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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에 관하여/세계 의 역사 속으로

[스크랩] 알렉산더 대왕의 가계도

알렉산더 대왕의 가계도


아민타스 3세 ------ 에우리니케

  (370년 사망)


알렉산더 2세--  페르디카스 3세 ---    필리포스 2세

(370- 368재위)     (375 -360 재위)     ( 382-336)

                                          결혼


                        필리나------ 올림피아스(317년 사망)


                                                    

             아리디이오스 ----     알렉산더 3세 대왕   ----    클레오파트라

        (필리포스3세317년 사망)         (356-323)                    (355 -330)

                                          결혼

                        

                 바르시나                  록사네             스타피라 파리사티스

                 (370년 사망)           (310년 사망)              (323년 사망)

                   헤라클레스            알렉산더4세

                     (309)                 (310)


         

       2. 연보


BC. 336년. 필리포스 2세 암살됨. 필리포스 2세와 왕비 올림피아스의 아들

           알렉산더가 20세로 즉위

    335년. 봄 -여름. 알렉산더, 마케도니아 왕국의 북부와 북서부 국경으로 원정을 떠남.

    335년. 가을. 알렉산더, 그리스 도시들의 반란진압. 테베를 파괴함.

    334년.   봄. 소아시아로 출항. 그라니쿠스 강에서 페르시아군에 첫 번째 승리를 거둠

    334년. 여름. 소아시아 연안의 도시들을 굴복시킴. 함대 무장해제

    334년. 가을. 소아시아 연안지역을 정복(리키아, 프리지아, 핌필리아) 프리지아에 있는

                 고르디온에서 휴식.

    333년. 봄. 고르디온을 떠나 실리시아로 향함. 멤논이 이끄는 페르시아 함대의 반격.

               할리카르나소스 요새가 마케도니아인의 수중에 들어옴.

    333년. 11. 1일. 이수스에서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3세 사이에 최초의 정규전이 벌어짐

                   다리우스3세는 군대를 재정비하기 위해 바빌론으로 감.

    333년. 겨울. 알렉산더, 티루스를 제외한 페니키아의 전 도시를 굴복시킴.

    332년. 1-8월. 티루스 점령.

    332년. 가을- 331년 봄. 이집트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의 건설.

                            페르시아의 해상 공격을 봉쇄.

    331년.  8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건넘.

    331년. 10월. 아르벨라에서 다리우스 3세와 두 번째 정규전을 벌여 승리를 거둠.

BC 331년. 11-12월. 바빌론과 수사에 입성

    330년. 1-5월. 페르시아에 체류, 5월에 페르세폴리스의 궁을 불살라 버림.

                  다리우스3세 메디아에서 새로운 군대 편성 준비.

    330년. 여름. 다리우스 3세를 추격, 메디아와 파르티아 점령.

    330년. 7월. 다리우스 3세 페르시아의 음모자들에 의해 암살됨.

                알렉산더, 다리우스 3세를 페르세폴리스에 묻고, 음모자 베소스를 추격.

                페르시아의 예법을 채택.

    330년. 가을. 알렉산더, 아리아 지사 사티바르자네스의 반란을 진압키 위해 되돌아 옴.                  드랑기아나에서 마케도니아의 귀족이 음모죄로 사형에 처해짐.

                그의 부친인 파르메니온도 암살됨.

    329년. 봄. 힌두쿠시 산맥을 넘음. 박트리아에 도착.

                베소스는 박트리아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의 칭호를 얻음.

    329년. 여름. 옥수스(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박트리아를 관통함. 베소스를 체포 처형

    328년. 여름. 소그디아나에서 군사원정을 계속함. 프로스키네즈 사태.

                 클레이토스와 칼리스테네스가 차례로 처형됨.

    327년.   봄.  소그디아나에 남아 있던 반(反) 알렉산더 섬들을 점령. 인도로 떠남.

    327년. 가을. 군대의 두 부대가 인더스 강으로 향함.

    326년.   봄. 인더스 강 건넘.

    326년. 여름. 인도의 포로스왕에게 승리를 거둠.

    326년. 가을. 히파시스강에서 병사들이 동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반대. 귀환명령을 내림

    326년. 겨울. 인더스 강을 따라 내려옴. 말리족 정복

    325년. 1-7월. 파탈라(히데라바드?)에 있는 인더스 강의 삼각주에 체류. 항구와 조선소

                  건설. 크라테레스 일부 군대를 이끌고 볼란 칸다하르 협곡을 지나 출발.

    325년. 8월. 알렉산더 게드로시아로 출발

    325년. 9월. 페르시아 만의 페르시아쪽 해안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임무를 띤

                네아르코스 함대가 출범 준비.

    325년. 12월. 알렉산더 카르마니아에서 네아르코스와 합류. 네아르코스는 유프라테스                     강 하구를 향해 재출항하고 알렉산더는 계속 페르시아로 향함.

    324년. 1월. 파사르가다이에서 키루스 대왕의 무덤을 복원.

    324년. 2월. 수사에서 결혼식을 올림

    324년.   봄. 오피스에서 반란이 일어남.

