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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우리손에 오기까지/감동글 & 감동 기도문

[스크랩]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지음 / 조중빈 옮김

지식의날개 / 2006년 6월 / 336쪽 / 15,000원


▣ 저자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미국 리치먼드 대학교와 윌리엄스 대학 교수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1978년 발표한 역작 『리더십 강의』를 통해 ‘리더십’을 하나의 학문분야로 개척하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평생을 리더십 연구에 몸바쳐왔다. 정치학자이며 역사학자인 그는 과거 연구에서, 추종자(follower)를 창조적인 뉴 리더로 변신시키기 위해 리더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가를 정치학과 역사학의 시각으로 탐구한 바 있다. 저서로는 『리더십 강의』,『루스벨트 : 사자와 여우』,『루스벨트 : 자유의 전사』 등이 있다.


▣ 역자  조중빈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동대학 정치대학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사회과학대학 학장직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정치행태, 선거, 미국정치, 방법론 등이다. 최근에는 문화교차학적 관점에서 한국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하여 대학원 문화교차학 협동과정과 문화교차연구소를 개설하고 교육과 연구에 열중하고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의 저자는 리더십을 인간의 욕구와 사회변화라는 가장 어려운 문제의 일단을 밝혀줄 수 있는 학문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는 ‘리더십’이라는 말을 그대로 서술하는 기술적 용어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는 처방적 용어라고 말한다. 즉 지도자가 수행해야 할 과업은 사람들의 희망에 부응하는 변화를 세상에 가져다주는 것이며, 이때 처방은 도덕적 필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최상의 공적 가치들을 추구할 때 리더십과 팔로어십이 연계되며, 그로 인해 변혁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변혁적 리더십은 사람들의 욕구와 필요에 부응하는 첫 불꽃을 일으키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떠한 변혁도 단칼에 역사를 만드는 ‘위인’의 과업이 아니라 ‘민중’의 집단적 성취로 수놓아져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지도자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변화가 결국 개인들의 열망과 노력에 의해 일어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지도자도 추종자들 없이는 변혁을 이끌어낼 수 없다. 사상이 무기라면 이론은 선봉에 서야만 한다. 리더십이 사상이라면 실생활에의 적용이라는 테스트와 맞대결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많은 이론들은 우리가 오늘날 직면한 정치적․경제적 상황들에 쉽게 적용될 수 있는 유익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 차례

프롤로그


제1부  리더십 개념의 역사적 변화

Chapter  1  리더십의 미스터리

Chapter  2  X요인을 찾아서


제2부  리더의 자질

Chapter  3  체스게임과 권력투쟁

Chapter  4  기획자로서의 리더


제3부 역사상의 리더십 사례

Chapter  5  미국 : 건국 리더십의 대변혁

Chapter  6  프랑스 : 리더십의 시련

Chapter  7  갈등의 리더십


제4부  리더와 민중

Chapter  8  리더십의 심리학

Chapter  9  창조적 리더십

Chapter 10  지도자 추종자 패러독스

Chapter 11  갈등과 리더십의 무장


제5부  변혁의 리더십

Chapter 12  가치의 힘

Chapter 13  민중의 힘


에필로그  지구촌의 빈곤 : 변혁적 리더십의 시험대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지음 / 조중빈 옮김

지식의날개 / 2006년 6월 / 336쪽 / 15,000원



제1부 리더십 개념의 역사적 변화


리더십의 미스터리

리더십의 공통된 특질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역사의 경로를 자신의 의지대로 바꾼 위인의 역동적이고도 결정적인 역할 등, 역사의 변화에 관한 설명의 기저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언제나, 성공한 영웅을 전능자로서 숭배해왔다. 어린이들은 전사들, 무법자들,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서점에 가보면 성공한 기업가, 전쟁지략가, 정치적 거물들의 번드르르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영웅이 위대한 것은 그가 무엇을 이루었느냐와 그가 어떤 사람이냐, 즉 그의 특질 때문에 위대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위인들이 종종 몰락하듯이 위인이론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상의 영웅이 이룬 고매한 업적은 가끔은 도덕적으로 흠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며, 별로 영광스러울 것도 없이 그저 단순한 우연이나 ‘상황적 요인’의 결과인 경우도 많다.


