계를 경험하고자 명상이나 요가에 많이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교인들도 이런 흐름 속에서 역시 기독교적 영성을 추구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이미 풍부한 영성적 유산을 가지고 있었다. 고독, 금욕적인 극기, 영적인 정화, 그리고 자기 통제를 강조한 사막 교부들의 영성과, 내적 고요와 침묵을 강조하는 동방정교회의 영성, 수도원적 경건과 개인의 내면적인 신비체험을 강조하는 중세기 로마 카톨릭의 영성,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회 내에도 경건주의, 청교도, 복음주의 등의 영성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그동안 영성이 인간의 영적인 것에 강조를 두었다면, 오늘날 말해지는 기독교적 영성은 기독교인의 삶 전반에 관계된 전인적인 차원에서의 영성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영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건강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유년기에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던가, 직장을 잃거나 이혼, 사별등 충격적인 위기를 경험한 경우, 사람들은 심리적인 고통을 받게 되고 이러한 고통은 영적인 성장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자기-보호막에 갇혀있는 자기 애적인 사람들은 영적성숙 즉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누림이나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갖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실제로 상담 중에 가장 많이 보는 모습 중의 하나는 “왜 나는 회심의 체험이 있고 신앙생활에 열정이 있고 많은 봉사를 하는데도 여전히 잦은 죄책감과 우울증, 열등감의 문제로 고민해야 하는가”하는 것이다. 이들은 더 깊은 영적 훈련을 위해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고, 집회에 열심히 참석을 해도 여전히 그들 내면에서 들리는 “좀 더 잘해봐. 아직 충분하지 않아”라는 음성 때문에 영적인 좌절을 맛보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많은 경우 이런 감정은 낮은 자존감에서 오게 되는데, 이 낮은 자존감은 인간관계를 굴절시키고, 육체적 ․ 정신적 질병을 초래하고, 그리고 참된 신앙생활을 방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왜곡되게 인식하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영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을 신체적, 심리적, 영적인 전인적 존재로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오늘날 바람직한 영성은 기도를 많이 하면서도, 또 동시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심리적인 건강을 위해 노력하며, 그리고 성경말씀을 읽으면서도 또한 나의 잘못된 생각이나 편견을 깨닫고 바꾸어가는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영적인 차원과 심리-사회적인 요소들을 동시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과 교회들이 바람직한 영성훈련을 위해 나아갈 모습인 것이다.

영성과 영성의 구체적인 모습들
영성과 영성의 구체적인 모습들(Spirituality and Spiritualities)
정의
영성은 천년기 말에 기독교에서 한창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이다. 모든 회의나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신학적인 영역에서 뿐 아니라 문화적, 상업적, 경제적 영역에서도 영성은 거론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영성에 대해 말하고 그들의 개인적인 영적 경험을 나누고 있다. 영성에 대한 많은 수양회와 연구 모임이 열리고 있으며 이 주제에 대한 전문가의 책과 잡지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의 말처럼 콜레스테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건강에 콜레스테롤로 인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주제를 자주 언급하는 것이다. 문제가 없다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영성에 대해 논하게 되고 대단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좋지 않은 증거이며 빨간 불이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주제가 염려가 되며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영성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영성은 성령의 사역을 언급할 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통해 정체감과 의미를 추구하는 방법을 언급한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로 우리는 영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영성은 그 실체가 한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표현과 형태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역사 상 현재만큼 성스러운 것을 추구하고 영적으로 열린 시대가 없었다. 4세기동안 이성주의의 압력에 의해 영성이 억눌림을 당한 서구 문화에서는 매우 주목할만한 특이한 것이다. 인간의 현실의 중요성과 의미를 결정한 것은 이성주의이다. 과학의 논리에 의해 정의될 수 없었던 것은 어떠한 표현이든지 거짓으로 여겨졌다. 현재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계몽주의에 의해 짓밟힘으로 인해 겪었던 억압에 저항하는 인간 정신의 혁명일 뿐이다.