    324년. 여름. 알렉산더 엑바타나에 체류함. 헤페스티온 사망. 루리스탄의 코센족을 치                  러 원정을 떠남.

    323년. 봄. 바빌론에서 아라비아 원정을 위해 함대를 편성하도록 명령.

    323년. 6월. 13일. 알렉산더 사망.

       

       3. 알렉산더는 누구인가?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는 그 때까지 그리스 본토의 가장자리에 놓인 낙후한 변경 왕국에 불과하던 마케도니아를 믿음직한 군대를 갖추어 국경을 정비하고, 코린토 동맹을 통해 그리스를 장악한 뒤, 페르시아 침공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강력한 군사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Philippos)의 아들로 태어났다

펠라에 있는 궁전에서 가장 명성 있는 스승들의 정성어린 가르침을 받은 그는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검술을 포함한 운동과 사냥 그리고 머리를 쓰는 데까지 탁월함을 보였다. 알렉산더는 총명했을 뿐만 아니라 외모도 남달리 출중했으며, 스승들은 알렉산더의 뛰어난 면모를 보면서 그의 찬란한 업적을 예견할 수 있었다.


아버지 필리포스가 사망하자 알렉산더는 왕위를 계승했다(B.C 336). 그 당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맹주가 되었으나 그 당시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국제적으로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것은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알렉산더가 왕위에 올랐을 때, 페르시아 전쟁은 반쯤 시작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트라케와 일리리아에서 북쪽 변경을 든든히 하고 그리스에서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처음 2년(336-334)을 보내고 334년 봄, 5 만의 군사를 이끌고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넜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균형 잡힌 병력 구성 덕분에 특히 효율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3세는 우월감에 빠져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리우스 3세 휘하의 장군들은 이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그라니쿠스강 우안에 이노니아와 리디아의 지사 스피트리다테스가 페르시아 기병대를 소집해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알렉산더는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할 정도로 격전의 상황에서 알렉산더는 저녁 무렵부터 승기를 잡아 페르시아인을 굴복시키기 시작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차례로 해방했다. 에페수스, 프리에나, 밀레투스, 마그네시아에서 민주정을 회복시켰다. 이 싸움에서 겁을 먹은 다리우스 3세는 직접 나서서 알렉산더를 대항했지만 결국 이수스 전투에서 패해 도망하기 급급했다. 그의 가족과 보물들은 당연히 정복자의 손에 넘어갔고 시돈과 티루스가 함락되면서 이집트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집트 나일강 유역의 삼각지에 새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었고, 그 이후 알렉산더가 ‘아몬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것은 알렉산더의 정복 길을 더더욱 순조롭게 해주었는데, 메소포타미아의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는 또 다시 패하게 되고 페르시아인은 저항을 포기하고서 바빌론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흘러갔다.


알렉산더는 그동안 페르시아, 파르티아, 마르기아나, 아라코시아, 박트리아, 소그디아나를 굴복시켰다. 이윽고 그는 인도의 문턱에 다다랐다. 모든 곳에서 알렉산더의 무력에 항복하기 시작했지만, 오직 인도왕 포로스만이 항복을 거부한 채 대규모 군대와 코끼리 200여 마리, 전차 300대를 동원해 대항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끝내 승리는 알렉산더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알렉산더는 포로스에게 ‘어떤 대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포로스는 대답했다. ‘왕이요’ 그래서 그는 왕좌를 지킬 수 있었다. 동쪽으로 더 진군하려는 알렉산더의 야망을 더 이상 군대는 동조하려 하지 않았고 이제 알렉산더의 정복은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


      3-1.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사건의 시작은 B.C 480년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군대와 함대를 이끌고 그리스를 침입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연합군은 살라미스에서 처음으로 페르시아군 을 무찔러 승리했고 크세르크세스는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BC 386년경부터 다시 페르시아 왕은 정치, 군사적 우월을 앞세워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 결과 가장 세력이 강한 에세수스, 밀레투스, 프리에나 그리고 흑해와 알렉산드레트만 사이의 다른 도시들까지도 또 다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B.C 359년 필리포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고 336년 여름, 거국적으로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필리포스가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필리포스와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산더 누이인 클레오파트라의 결혼 축하연은 성대히 치러졌고, 연극을 보러 자주 찾는 고도 아이가이를 방문하던 중 필리포스는 습격을 받아 절명하고 만 것이다.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젊은 알렉산더였지만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계승한 것은 일찍이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그는 왕위계승자로서 모든 것을 이어받았는데, 특히 선왕 필리포스가 추진하던 것을 계속 시행해야 할 몫이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은 BC 6세기 중엽 키루스 대왕의 지휘 하에 중동의 패자로 등극하여 550년  경부터 525년경에는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그리고 이집트까지 손을 뻗은 후 다리우스 대왕(재위 BC 525 -486년) 때에 이르러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다리우스 대왕은 중요 도시를 연결하는 왕도를 정비하여 물자의 교역로와 군수품의 수송로를 확보했으며 먼 지역과 신속한 정보교환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배경은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지닌 다양한 문화와 전통적인 관습을 말살하지 않고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백성들은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페르시아 왕은 자신을 통일의 상징으로 삼아 통일 제국을 유지해 갈 수 있도록  정치적, 문화적 일체감 그리고 왕과 아케메네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요구했다.