변화의 잠재력은 인간이 얼마만큼 자신의 사회적 출신과 성장 경험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고, 그 운명을 통제하고 변화를 실현하기 위해 창조적으로 행동하느냐에 달려있다. 언뜻 생각하면 리더십을 권력의 중요한 한 형태로 볼 수 있으나, 그것은 단순히 휘두르는 자가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서가 아니라, 지도자를 따르는 자들의 필요, 욕구, 동기, 가치, 능력의 창조적이며 역동적인 상호작용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리더십을 인간의 욕구와 사회 변화라는 가장 어려운 문제의 일단을 밝혀줄 수 있는 학문 중의 학문(master science)으로 인식하게 되어 리더십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이 탐구는 절박한 여건과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 여건과 상황을 초월하고 또한 변혁하기까지 하며, 그 과정에서 그들이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개조시킬 수 있으리라고 본다.


X 요인을 찾아서

인간사회의 모든 변화는 어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주도권을 잡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군사적 침략과 대학 설립, 전기를 발명하는 것, 새로운 정부를 창출해내는 것,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문제의 핵심은 누가 어떤 여건 하에서 어떤 방법으로 변화의 주도권을 잡느냐 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변화에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한 학파의 학설에 따르면, 새로운 재화와 이를 값싸게 생산하는 방법을 고안해낸 어설픈 땜장이(tinker)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의 삶이란 주로 살아가는 데 풍파가 없도록 작은 변화들에 적응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땜장이는 보다 나은 기계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다시 노동의 성격을 바꾸었으며, 그 생산품을 팔기 위한 새로운 시장을 창조했다. 이러한 변화가 18~19세기의 급속한 산업화를 떠받쳤다.


다른 학파의 학설에 따르면, 사회의 변화는 이러한 어설픈 땜질이 아니라 사유의 결과였다. 즉 사람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상상했고, 그림을 그려보았다.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일을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해보는 것을 뜻했다. 예컨대 말의 힘을 증기의 힘으로 바꾼다든지 편지 대신 전보를 친다든지 하는 일들이었다. 찰스 다윈은 ‘적응’이라는 것은 생존을 위한 끝없는 투쟁의 결과이자 종 내부에서의 갈등의 산물임을 알아냈다. 그러나 다윈주의는 진화론적인 변화에는 오직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욕구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즉 종(種)들은 적응하려고 의도하지 않으며, 적응은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신의 법칙을 거부하는 이론이었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역사의 흐름 자체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사건들에 ‘우연’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듯 역사의 법칙들을 밝힐 수 있는 증거는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전쟁이나 사회 변화 같은 사건들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상투적인 지적 수단으로는 분석해낼 수 없는 일련의 복잡한 원인들로 가득 차 있다. 현존하는 지적 자원들을 차용하여 종합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적 자원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다변학문이 필요하다. 그 학문이 리더십이고, 리더십이란 바로 역사적 인과관계에서의 X요인을 말한다.


리더십은 경쟁과 갈등의 국면에서 리더와 추종자 양자가 각각 독립적으로 가지고 있는 목표나 서로 공유하고 있는 목표들을 실현하기 위해 특정 동기와 가치들, 여러 가지 경제적, 정치적, 기타 자원들을 지닌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상호적인 동원 과정이다. 리더십은 분명 권력과는 뗄 수 없는 것이지만 단순한 권력 소유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으로,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거래적 리더십으로 지도자들은 어느 한 가지를 다른 것과 교환할 목적으로 추종자들에게 접근한다. 예를 들어 투표로 자신을 지지해 준 사람들에 대한 보상으로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둘째, 변혁적 리더십은 추종자들의 현존하는 요구 또는 잠재적 추종자들의 필요와 수요를 인식하고 이를 충족시킴으로써 추종자들을 전인격적으로 사로잡는다. 그리고 변혁적 리더십은 궁극적으로 추종자들의 진정한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도덕적 리더십으로 발전한다.


변혁적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변혁’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바꾸다(change)'와 ’변혁시키다(transform)'라는 동사의 정의를 구분해야만 한다. ‘바꾸다’라는 말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 주고받는 것, 자리를 맞바꾸는 것’ 등을 의미한다. 반면 ’변혁시키다‘라는 말은 개구리가 왕자로 탈바꿈하거나 마차공장이 자동차공장으로 탈바꿈하는 것처럼 형식이나 구조의 대변신을 일으키는 것, 사물의 상태나 본질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변혁적 리더십이란 주관적인 것을 배제하기보다 이를 다른 다양한 요소들과 통합하고, 이것들이 한 덩어리를 이루어 중대한 사회 변화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완전히 새로운 정향성’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변혁적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변화의 과정에 참여시키고, 집단정체성을 고무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기술하기 알맞은 단어가 바로 힘 실어주기(empowerment)라는 단어이다. 변혁적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대신 추종자들을 옹호하고 고무한다. 지도자와 추종자들 간의 관계와 관련하여 자리하는 감정을 보통 카리스마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지도자와 추종자 관계를 왜곡한다. 추종자들은 너무나 충성스럽고 복종적이어서 지도자의 정신적 갈증을 충족시키는 것 이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한편 지도자도 추종자들에게 권한을 주지 못한다. 서로 힘을 실어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힘을 실어주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카리스마는 기껏해야 혼란스럽고 비민주적인 리더십의 한 형태이다.