20세기의 후반부는 다양한 반란과 저항이 일어났다는 것이 특징이다. 세계적인 억압에 대항하는 운동, 60년대와 70년대의 히피 운동, 베트남 전쟁과 소비주의, 마약의 남용과 금기와 편견을 깨는 행위, 자유로운 사랑의 기치를 드는 기세 등을 들 수 있겠다. 여성들은 여성을 억압할 뿐 아니라 남성적인 사회의 모델을 강요한 남성중심적인 사회에 대항해서 권리를 주장하며 싸웠다. 정치적 영역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베를린 장벽의 무너짐, 전제정치 구조의 붕괴, 세계화된 경제를 약속하는 신자유주의 등을 경험하게 되었다. 치유에 대한 책의 등장과 정서적 이해력(EQ)의 발견은 최근까지 기술관료에 의해 지배되던 사회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복음주의 세계에서는 60년대에 카리스마적인 부흥을 경험했으며 80년대와 90년대에는 복음송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건강과 부와 현세의 행복을 약속해 주는 신오순절 교회(neo-Pentecostal)나 후기 오순절 교회(post-Pentecostal)가 등장했다.

이 모든 것은 인간 정신의 저항의 증거이다. 저항은 한가지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제주의적인 이성주의의 억압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현대 문화는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이성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때만 진리로 여겨지는 현대 정신을 창조해냈다. 저항은 비개인적인 이성주의를 표면적으로 읽는 것 이상의 심오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일어났다. 파스칼이 인간의 마음에는 이성(理性) 자체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이성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이성주의를 저항한 것이었다. 19세기 후반부에 프로이트(Freud)에 의해 시작된 심리요법 혁명도 역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기독교영성을 위한 현대문화의 도전
저항의 혁명은 르네상스 시대에 닻을 내리고 계몽주의 시대에 의심할 바 없이 대단한 공헌을 하였으며 기독교에 신학적인 진보를 가져왔다. 그것은 교회를 중세말의 무지와 미신의 압박에서 자유롭게 하였다. 조직 신학의 발달은 믿음의 본질을 발견하게 하였으며 영적 경험을 바로 이해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표현된 믿음의 요구는 영혼의 갈망을 억눌렀으며 조직신학에게 "신학의 여왕"이라는 영예로운 이름만을 남겨주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의 도그마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식은 이성에 대해 배타적인 속성이 되었다. 기독교 시대의 첫세기동안 지식과 관계는 사막의 교부에게나 교회의 교부에게 공히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었던 반면, 현대에 와서 그것은 두개의 것으로 분리되었다.

교부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했다. 신학과 기도는 구분된 것이 아니었다. 현대 이전 시대에 우리는 지식과 관계 사이의 구분이 강조된 것을 볼 수 없다. 6세기의 그레고리 대제는 "사랑은 아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2-3세기에 이레니우스와 오리겐의 작품이나, 4세기의 어거스틴과 갑바도기아 형제들이나, 6세기의 베네딕트와 그레고리나, 12세기의 새로운 신학자 시므온이나 13세기의 부에나벤투라(Buenaventura)나 14세기의 월터 힐튼(Walter Hilton)을 볼 때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지식과 사랑, 신학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같은 것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신학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다. 어거스틴의 "참회록"과 누르시아의 베네딕트의 "수도원 계율"과 그레고리 대제의 "목회적 돌봄"과 시므온의 "기도"와 칸타레스(Cantares)의 주석과 베르나르도의 저서 등, 이 모든 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신앙의 표현이며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며 기도의 삶이다. 그들에게는 신학과 영성 사이의 단절이 없었다. 11세기의 파코미오(Pacomio)는 "기도하는 것은 신학을 정립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학은 기도로부터 생성되었다. 기도와 신학은 불가분의 것이었다.

신학과 영성의 분리는 중세말 스콜라 철학에서부터 시작된다. 한편에서는 그레고리가 사랑은 지식이라고 선포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랑에서 나온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과학적이고 도그마적인 것을 구분했다. 16세기와 17세기 부터 신학과 영적인 생활의 구분이 더 심화되고 세분화되었다. 계몽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신학을 창조하였는데 그것은 전혀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20세기 말에 다다랐다. 두번의 세계 대전과 다른 정치적, 경제적, 종족 갈등을 거쳐 실패감과 공허감을 느끼며 이성적인 이론과 정치적 모델에 대한 신뢰를 잃은 상태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여러가지 영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것이 비교( 敎)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이성주의적인 이상가들이 인간에게 추구하다가 실패한 것을 찾고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기독교가 큰 도전을 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본적인 것을 보전하고 기초를 놓고 건설하는 싱학적 도전이 주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의 필요와 갈망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의 중요성과 기도의 중요성과 위치를 중시하는 영적인 도전이 있다. 제임스 휴스톤(James Houston)에 의하면, 보다 나은 영적인 신학을 추구하고, 보다 나은 신학적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도전이다.