B. C 334년 초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전부 이끌고 마케도니아를 출발한다. 마케도니아 군은 아비도스 부근의 소아시아 연안에 상륙, 알렉산더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에게 자신을 수호해 달라고 제식을 올렸다.




   3-2. 마케도니아 상황

- 기원전 360년까지만 해도 마케도니아 중심부, 악시오스강과 스트리몬강 사이의 지역, 그    리고 독특한 왕권을 지닌 마케도니아 고지대로 구분되어 약간 비정형의 왕국이었다.

- 필리포스가 등장할 때까지 통일국가와 무정부 상태 사이를 번복하고 있었음.


   3-3. 마케도니아의 새로운 왕

- 아민타스의 3세의 셋째 아들 필리포스가 마케도니아를 재건하기 시작

- 아민타스 3세와 383년에 출생한 냉혹한 여인 에우리디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3년 동

  안 테베에 볼모로 잡혀감.(기원전 367 - 365)

- 필로포스는 테베에 볼모로 있는 동안 테베의 군사조직 및 훈련을 관찰. 테베에서 배운 지

  식을 활용 군대를 재편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춤.(왕의 친위 부대 ‘히파스피테스’ 창설)

- 육탄전을 위한 검과 긴 창으로 군대를 무장시킴.

 

  3-4. 필리포스 초기 (기원전 360 - 354)

- 형 페르디카스의 사망 이후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에서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내부적으로는 정쟁1)을 삼가고 적국과의 갈등의 요소를 유예시킴.2)

- 356년 메티다이아, 354년 메토네를 점령

- 필리포스는 테살리아를 원정함으로 새로운 세력을 확장시킴.

- 349년 칼키디키를 침략. 아테네가 데모스테네스의 필리포스 탄핵에 대한 정치 연설에 자

  극 받아 원정부대를 파견했지만 수포로 돌아감.

 

   3-5. 그리스 패권을 거머쥔 마케도니아 (기원전 346 - 336년)

- 아시아를 향한 필리포스의 야망은 분명해서 오래전부터 소아시아에 교두보를 건설한 계

  획을 세움.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에서 완전한 패권을 누리는 것이 우선이었음.

- 아테네와의 외교정책에서 성공한 그는 344년 마케도니아 동맹에서 메세니아, 아르고스,     메갈리폴리스를 분열시키려는 데모스스테네스의 시도를 무마시키는 일련의 군사적 행동을

  취함,

- 338 -337년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코린토스에 집합시키고, 동맹국들의 영토보존과 안

  전을 보장하는 공동의 평화유지에 찬성토록 함. 그리하여 코린토스 동맹을 페르시아에 맞

  서는 범 그리스전쟁의 도구로 이용.

- 336년 마케도니아의 파르메니오를 통해 소아시아에 진입 교두보를 확보.

- 필리포스는 그리스 운명의 지배자이자, 페르시아에 대한 고대 그리스의 반격의 상징이 됨

- 336년 필리포스는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함으로 이제 그의 몫은 알렉산더에게로 넘어

  가게 됨.


  3-6 알렉산더의 청년기 (356 - 336년)

- 356년 어머니는 에피루스의 공주이며 몰로스족의 딸인 올림피아스에게서 초가을 쯤 마     케도니아의 수도인 펠라 혹은 아이가이에서 출생.

-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인 네오프톨레모스 후손으로서 필리포스와 357년    사모트라키섬에서 결혼함

- 알렉산더는 유모 라니케에게 맡겨졌는데 라니케의 동생 흑인 클레이토스는 알렉산더 밑    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됨.
- 중요한 것은 외할아버지 레오니다스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음
3).

- 리시마코스를 통해 교육을 받았는데, 그로인해 일리아드를 사랑하고 아킬레우스를 숭배     하게 됨.

- 343년부터 340년 까지 알렉산더는 니코마코스의 아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수학함4).

- 그리스 문화라면 우선 그리스 문학에 대한 지식, 즉 그리스 비극과 서정시와 호메로스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문화는 철학에 대한 알렉산더의 호기심을 일깨워 줬다

  3-7. 알렉산더와 아버지

- 필리포스와 올림피아스 사이에는 애정이 없어보였지만, 부자지간은 오랫동안 친말한 관     계를 유지한 듯 보인다.

- 340년 페린토스와 비잔탄으로 원정을 떠나면서 알렉산더를 펠라로 불러들여 섭정을 맡     겼는데 알렉산더의 나이 16살 되던 때이다.

- 필리포스는 알렉산더 곁에 위대한 조언자를 붙여 주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안티파      트로스를 둘 수 있다.

- 339년 현재의 불가리아 땅에 있는 마이다족을 평정하기 위한 기습공격의 지휘권을 알렉    산더에게 일임. 알렉산더의 최초의 군사원정이 대승으로 끝이남.