변혁적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최상으로 여기고, 또 영속적인 행동원리를 포괄하는 공적 가치들의 테두리를 규정한다. 이러한 가치들은 헌법과 법률,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해석의 이면에서 사상을 형성한다. 일반시민들에게 그것은 일상적 대화의 일부가 되지는 않지만 거대한 변화의 가능성이나 그러한 징조에 직면하게 되면, 이 막강한 기본 가치들이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리더십이 정말 변혁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변혁적 가치들은 변혁적 리더십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2부 리더의 자질


체스게임과 권력투쟁

오랜 옛날부터 체스는 ‘왕족의 게임’이었으며, 미래의 통치자들을 위한 훈련장이었다. 미래의 통치자들은 이 작은 체스판 위에서 말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100년 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체스게임에다 ‘지적인 전투’라고 이름을 붙였듯이 체스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필요로 한다. 체스게임은 헤아릴 수 없고 급변하는 요인들, 대립과 협력의 대조적인 힘, 그리고 몹시 사나운 변수들의 바다로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리더십의 이론과 실체를 탐구하는 것은 ‘인간 체스’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리더십이라는 이 손에 잡기 어려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지도자들과 통치자들에 관한 일련의 연구들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그들이 권력을 어떻게 획득했으며, 지배 권력을 둘러싼 경쟁에서 발생할 수 있는 투쟁을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억제하려고 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1558년부터 1603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그녀의 긴 치세 동안 경쟁관계에 있는 군주들로부터 위협당하고 멸시당하여 때로는 인기가 없었지만, 후세에 그녀는 훌륭한 여왕으로서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제도와 신민들을 새롭게 만든 노련한 지도자로 기억되곤 한다. 엘리자베스는 두 살 때 아버지 헨리 6세가 어머니 앤 왕후를 간통죄로 고발하고 참수하자, 공주의 칭호가 박탈되었고 왕위 계승에서도 제외되었다. 후에 왕위 계승 서열이 복원되긴 했지만 그녀의 이복 남동생과 이복 언니가 왕위 계승에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가 왕이 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복 남동생 에드워드 6세는 1553년 열다섯 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죽었다.


에드워드가 죽자 언니 메리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스페인 왕족인 어머니로 인해 가톨릭 신앙에 영향을 받은 그녀는 헨리 8세가 단절시킨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스페인 왕위 계승자인 펠리페 2세와 결혼했으며, 프로테스탄티즘을 이단으로 선언하고 수백 명의 신교도들을 화형에 처했다. 엘리자베스도 프로테스탄트 저항세력의 지도자로 인식되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졌다. 반역죄로 런던탑에 감금된 그녀는 지방으로 추방되었다가 1558년 메리가 죽을 때까지 위험 속에서 살았다. 모진 도제기간과 재위기간 내내 엘리자베스 1세가 직면했던 상황은 거의 모험에 가까웠다. 특히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은 나라를 거의 내전상태에 빠뜨렸다.


엘리자베스는 화해와 조정을 중시하는 온건주의적인 개혁가였지만, 신교도를 옹호하고 가톨릭을 배반자로 간주했다. 더욱이 군주가 여자라는 사실은 늘 그녀의 강인함과 과단성을 의심받게 했다. 가톨릭의 온상이었던 아일랜드에서는 총독이 여왕의 성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성에 따른 나약함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1579년, 청교도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존 스터브스는 여왕이 가톨릭교도인 프랑스인 공작과 결혼하려 한다는 내용을 실은 소책자를 출판했다. 이에 화가 폭발한 여왕은 스터브스의 손을 잘라버렸다. 이렇게 참혹하고 예측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어떻게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면서 생존하고 번영했는가.