보다 나은 영적 신학
우리는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진정한 관계를 일깨우는 신학을 필요로 한다. 즉 기도의 방법을 보여주는 신학, 즉, 기도가 좀 더 하나님과의 관계 면에서 개인적이며 감성을 드리게 하며, 학문적인 것에 그치지 않게 하는 신학이 필요한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하나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갈망으로 신학교에 가지만 4-5년 공부 후에는 기도를 더 적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위축되고 제한된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지 않는 신학은 그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 하시는 영원한 만찬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이 관계는 신학을 위한 첫번이며 마지막 이유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이 가장 큰 계명이냐고 물으셨을 때 예수님은 관계와 감정의 차원을 중시하셨다. "이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의 목표였다. 선지자와 계명의 존재이유(raison d'etre)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가장 간단하고 동시에 가장 심오한 답을 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선포할 때 그는 성경의 하나님의 인성을 정의하는 것이다.

좀 더 나은 영적인 신학은 단순하게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경험하는 회심에 그치지 않고, 정서적 문제로부터의 회심에 관심을 갖는다. 14세기에 영국에 살며 감성의 회심이라는 주제에 대해 연구한 월터 힐튼(Walter Hilton)의 사상에 대해 쓴 쥴리아 가타(Julia Gatta)는 이렇게 말한다. "통합적인 전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이성은 우리의 감정과 마찬가지로 회심을 경험하고 더 깊은 순결의 과정을 거쳐 결국은 성화를 향해 변화될 필요가 있다. 이성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정서적 생활의 구속(救贖)과 비해서 비교적 간단한 문제이다. 감정, 특히 종교적 감정은 하나의 복합적인 현상이다. 성령의 열매는 "좋게 느끼는 것"과 동등시될 수 없다. 인간본성의 모든 다른 면들처럼 감성적인 생활은 해석되고 훈련될 필요가 있으며 결국은 구속될 필요가 있다. 이성주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면을 중시한다. 우리는 지금 믿음이란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감성적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다.

더 나은 영적 신학은 "박사"와 "신학자"에 가치를 두기보다 "성인"과 "현자"의 모습을 찾아 그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 성인이나 현자는 아버지나 멘토로 불릴 수 있는데 과학을 통달함과 아울러 영혼의 비밀을 관통하는 지혜를 지닌 사람이다. 어거스틴은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복합된 지식"에 대해 말한다.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하나님, 당신을 알게 하시고, 또 나 자신을 알게 하시옵소서. 그것이 제가 원하는 모든 것입니다." 어거스틴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성경을 해설하고 아버지의 성품을 나타낸 교사일 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에 대해 가르치고 마음의 속 깊은 비밀까지 드러내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성인이셨으며 지혜자였으며 교사이며 멘토였다. 우리는 "누가 진정한 신학자인가?" 라고 질문할 수 있다. 뛰어난 논문과 좋은 책을 쓰고 명문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인가, 아니면 인간의 상한 마음과 혼란된 삶을 이해해주는 사람인가?

영성있는 신학자는 크고 화려한 일만이 아니라 삶 가운데 일어나는 단순하고 규칙적인 사건에 더 많은 가치를 두어야 한다. 유진 피터슨은 우리는 저널리스트의 렌즈로 삶을 보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위대한 것을 찾고, 특별한 것에 가치를 두고, 매혹적인 일들을 드높인다. 그러나 복음의 페이지와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전통은 하나님의 은혜가 일상적인 단순한 일에서 나타남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에 가치를 두고 그것이 무엇인지 감지하도록 돕는 신학자가 필요하다. 시편기자는 "주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않았사오며...."라고 말할 때 작고 단순한 것들의 가치를 감지한 것이었다.