- 337년에 이르러 부자지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아탈로스의 장군의 딸 클레오    파트라와의 결혼을 준비하면서, 만약에 클레오파트라에게서 상속자가 태어날 것을 염려     하게 됨.

- 알렉산더는 아버지 결혼식 현장에서 아탈로스 장군에게 칼을 던지고 사건으로 말미암아    어머니와 함께 에피루스로 감. 그러나 오래지 않아 필리포스가 알렉산더를 불러들임

- 알렉산더의 여동생 클레오파트라와 에피루스의 왕이자 올림피아스의 동생인 네오프톨레    마이오의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아내와도 화해한 필리포스는 결혼축하연 자리에서 근위병    인 파우사니아스로터 피살됨.


  3-8.짓밟힌 테베, 알렉산더에게 복종하게 된 그리스

- 필리포스의 뒤를 이은 알렉산더에 대해 아테네 및 모든 동맹국들은 헬라스 동맹의  헤     게몬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테르모필레에 암픽티온회를 소집 헤게몬을 인정받음.

- 곧이어 코린토스에서 제 2차 회의를 소집. 스파르타를 제외한 모든 도시국가의 모든       권력을 지닌 그리스의 총사령관이 될 것과 페르시아가 그리스인들에게 행한 범죄를 응      징 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모든 전쟁에 모든 국가가 동참할 것을 결의함.

- 알렉산더가 원정으로 멀리 떨어져 있게 되자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자, 페르시아의 선동     에 따라 테베를 중심으로 일부 무력 봉기가 있게 된다.

- 코린토스 동맹의 법을 적용 알렉산더의 군대와 동맹국의 군사들이 테베를 포위, 처음에     는 타협점을 찾고자 했으나 테베의 거부로 이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게 됨.

- 알렉산더에게 대항하는 국가는 아테네뿐이었다. 테베의 선례를 따라 철저히 응징하지       않은 것은 이 도시에 대한 존경심도 있었을 뿐 아니라, 아시아로 떠나는 마당에 원한을     남기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기 때문이다.


  3-9. 아시아에서 대모험을 시작하다.

- 필리포스가 파르메니오와 아탈로스의 지휘 아래 징집 병사를 아시아로 보내 여러 번 승    리를 거두었으나 로도스 섬 출신의 그리스인 멤논이 이끄는 페르시아의 대반격으로 인      해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들의 근거지를 거반 잃어버렸다.

- 334년 알렉산더는 보병 3만 2천명과 기마병 5천 5백 명 그리고 주포 아테네가 공급한     해군들을 인솔해 마케도니아의 디온에서 신들을 위한 성대한 제사와 제우스와 뮤즈들을     위한 연극에 참여하게 한 뒤 트로이로 떠났다.



      4.정복 전쟁의 시작.


   # 알렉산더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통솔하고 움직이기 위해 실전경험이 풍부한 많은 마케       도니아 출신의 귀족들인 장군들을 곁에 두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농민 계급에서 차출된 3-4만 3000명에 이르는 보병은 각자가 5.5미터의 긴 창을 지닌 밀집 부대로 구성, 이 긴 창으로 무장한 마케도니아 군은 천하무적이었다. 이외에도 코린토 동맹에서 징집한 보병 7000 명과 기마병 600명 등으로 중무장했다.

 

   # 원정대에는 정복의 역사를 기록하는 연대기 작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렉산더 사망 후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우게 되는 그는 회상록 작가이기도 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칼리스테네스, 아낙시메네스, 오네시크리토스, 폴리크레테스, 아리스토불로스, 마르시아스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 다리우스 3세는 멤논에게 군 지휘권을 위임.

  멤논은 예전에 그리스를 수차례 꺽은 경험이 있다는 자만 감으로 불행하게도 자국의 군사력을 과대평가 만반의 준비를 하는데 소홀했다.

B.C 334년  5월 페르시아 장군들은 그라니쿠스 강변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기마부대를 집결시키므로 기동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 B.C 334년 봄과 여름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을 장악하기 시작.

밀레투스가 함락된 후 멤논과 페르시아인은 소아시아 남서쪽에 있는 할리카리나소스로 후퇴, 고르디온에서 겨울을 나기위해 리키아와 팜필리아를 점령. 거기서 알렉산더는 고르디온의 선전 기둥에 메여 있는 매듭을 단칼에 자르면서 “이제 매듭이 풀렸도다”하고 외쳤다.


  

# B.C 333년 마케도니아 군이 진격해 오자 다리우스 3세는 왕실 소속의 군대를 직접                    이끌고 나섰다.

그 해 11월 실리시아의 이수스 부근에서 두 왕실의 군대의 격전이 벌어짐. 이 전쟁에서 다리우스가 패하고 도망간 사실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사실 다리우스는 도망치면서 어머니 시시감비스, 왕비 스타테리아와 두 공주, 어린 왕자까지 버리고 갔다.

  

  # 지금부터는 내게 전할 말이 있으면 아시아의 왕에게 하듯이 하라. 대등한 어투로 편       지를 쓰지 말라고 선언 후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페니키아로 진군.