엘리자베스는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은 덕분에 소포클레스와 플루타르코스, 키케로와 리비우스에 대해 배웠고, 통역 없이 외국 사절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프랑스어와 이탈리어에 능숙했다. 그녀는 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녀의 궁전을 그 시대 최고의 문화가 꽃필 수 있는 지적 교양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공의 주요한 비결은 그녀가 가진 기민한 판단, 즉 영국과 외국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야심과 경쟁에 관련된 움직임에 대해 직관적인 이해력을 겸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엘리자베스가 40여 년 동안 추밀원(Privy Council)을 다루었던 수완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다.


통상 12명 정도의 추밀원 의원들은 여왕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대부분 의회와 지역에 그들만의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는 거만하고 전제적인 사람들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추밀원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않았으나 필요에 따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할 때에는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또는 소규모 단위로 미리 만났다. 하지만 추밀원 의원들도 여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터득했다. 그들은 유리한 때가 올 때까지 결정들을 유보했다가 마침내 여왕을 설득했다. 또한 종종 여왕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도록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전제적이지만 신중한 군주와 충성스럽지만 의심해보고 결정을 재촉하는 추밀원 사이에 균형이 계발되었다. 이것은 거의 집단적인 리더십에 가까웠다.


엘리자베스는 암살의 음모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는 경쟁자, 적의를 품은 성직자들, 다루기 힘든 귀족들, 그리고 스페인을 비롯한 외국으로부터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따라서 그녀의 최대 목표는 이러한 불안정을 극복하고 국내 질서 유지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 통치자들이 했던 철권통치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톨릭교도들도, 프로테스탄트 광신자들도 만족하지 않았던 종교 법안을 단호하게 추진했다. 즉 그녀 나름의 실용주의를 반영하고, 극단주의자들을 배제한 거대하고 폭넓은 안정화 센터로 바꾸려고 했다. 이것이 달성되자 더 이상의 개혁을 위한 모든 제안들을 거절했다. 엘리자베스는 명확한 목표를 추구하고 신중하고 거래적인 생존전략을 취한 군주였다.



제3부 역사상의 리더십 사례


미국 : 건국 리더십의 대변혁

모든 리더십은 집단적 현상이지만 그 집단성은 다양한 양태를 띤다. 과거의 군주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는 통치를 했다. 이에 대한 대중의 저항과 개혁이 18세기에 일어났는데, 이는 아래로부터 치받쳐 오르는 민초들의 리더십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런데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리더십을 규합시켰던 것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계몽주의 사상이 가진 지적 명료성과 힘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칸트이다. 영국의 학자들이 묘사한 바에 따르면, 조용하고 키가 작고 새가슴을 가진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서 교수직도 명성도 없이 오랜 기간 연구에 종사했다. 그러나 점차 다른 젊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지성의 메시아로 추앙받게 되었다.


칸트뿐만 아니라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 루소와 볼테르와 같은 유럽의 여러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추종자들을 매혹시켰다. 이로 인해 계몽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창조적 리더십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계몽주의 사상을 제공하는 거대한 백과사전들이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또한 신문, 정기간행물, 서적의 출판이 늘어났고, 학구적인 엘리트들을 위한 도서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정기간 책을 빌려주는 도서열람실이 급증했다. 독서층은 난공불락의 특권층에 대한 불만과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정부, 그리고 국민의 요구에 묵묵부답인 통치자들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면서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유럽에서의 변화와 충격은 그 당시 벤자민 프랭클린이나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여행자들을 통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전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들이 미국 국민들을 변혁시키는 새로운 집단적 리더십의 중추를 형성했다.


미국인이라면 모두 1776년 7월 4일을 알고 있다. 독립선언이 지도자들에게 부여된 소명이었다면, 그 독립선언을 만든 것 자체는 집단적 리더십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행위였다. 토머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세 명이 선언서를 기초했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가능하고 필요하도록 만들었다. 20여 명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이름과 함께 존 행콕(John Hancock)의 큼지막한 서명이 들어간 독립선언서는 1776년 7월 8일 필라델피아에서 공개되었고, 다음날 뉴욕에서 조지 워싱턴 장군과 그의 부대원들 앞에서 낭독되었으며  13개주 구석구석까지 보내졌다. 그러나 독립이후, 대중들 사이에서 종교, 계층, 지역 등과 같은 구태의연한 이질적 요소들이 전면에 부상했다. 그리고 이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자 통일되고 동질적인 시민이라는 공화주의자들의 이상이 흔들리게 되었다.