더 나은 영적 신학자는 더 영적이며 덜 전문적인 언어를 필요로 한다. 나는 영적으로 미화된 언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의 욕구를 일깨우고 하나님과의 친근감을 일깨우는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시적이고 서술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항상 복음의 진리를 전달하는 개인적인 방법을 찾고 있다. 그것은 의미를 감소시키거나 단순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지적인 게으름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덜 전문적이며 더 친근감 있는 언어가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보다 나은 신학적 영성
한편으로 우리가 총체적인 인간에 관심을 가지는 보다 나은 영적 신학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한편, 보다 나은 신학적 영성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한계를 그으며, 윤곽을 정하고, 기초를 정해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인간의 영(Spirit)이 인간의 영혼(Soul)을 관통하고 어루만지는 친밀함과 거룩함의 손길을 추구하고저 하는 부르짖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적 서술을 초월하는 존재 의미에 대한 추구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복지에만 관심이 있는 비교( 敎)적이며 나르시스적인 영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이것은 신학보다는 현대 심리학과 인류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이나 이미지에 따라 창조된 인간 내의 공간을 채울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더 나은 신학적 영성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1. 삼위일체의 영성
삼위일체의 원리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기초적 교리이며 신학적이며 성경적인 영성의 기초가 된다. 삼위일체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히 누릴 교제에 우리도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졌을 때 우리는 이 삼위일체의 교제를 위해 창조되었다. 예수님은 제사장적 기도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17:21)"라고 하신다. 아들과 아버지가 누리는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화해된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영성의 본성을 이해하는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고대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은 "하나님의 존재는 개인적인 관계와 개인적인 사랑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은 생명이고 생명이 있다는 것은 교제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함께 연합함이 없는 아들을 아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또한 아들의 계시 없이 아버지를 아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 안에서의 교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고대 세계가 처음에 존재를 창조해내는 것은 교제이며 교제 없이는 하나님을 포함해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이해한 방법이다."(John Zizioulas)

2.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향해서 자라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감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기분좋게 느끼는 사회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적응이 아니라 성숙과 변형의 과정이다. 바울에게 그것은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며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는 것을 의미했다. 바울 자신은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숨기워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계신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며 완전한 인간성을 지니는 것이다.

3. 공동체 영성
하나님의 성품이 관계의 하나로 보여지면 거듭난 한 개인의 성품도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 회심은 개인의 변화로서 한 인격을 향해 변하는 것이다. "개인"은 그 자신 안에 갇혀있으며 자기 영광 안에 가득 차 있으며 나르시스적이며 자율과 독립으로서 자유를 단순하게 보고 있다. "인격"은 교제하는 존재이며 애정과 우정, 이타주의의 관계로 채워져 있으며 복종과 순종과 자신을 주는 사랑의 차원에서 자유를 보고 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축으로 한 영성
우리가 본 바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성숙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우리가 변화하는 과정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후에는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삶은 지배적인 사회적 가치에 적응하는 과정이 아니라 위기와 변화를 포함하는 발걸음이며 그 변화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 사이에서 오는 지속적인 긴장이 있게 될 것이다.

긴장은 두가지 운동에서 온다. 첫번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지배적인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인 질서의 만남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위로를 주며 수정을 가해준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 도전이 되며 우리를 자극하고 우리에게 논박해온다. 이러한 대결은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가 사는 세계 사이에서의 지속적인 대화를 요구한다. 바울은 로마인에게 이 세상 풍속을 따르지 말고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쓰고 있다. 또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범주와 가치와 원리들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두번째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과 내적인 세계의 충돌이다. 우리 모두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이해를 혼동시키는 기억과 형상들 또한 기억하고 있다. 우리 안에는 포기하는 부정적인 감정도 있으며 두려움과 고독감도 있으므로 우리 내부에 거부당한다는 느낌과 자신이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갖게되며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킨다. 그럴 때 우리 안에 분노와 시기가 일어나면서 하나님께 우리가 사용되도록 하기 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용하게 된다. 또한 우리 안에 안정과 신뢰가 깃든 복종보다는 혼란되고 조작당하는 듯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면의 세계를 비추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세계가 변화되도록 해야 한다. 또 말씀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빚어야 하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를 변화시키고 십자가에 못박는 연습을 하게 하는 도구로서 성경은 우리가 경배 중에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요구한다. 위로도 받고,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변화되기 원하는 사람은 그들의 기본적인 자세로서 침묵과 경배를 습득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와 이 세계 간의 대화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외적인 세계이든지 내적인 세계이든지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시킨다.