B.C 332년 가을. 알렉산더는 이집트의 펠루시움에 입성, 페르시아의 지사 마자케스의 저항을 받지 않고 멤피스를 무혈로 장악. 3년 간 알렉산더는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면서 수천 킬로를 달렸고 수많은 도시와 나라를 굴복시켰으나, 다리우스 3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지는 못했다.  다리우스 3세는 이수스에서 패한 이후로 바빌론에서 군대를 새롭게 편성.


   # B.C 331년 봄, 마케도니아인은 메소포타미아로 또다시 길을 떠난다.

한 편 다리우스 3세는 왕도를 지나는 길에 가우가멜라에 머물렀다. 가우가멜라 전투는 전쟁을 판가름하는 것이었으며, 알렉산더는 또다시 승리하게 된다.


알렉산더는 331년 7월초 탐사쿠스 지방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군하고 있었다. 그 해 10월 1일 낫 달린 전차들은 다리우스 3세가 기대했던 만큼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다리우스 3세는 약 4000천 달란트( 75-100톤)이나 되는 보물과 활, 화살, 전차를 버리고 또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 알렉산더는 다리우스를 추격하지 않고 곧바로 바빌론으로 향했다.

이 도시는 키루스 대왕 이후 바빌로니아 지사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페르시아의 겨울 왕궁이 있었다. 다리우스 3세가 임명한 지사 마자이오스는 아무 저항을 하지 않은 채, 알렉산더를 마중 나왔고 마자이오스는 계속 바빌로니아의 지사로 남게 되었다.


  # 12월 말 수사에서도 바빌론과 똑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지사인 아블리테스와 그의 아들 옥사트레스가 알렉산더를 마중 나와 수사에도 역시 순조롭게 입성. 코아스페스 기슭에 자리 잡은 수사는 그리스인의 눈에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다.


  # 마케도니아의 세력이 막강해 질수록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저항의 물결도 높아졌다.

마케도니아 장군 스파르타가 반란을 지휘했으나 B.C 331년 10월에 안티파트로스가 이 모든 혼란을 종식시킴.


  # B.C 330년 1월 페르세폴리스에 알렉산더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페르세폴리            스에 입성하게 됨.

아리우스 1세가 건설하기 시작하여 그 후계자들이 완성한 페르세폴리스는 우서 깊고 위엄 있는 도시였다. 알렉산더는 페르세폴리스에서 약 40킬로 떨어져 있는 페르시아의 옛 수도인 파사르가다이로 곧장 진군했다. 다리우스 3세는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에서 참패했어도 여전히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 다리우스 3세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패배한 뒤 페르시아 제국의 여름 궁전이 있는 엑바타나로 피신 전열을 가다듬어 복수를 계획하나 알렉산더의 추격을 받으면서 혼비백산 도망하는 형국이 되자 그의 주위에는 불안감이 팽배해지기 시작한다. 페르시아 대왕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고,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 B.C 330 년 7월 박트리아 지사 베소스를 중심으로 바르사엔테스와 나바르자네와의        연합을 통해 다리우스 3세를 체포하고 결국 제거하기에 이른다.

다리우스 3세는 샤루드 근방에서 칼에 찔려 죽어가는 모습으로 알렉산더에게 발견되게 된다. 이 일이 있은 후, 알렉산더는 왕위 찬탈자라는 이미지를 벗고 페르시아대왕의 원수를 갚은 사람으로 통하게 된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의 유해를 페르세폴리스로 보내 페르시아의 전통에 따라 정중히 장례를 치른다.


   # B.C 330년 한 여름 알렉산더는 박트리아를 향해 쉬지 않고 동진하였으나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다리우스 3세가 죽자 전쟁이 끝났다고 여기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굶주림, 추위, 쇠약 절망감 속에서도 메케도니아군은 베소스를 치기 위해 다시 진군한다. 베소스는 오래 견디지 못하고 초토화 되었지만, 한편으로 알렉산더는 내홍을 겪게 되는데, 여러 전선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알렉산더를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빗발치는 비난 속에서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인과 협력정책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그 중의 하나가 B.C 328-327년 겨울에 치른 알렉산더와 박트리아 귀족인 옥시아르테스의 딸 록사네의 결혼식이었다.


   # B.C 516 -515년, 다리우스 1세가 간다라와 신드를 정복했었다.

그러나 2세기 후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권위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B.C 326년 인도의 여러 왕국들은 인더스 강 유역과 그 지류의 영토를 되차지하게 된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페르시아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 인더스 강에서 페르시아 만까지

니케아에서 겨울을 보낸 뒤 정복 전쟁은 계속되었다.  알렉산더는 인더스 강을 따라 내려와 헤페스티온과 페르디카스가 기다리고 있는 합류지점에 이르렀다. 인도의 왕 포로스를 치기위해 한 여름 히다스페스 강을 건넜다. 새 동맹국에서 인도인 병사 5,000명과 코끼리 수십 마리를 지원 받아 알렉산더는 동쪽으로 진군을 계속한다. 그러나 지속된 원정으로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이 처음으로 정복자 알렉산더에게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 후 알렉산더는 히파시스강 기슭에 거대한 제단을 12개 세워 정복이 그 지점에서 끝났음을 알렸다.