1780년대 중반에는 농장노동에 대한 임금이 급격하게 떨어진 반면 고율의 세금이 유지되었다. 미국인들에게 독립선언서에 명기된 행복추구권이 곧 거짓말처럼 들리게 되었다. 1786년 매사추세츠 의회가 세금과 부채의 경감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절박한 탄원을 무시한 채 휴회하자, 무장한 폭도들이 의회의 회의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수백 명의 군중이 무기고를 향해 진격했다. 군대는 그들에게 발포했고, 북부와 서부로 흩어진 폭도들은 1787년 겨울에 그곳에서 체포되고 살해당했다. 그러나 매사추세츠 폭동은 우려와 실망을 확산시켰다. 이로 인해 신문과 책, 술집과 휴게실에서 집단 토론이 생겨났다. 또한 식자들과 법조인, 기업인, 교사, 목사들 간의 서신 왕래를 통한 토론이 일어났다. 서신 왕래는 연방주의, 대통령의 권한, 다수의 지배, 소수의 권리 같은 헌법제정에 관한 토론이었다.


서신 왕래를 통한 대토론 뒤, 1787년 5월, 대표자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그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실천적 아이디어들을 가져왔다. 그 중 제임스 매디슨은 후일 ‘버지니아 플랜(Virginia Plan)'으로 알려진 방대한 계획을 마련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주정부의 법령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연방정부를 제안했다. 매디슨의 ‘버지니아 플랜’은 토론의 토대이자 헌법의 핵심 원칙들과 중요한 조항들의 궁극적 원천이었다. 중앙정부에 얼마만한 권한을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권력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변혁적 지도자로서 헌법 입안자들은 이론가인 동시에 실천자로 행동했기 때문에 지적인 쿠데타를 훌륭하게 이끌어냈다. 이리하여 헌법의 입안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헌법의 어느 부분에도 국민의 자유를 열거한 권리장전이 없었다. 곧 분노의 물결이 대서양 연안을 따라 서서히 퍼져나갔다. 권리에 대한 어떤 조항도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자유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장 이론(異論)이 분분한 쟁점이 되었다. 파리에 있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곧 매디슨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리하여 3천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두 사람간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논쟁이 결론지어지자, 매디슨은 수백 개의 기본권 관련 제안들을 엄밀히 조사한 뒤에 자신의 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6주가 지나서야 안건을 심사하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8월 24일에 17개 수정조항들이 동의를 얻었다. 다음 활동은 상원으로 넘어갔고, 상원은 몇 주에 걸쳐 심의한 끝에 17개 수정조항을 12개로 축소했다. 1789년 9월 그것이 각주에 제시되었고, 그 중 두 개가 동의를 얻지 못해, 최종적으로 10개의 수정조항이 인준되면서 권리장전이 통과되었다.


연방주의자들이 헌법을 쟁취했고, 정부를 획득했다. 또한 균형 장치를 가진 연방정부라는 발명품을 획득했다. 이제 워싱턴, 매디슨, 해밀턴을 비롯하여 이 발명품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그것이 작동되게 해야 했다.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고 공공의 가치를 수호하고 확산시키는 데 필요한 리더십을 가능하게 해야 했다. 그러나 1790년대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투쟁적이고 분열된 시기였다. 정부 내에서 해밀턴과 제퍼슨이 개인적으로, 정치적으로 서로를 증오하게 되었고, 미국인들은 외교정책을 놓고 분열되었다. 즉 제퍼슨을 위시한 모든 공화주의자들은 프랑스혁명을 지지한 반면 연방주의자들은 경악했다.


양측이 치열한 이념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미국 정치의 이론과 관행에 획기적인 변화의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다. 매디슨은 이러한 혼란을 평정하기 위해서는 정치 지도자와 인민 다수를 견제할 수 있는 방침이 생겨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견제장치로 정당을 생각해냈다. 어떤 정당이든 선거에서 승리하면 정부 내에서 다수를 위해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소수파의 의견도 존중되어야 하는 바, 이러한 조율의 메커니즘은 패배한 정당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게 된다.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은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지지층을 확산하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다수에 대한 견제책이 되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것은 국민들의 기대와 필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의 사례는 근본적이고 생산적인 변화는 서서히 점진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사상과 행동의 거대한 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도의 변혁 뒤에는 가치의 혁명이 자리 잡고 있었고, 가치의 대변혁 뒤에는 중대한 사상적 전환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계몽주의 사상은 도처의 행동가들 사이에서의 갈등의 반영을 통해 변혁이라는 성과를 거두게 했다. 독립의 쟁취, 주를 통합했던 연맹체제의 확립, 강력한 중앙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헌법의 제정, 중앙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권리장전의 추가 - 이 모든 것들은 억압된 가치들의 재천명을 통해 진정한 해결책이 모색되며, 그 과정의 갈등이 변혁적인 힘을 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4부 리더와 민중