5. 선교사의 영성
교회는 교회에만 속한 선교를 하지 않고 "Missio Dei"에 참여한다.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는 자신 스스로의 말씀과 판단과 사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양식과 음료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기도와 선교는 함께 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길이 하나님의 길과 같으며, 우리의 생각이 변화되며, 우리의 정의와 의와 진리에 대한 개념들이 하나님의 개념과 같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개념과 우리의 것을 종종 혼동한다. 또한 우리는 사명이 있음을 믿고 있으며 공의와 신성한 권리의 본질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예수님이 사막에서 받은 유혹은 예수님의 부르심과 사명이 무엇인지 규정한 경험이었다. 사단에 의해 제안된 방법들을(헨리 뉴웬에 의하면 즉각적이고 마술적이며 인기를 끌 수 있고 웅장하고 강력하고 번영을 이룰 것 처럼 보임) 거절하는 것은 선교의 사명을 새롭게 제시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온 계획 속에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성육신하셨다. 그는 그 길을 선택하기 위해 초월적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택권을 거부하셨다.

예수님의 사명과 영성을 분리시키기는 매우 힘들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 중 매우 중요한 순간에 빌립과 안드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내 마음이 근심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바로 이 때를 위함이 아닌가 하나이다." 예수님의 기도 제목은 소명에 의해 결정된 것이지 그의 개인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영혼의 고뇌를 경험하는 사람은 그 고뇌가 치유되고 구속되도록 기도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왜 왔는지 아시며 어떤 식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아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으며 아버지가 주신 사명과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기도의 목적은 아버지였으며 자신이 아니었다. 기도의 목표는 아버지가 주신 사명이며 예수님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결론
세기 말이 되자 이 세계는 더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비에 대해 열려지고, 심리학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개인적이며, 감성적이 되었다. 이전에 인간의 문제는 이성의 재판소에서 판결이 내려졌었다. 진리는 논리적인 논증을 통해 성립되어야 했다. 이성적으로 제시된 것만이 믿어졌다. 그러나 오늘날은 인간의 문제들이 감성의 재판소에서 다루어진다. 진리는 논리적인 이성에 의해서보다 느낌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들을 감성적으로 보상해주는 뭔가를 믿으려 하고 있다.(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

우리가 개혁주의자들로부터 이어받은 찬양은 성경말씀과 해석학적이고 석의적으로 마련된 강해가 중심이 된 것이다. 현대의 찬양은 말씀과 강해를 구석으로 밀어버리고 감정에 호소하는 멜로디와 조화되지 않는 전위적인 가락을 사용하고 있다. 결국은 음악을 통해 내적치유와 번영과 축귀의 현상을 볼 수 있다.

베스트 셀러로 떠오르는 책들은 영적 전쟁과 내적 치유, 관계의 갈등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 것이다. 새세대들에게 있어서 신학공부와 훈계와 징계에 대한 내용과 성경을 자세히 공부하는 일 등은 호소력이 급격히 사라졌으며 그 기반을 잃어가고 있다.

과거에 대한 향수는 사실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질문에 대해 답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 답은 뒤돌아보는 데 있지 않고 과거를 구원하는데 있다. 우리는 새로운 질문과 새로운 목회적 요구와 신신학의 도전을 받는다. 우리는 인간이 오랫동안 이성적인 존재로 전락된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또 조직 신학과 영성있는 신학의 결별은 신학을 더 인지적이며 덜 감성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신학의 목표는 우리에게 또 다른 Ph.D의 기회를 제공하고 우리 언어를 더 전문적으로 만들고 혼란시키는 것이 아님을 인정할 뿐 아니라, 더우기 우리의 자아( ego)를 확장시키고 우리를 나르시즘에 빠지게 하기 위함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신학의 목표는 구원에 대해 지혜롭게 만드는 것이며 삶에 감성적, 심리학적, 도덕적, 지적인 의미를 주는 것이다. 진정한 신학자는 긴 책을 쓰고, 가장 복잡한 논문을 쓰고, 가장 박학한 연설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의 방법을 발견하는 사람이며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정신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다른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알도록 도와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해 지혜로운 사람이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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