  # 정복전쟁에 나서 자리를 비운 지 6년, 알렉산더는 제국이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임명한 지사들과 관료들 중 대다수가 직무태만에 빠져 있거나 직위를 남용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탓이었다. 이제 알렉산더의 최우선 목표는 정복한 나라들과 도시들을 다시 장악하는 것이었다. 인도에 머무르는 동안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 돌아온 뒤에도 그는 다수의 총독들을 해임하고 심지어 처형하는 과감한 정책을 추진했다.


     4-1. 마지막 나날 그리고 마지막 계획


B.C 325년 알렉산더의 여생은 2년 남짓 남아 있었다. 그는 이제 자기가 차지하게 된 옛 페르시아 제국의 주요 도시들을 왕래하면서 마지막 2년을 보냈다.


   # B.C 324년 2월 수사, 알렉산더의 결혼 피로연이 성대하게 열렸다.

페르시아의 일부다처제 풍습을 따라 왕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공주 두 명과 혼인했고, 그의 측근 수십 명도 페르시아 메디아의 최고 귀족 출신 여인들과 페르시아의 관습에 따라 합동으로 결혼했다. 알렉산더가 수사에 머무는 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정복을 기념하고 또한 새로운 정책, 즉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을 하나의 지배 종족으로 통합하는 정책을 장려하기 위해 알렉산더와 그의 친구 헤파이스티온, 그리고 80여 명의 장교가 모두 페르시아인 아내를 얻었고, 토착인 배우자를 취한 1만의 사병들에게 장려금을 주었다.


이란 귀족들과 협력정책을 계속 추진함으로써 알렉산더의 측근들과 병사들 대부분이 불만을 품게 된다. 정복자들과 피종복민들의 차이를 해소시키려 이런저런 조처들이 안고 있던 문제들이 결국 324년 오피스에서 곪아 터졌다.


   # 이 수도에서 저 수도로, 수사에서 바빌론으로, 바빌론에서 엑바타나로 옮겨 다니면서       알렉산더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B.C 324년 가을, 그는 엑바타나로 갔는데 거기서 가장 절친한 친구 헤페스티온이 죽게 된다. 323년 초봄. 그는 바빌론으로 돌아왔다. 그 해 6월3일 연회장을 나서던 알렉산더는 고열로 쓰러졌다. 왕은 끙끙 앓다가 6월 13일 저녁, 절망에 빠진 병사들이 통곡하는 가운데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향년 33세였으며, 왕위에 오른 지 13년 8개월 만의 일이었다. 정복자가 죽자 왕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체제가 급속도로 무너졌다. B.C 306년  이후 그의 경쟁자들이 잇달아 왕위를 차지했다. 알렉산더 제국의 단일성이라는 신화는 붕괴된 지 오래가 되고 말았다. 


        5. 사료들


  5-1. 기원전 480년에서 360년 까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외부 세계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고, 그들 사이에 경쟁과 반목을 계속해 왔다.


359년 이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그리스 반도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된다. 338년, 필리포스는 보이오티아의 카이로네이아에서 테바이와 아테네 군대를 격퇴하고 코린토스에 신설된 동맹 평의회를 통해 대부분의 도시들에 평화와 자신의 정책을 강요하게 된다. 그러나 필리포스는 336년 암살당했고, 페르시아 침공계획은 아들 알렉산더에게 유산의 일부로 남겨졌다. 알렉산더의 재위 기간은 13년에 불과했지만, 세계의 면모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알렉산더는 처음에는 5만 정도의 군대와 함께 지상으로 진군, 소아시아와 팔레스틴을 거쳐 이집트로 들어갔고, 거기서 메소포타미아로 나아간 뒤, 다시 동진하여 페르시아 그리고 오늘날 사마르칸드, 발크, 카불이 있는 중앙아시아를 통과했다. 그는 펀잡 지방까지 침투해 들어가 인도의 왕 포로스를 무찌른 뒤, 지상과 해상으로 철군 바빌론에 돌아와, 그 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들에게 남긴 방대한 육상 제국은 그리스 역사상 유례없는 것이었다.


헬레니즘적(Hellenistic)이란 용어는 “그리스어를 말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통 이 단어가 함축하는 것은 헬레니즘의 희석 화된 상태라기보다, 오히려 헬레니즘이 비(非) 그리스인들에게 확산되는 양상, 그리고 거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문화적 갈등이다.

  

   5.2. 이 시대의 증거는 고르지 않다. 

그 중 프톨레마이오스는 훗날 이집트의 왕이 된 자로 그의 『역사』는 수년 뒤 이집트에서 씌어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알렉산더의 공식『일지 Journal』를 전거로 삼은 것이므로 대체로 믿을 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불로스는 알렉산더가 죽은 지 적어도 20년이 지나서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로서 공식 역사가였던 칼리스테네스의 기록은 일찍 중단되고 말았는데, 그는 327년 반역죄로 처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이타르코스는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적어도 12권으로 된 알렉산더의 역사를 썼다. 이처럼 알렉산더의 경력에 관해서는 문헌 사료가 없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정보원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고, 그 사료들의 장점을 평가하고, 또 그들의 알렉산더에 대한 찬반의 편견을 감안하는 것이다. 한편 알렉산더의 사후 시기, 즉 헬레니즘 시대 자체와 관련해 역사가가 직면한 상황은 판이하기 때문이다. 헬레니즘 시대를 구성하는 300년 중 몇몇 시기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역사를 쓸 수 있다.