창조적 리더십

창조적인 리더십은 한 개인이 현존하지 않는 상황을 상상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이를 이루기 위해 가능한 방법들이 모색되며, 리더십이라는 행위로 그 비전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이 중대한 변화에 대해 추종자와 반대자가 발생되며 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바로 이러한 갈등이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리더십과 팔로어십(followership)을 역동적인 힘으로 융합시킴으로써 강력한 동기를 공급한다. 간디는 창조적 리더십이 어떻게 제한된 범위 내에서 진정한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간디의 정치적 전략은 남아프리카라는 다인종 사회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 젊은 브라만 청년은 1893년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인도에서 그곳으로 왔다. 1906년 8월, 남아프리카 당국은 인도인․아랍인․터키인들에 대해 지문 날인과 신체 수색을 통해 정부에 등록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곳에서 이미 수년 째 인도인 커뮤니티를 조직하고 있던 간디는 이러한 모욕에 항의하기 위한 대중 집회를 소집했다. 간디는 자신이 조어한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라는 말로 투쟁을 표현했다. 이 말은 ‘진리와 사랑 또는 비폭력’의 힘을 의미했다. 한편 스와라지(swaraj)는 그의 궁극적 목표였다. 스와라지는 '자치'를 의미했는데, 간디에게 진정한 자유란 ‘안으로부터 형성된 규율’을 의미했다. 간디는 이 스와라지를 통해 인종적․식민지적 압제로부터의 독립과 내적인 해방을 융합시켰다.


1915년 인도로 돌아왔을 때, 간디의 리더십은 혹독한 시험에 직면했다. 카스트와 종교, 그리고 지역에 따른 분열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동원하느냐 하는 문제와 부딪혀야 했다. 더욱이 영국의 통치와 더불어 이념적 경쟁자들과도 맞서야 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공산주의 지도자 로이(M. N. Roy)였다. 간디는 어떻게 인도인들을 이끌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1년 동안 조국의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을 분석했다. 그리고 스와라지의 정신 속에서 인도인들이 시선을 안으로 돌려주기를 원했다. 즉 그들의 투쟁이 정치적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국의 독립뿐만 아니라 천민제도 철폐와 복지혜택, 여성들의 지위 향상 등의 문제는 이들에게 훨씬 더 동기를 촉발시키는 요인이었던 것이다.


1920년대 내내 간디는 전인도에 걸쳐 학교 건립, 의료 및 공중위생 개선, 지역산업 촉진 등 광범위한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그리고 그 성공들은 인도인들에게 자유와 존엄의 길을 찾아주겠다는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1930년, 간디는 정부의 소금 전매에 저항하여, 직접 소금을 모으기 위해 해안 지방까지의 대장정을 결심했다. 이는 영국 정부의 불의에 대항하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강력하고 포괄적인 상징이었으나, 간디가 투옥될지도 모를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간디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획을 추진했으며, 추종자들에게 비폭력적으로 운동을 진행한다면 영국 정부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주지시켰다. 24일 동안 200마일을 행진하는 동안 수천 명의 남녀노소가 이 행진에 동참했으며, 간디는 신문과 뉴스 등의 언론을 현명하게 활용하여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소금행진 이후에도 거의 20년 이상 저항은 계속되었다. 영국정부는 간디와 협상하는 대신 그를 투옥했으나, 독립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1947년, 인도는 마침내 독립했다. 그러나 자유가 곧 재앙을 불러왔다. 서둘러 철수하던 영국은 인도를 힌두족 지배의 인도와 이슬람교도 지배의 파키스탄으로 분리했으며, 이러한 분리는 종족 간의 전쟁, 그로 인한 수십만 명의 사망자와 수백만 명의 망명자를 양산하게 했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와 스와라지를 계속 역설했고, 단식의 위협을 정치적 전술로 개발하였다. 즉 그의 단식은 힌두교와 무슬림 지도자들로 하여금 지역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비폭력에 대한 신념을 변함없이 고수했던 간디는 힌두교 광신도에게 암살되었다.

출처 :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글쓴이 : 코람데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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