   5-3. 이 새로운 자료들은 세 개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돌 혹은 대리석으로 제작한 비문이다.

많은 석비에는 조약문, 법률, 혹은 정치체의 통합이나 판정 결과와 같은 공식적인 문제들이 기록되어 있다.


둘째로 파피루스들이다.

파피루스들은 공식적인 정책과 활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까지도 밝혀준다. 장소와 시기에 따라 조건이 매우 달랐기에 남아 있는 파피루스 자료는 그것이 속한 시공간에 대해서만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셋째로 주화들도 역사가에게 값진 증거를 제공한다.

연대 측정에 유용한 수단이 되며, 특정 문제들의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 종종 주화의 주조와 일반 정책과의 관련을 밝힐 수도 있다. 또한 중요성은 덜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다른 형태 혹은 다른 언어로 씌어진 문서들이 있다.


헬레니즘 세계는 역동적인 사회였다. 알렉산더의 활약이 가져온 최초의 충격에서 시작된 헬레니즘 세계는 차츰 쇠약해졌고, 마침내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뒤, 결국에는 로마 제국에 편입되고 말았다.


  5-4. 알렉산더의 행적은 얼마나 헬레니즘 세계의 특징적인 제도와 태도를 예견하고 그것들을 겨냥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6. 알렉산더 대왕의 또 다른 얼굴


알렉산더의 위업에 대한 서술은 어쩔 수 없이 개괄적일 수밖에 없다. 그로 말미암아 얼마나 헬레니즘 세계의 특징적인 제도와 태도를 예견하고 초점을 맞출 수 있느냐는 것이다.

첫째 알렉산더의 페르시아에 대한 태도 변화, 그리고 기본적으로 마케도니아 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오로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다민족의 국제적 군대로 변형시키려던 그의 시도는 여러모로 헬레니즘 시대의 개인적 왕국들의 군사적 기반을 예감케 하는 조치였다5).


둘째 점차 독재화한 알렉산더의 권력은 헬레니즘 왕들의 전제적 권력의 전조였다. 마케도니아 및 그 국가적 전통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알렉산더는 더욱 불가피하게 전제적 권력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6). 마케도니아인들에게 왕은 <동등 자들 사이의 일인자. 인 반면 페르시아인들에게 왕은 주인이요, 자신들은 왕의 노예들이었다. 그래서 페르시아인들은 그 외적인 표시로 왕에게 복종의 예, 즉 부복을 취했는데, 마케도니안 혹은 그리스인들로서는 그런 예법은 오직 신에게만 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327년 박트라에서 마케도니아인에게 페르시아인들을 따라 자신에게 그런 제스처를 취하라고 종용했을 때 그리스인 칼리스테네스가 그에 반대하고 나섰다. 알렉산더의 제안을 둘러싸고 아낙사르코스와 칼리스테네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고 그 때 칼리스테네스의 주장에 <알렉산더가 크게 역정을 낸 반면, 마케도니안들이 동조하였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왕은 초법적이라는 철학자 아낙사르코스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마케도니아를 제외한 헬레니즘의 여느 왕국에서도, 왕의 판결은 보통 법적 효력을 지니며, 왕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인정되고 있었다.


셋째 알렉산더의 권위주의는, 그의 후계자들도 그랬듯이, 그리스인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났다. 필리포스가 계획한 원정의 명분은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인 들에게 당한 피해를 복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알렉산더가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에 어떤 지위를 부여했는지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처사는 자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다. 그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권리에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넷째 알렉산더와 그 뒤를 이은 헬레니즘 세계의 왕들은, 신격을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전제적 권력을 강화했다.7) 신격화 요청은 한동안 알렉산더의 생각이 지향해 왔던 바의 마지막 단계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7. 왜 알렉산더인가?( 알렉산더의 의의)


알렉산더가 아직도 우리의 기억속의 인물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알렉산더와 같은 영광을 누린 자들이라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샤를마뉴, 프리드리히 2세, 칭기스칸, 나폴레옹과 카이사르 같은 인물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7-1. 세계통합과 보편주의 이념

알렉산더는 전쟁터 등의 장소에서 야만인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지면서 그리스인이 과연 그들보다 우월한지 시험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이집트의 철학자 프삼몬의 영향으로 모든 인류가 신의 주권 아래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신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인간 가운데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선한 자만을 신의 백성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을 구체화 시키고 세계국가 내부에 공동의 유대를 창출하는 일이야 말로 알렉산더가 떠맡은 임무 가운데 가장 어려운 임무였다. 이를 위해 처음 얼마 동안 그는 도시를 건설하는 일에 주력했다.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그 도시들은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고 통신망을 보호했다. 


헬레니즘의 섬이라고 할 이 도시들로부터 알렉산더가 희망했듯이 그리스의 지식이 확산되어 제국의 백성 모두를 통합시키는데 기여한 것이다. 아시아 지역으로의 그리스 문화 전파는 결정적으로 알렉산더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 되었다.

  7-2. 인종 혼합

기원전 329년 봄에 알렉산더는 카와크 고개를 넘고 힌두쿠시를 가로질러 박트리아로 진군했다. 거의 같은 무렵 그의 주력부대인 그리스기병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존경하던 사령관이 죽음에 대한 이들 기병대의 분노와 본국 귀환은 알렉산더 생애 최대의 위기였다. 분명히 그는 그 당시 더 이상의 그리스인 병력과 마케도니아인 병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원정은 이 시점에서 비극적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었다. 알렉산더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의 아시아인들을 병력으로 충원했다.

알렉산더가 원정 주력군을 야만인 병사들에게 기꺼이 내맡긴 것은 바야흐로 급속히 형성되어 전 세계에 펼쳐지고 있던 새로운 사상이 구체화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리고 그 정책의 동기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알렉산더의 절실한 필요성 때문이었다.

새롭게 편성된 아시아 군대는 박트리아-소그디아나에서의 2년에 걸친 활동을 통해 알렉산더에게 매우 값진 존재임을 증명했다. 이 기간 중에는 게릴라들의 기습이 있었고 끝없는 행군과 매복과 배신행위가 이어졌으며, 부상과 질병이 알렉산더를 괴롭혔다. 게다가 마케도니아 귀족들의 반대가 상존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연회를 벌이던 중 알렉산더는 한 친구로부터 자신이 필리포스와 필리포스의 부하들에게 큰 은혜를 입고 있다고 조롱을 당했다. 만취한 그는 난폭한 기질을 참지 못하고 그 흑인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클레이투스를 살해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죽마고우이자 그라니쿠스에게서 자기 목숨을 구해주기도 한 인물이었다. 어쨌든 이 2년 동안 알렉산더는 생각할 여유를 가졌다. 만일 아시아 병력이 그토록 충성스럽다면, 동부 이란 주민의 감정을 달래고 게릴라 전투를 종식시키기 위해 화해적인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박트리아 왕의 딸로서 포로가 된 록사나와 정략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아시아를 충실한 파트너로 삼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지배를 합법화하기 위해 알렉산더는 죽기 한 해 전에는 다리우스의 딸인 바르시네와도 결혼했다. 이즈음에 알렉산더의 친구들 대부분은 야만인 출신 아내를 얻었다. 그리고 1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에게도 같은 선물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들은 원정 과정에서 이미 아시아 여성들에 대해 상당한 친근감을 갖고 있었다.


  7-3. 헬레니즘과 세계통합의 꿈

계는 이제 과거의 모습을 영영 잃어버렸다. 그리스의 민주적인 도시국가들은 적어도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서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에게 해 주변에 밀집된 동질적인 문명 또한 영원히 사라졌다. 그리스인의 높은 교양 수준, 자유와 책임, 그리고 페리클레스 시대의 치열했던 삶은 영영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세계는 이제 거대한 군주국가에 속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제국은 그의 사망과 더불어 셋 또는 네 개의 국가로 분열되었다. 그렇다고 그의 모든 정복 활동이 무위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알렉산더 제국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왕국들은 300년에 걸쳐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에 의해 서양적인 방식으로 통치되었다. 그것은 로마가 등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놀라운 사실은 알렉산더의 정복을 통해 거대한 세계의 문이 활짝 열렸으며 또한 이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점이다.

박트리아에 남겨진 마케도니아 인들과 그리스인들은 힘을 추슬러 다시 한 번 힌두쿠시를 가로질러 멀리 캘커타에 이르기까지 인도를 정복했다. 카이버 고개 지역에서 그들은 동양과 서양이 탁월하게 절충된 예술양식을 창조했다. 그때까지 부처는 예술적 측면에서 단지 추상적 관념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조각가들이 신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신을 사람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많은 순례자들이 간다라 지역을 지나가면서 부처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얻게 된 것이다. 그의 세계개념은 즉각 수용되었다. 헬레니즘 시대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이 세계 사회구성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세계 사회내부에는 분명히 차이점들이 존재했지만, 공통분모적인 문화가 자연적인 접착제 역할을 했다. 이 새로운 문화는 페리클레스시대의 문화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이 문화는 평민층의 급속한 성장을 이뤄냈고 오리엔탈리즘과의 긴밀한 접촉을 통해 많은 영향을 입었기 때문이다. 세계가 통합되었음을 생생하게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례를 우리는 신약성서가 그리스어로 씌어진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로마에 문명을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로마의 세계 국가 창출에 기여하고 나아가 기독교로 하여금 로마를 정복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바로 이 헬레니즘 시대의 문화였다. 강력한 역사적 힘만이 그러한 국가를 창출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알렉산더의 업적이었다. 보편주의, 전 세계인의 결속, 인류의 협력 등의 개념을 역설한 알렉산더의 꿈은 인종과 피부색이라는 편협한 기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하나의 도전 과제로 남아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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