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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우리손에 오기까지/스토리1

[스크랩] 나는 요즘 교회를 옮기고 싶다 - 김순희 지음 -

[책소개] 나는 요즘 교회를 옮기고 싶다 - 김순희 지음 - 

                <차 례>
책머리에
정말 새신자 입장에서 배려하십니까?
교회 안의 작은 교회
교회를 옮기고 싶어하는 사람들
교회 학교가 변화될 때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진다
나의 신앙에 영향을 끼친 양육자
가장 훌륭한 양육자, 부모
평신도 지도자의 필요 충분 조건
성숙한 인도자가 되기까지

- 저자 김순희
연세대학교졸업. 방림 여자 중학교 교사 역인.
현재 광림 교회 권사. 남편 이보선 집사와의 사이에 지은과 지수 두 딸을 두었으며, 저서로는 전도용 책자 『천사도 흠모하겠네(두란노 출간)』가 있다.

책 머리에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고 성경 공부와 설교 말씀을 통해 성경 지식을 많이 가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변화되지 못하고 해주기만을 바라는 ‘공주병, 왕자병’의 영적 미숙아가 교회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 때문에 새신자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납니다. 영적 미숙아는 세상 속에서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세상은 저들이 제대로 양육 받지 못한 영적 미숙아인지 성숙한 그리스도인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성도는 불신자들이 읽는 성서”라는 말처럼 세상은 주변에서 만나기 쉬운 평신도를 보고 교회를 판단하고 기독교를 비판합니다. 훌륭한 설교 말씀을 하시는 목사님, 성경 공부를 잘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이름하여 수평 이동 교인이 많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교회들은 실제로 급격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한국 교회의 성장이 멈췄다는 통계는 웬일입니까?

주머닛돈이 쌈짓돈이라고,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는 기성 교인들이 또 새신자로 등록되어 결국 통계 수치만 올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도시 개발 때문이라는 핑계도 댈 수 있겠지만 이사 때만 되면 그것을 교회 옮기는 절호의 기회(?)로 삼는 교인도 있습니다. 교회가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갖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마치 신발 갈아 신 듯 교회를 옮겨 버립니다. 그러니 자연히 교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습니다. 덩달아 교회를 옮기고 싶어하는 교인들도 생겨납니다. 많은 성도들이 전도만 잘하면 그만이지 하면서, 양육은 그저 목사님 혼자서 책임지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도한 후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때까지 끊임없는 관심과 기도로 이끌어 주며 사랑을 베푸는 ‘양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전도와 양육’ 이 두 단어는 서로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전도를 하면서 양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도 대상자의 90%는 한 번씩 교회에 가 봤다고 합니다. 그들은 과거에 교회에 다닐 때 신앙이 성장하지 못해서, 교인 사이에 시험이 들어서, 목회자 때문에, 부모님의 신앙은 돈독하시지만 가정 사역을 잘 감당하지 못해서 등등으로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교회를 떠난 이유들을 분석해 보았더니 목회자나 목회 방침 때문보다는 주위의 평신도나 평신도 지도자들 때문에 떠난 경우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양육에 있어서 평신도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말해 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는 무리가 믿음이 연약한 교인을 교회 밖으로 내몰고서 또다시 전도하려고 애를 쓰는 어리석음이 알게 모르게 반복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는 것처럼, 첫 전도에서 믿음의 본을 보여 방황하는 교인을 만들지 않도록 양육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정말 새신자 입장에서 배려하십니까?

처음부터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를 찾은 새신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가족이나 이웃의 애걸(?)에 못 이겨 왔다, 억지로 왔다, 과거에 다녔던 교회의 향수에 젖어 얼떨결에 오게 되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왔다는 표현이 그들에게는 더 잘 어울린다. 한국 교회 전체 평균, 새신자 중에 정착하는 정식 등록 교인 수는 10% 정도라고 한다. 이 안타까운 통계를 빌리지 않더라고 새신자 정착에 어떤 걸림돌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거의 모든 교회가 교회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특별히 새신자에게는 온 정성을 쏟는다. 새신자 담당자들이 친절하게 주차를 해주고, 예배 시간에는 전교인의 따뜻한 환영과 목사님의 축복 기도, 선물 증정, 그리고 예배 후에는 교회 안내, 예배 안내, 선교회 소개, 새신자 교육에 이어 점심 식사까지 대접을 한다. 교역자가 즉시 심방을 가고, 속회(구역, 순)예배를 함께 드린다. 그렇듯 교회마다 나름대로의 방침을 세우고 노력을 들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성장률이 저조하다.

어떤 교인은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문제가 있다’ ‘ 목회 방침이 문제다’ ’건축 헌금이나 십일조를 지나치게 강요한다‘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목회자에게 책임을 돌린다. 실제로 그런 이유 때문에 새신자가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새신자가 떠난 이유가 “나 때문에…”라고 말하는 교인은 거의 없다. 정말 교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큰맘 먹고 교회에 첫발을 내딛은 주일 아침, 그러나 아주 작은 문제 때문에 발길을 되돌리고 만다. 주차 문제로 다투는 교인(성도라 하기엔 미숙한). 남의 차에 박치기해 놓고서도 메모 한 장 없이 슬쩍 도망가는 사람, 예배 중에 의자 안쪽으로 좀 들어가 달라고 하면 ‘늦게 온 주제에…’라는 듯 인상 팍 쓰는 사람(결국 마지못해 엉거주춤 일어나 그 사람이 좁은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예배 끝날 때까지 옆사람과 소곤대는 사람, 껌 씹는 사람, 팔짱 낀 사람, 다리 꼬고 앉아서 앞좌석에 흙 묻혀 놓는 사람, 예배 잘 드려 놓고 식당 가서는 새치기하는 사람, 옆사람은 찬송가가 없어서 멀뚱하니 서 있는데 같이 보자는 말 한마디 없이 혼자 목청 터져라 찬송 부르는 사람, 상하좌우로 목운동하며 열심히 졸다가 가끔 깨서 “아멘”하는 사람, 말씀은 안 듣고 주보에 낙서만 하는 사람, 다른 책보고 있는 사람, 향수를 들이붓고 왔는지 두통까지 몰고 오는 사람(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는 교회에 향수를 너무 많이 뿌리고 오면 옆사람이 얼마나 고역인지 이 기회에 알리고 싶다). 유아실이 있는데 굳이 자녀를 예배실에 데리고 와서 시끄럽게 만드는 사람, “화장실이 더럽다. 교회 내부가 깨끗하지 않다. 실내가 어둡다. 유아실이 지저분하다. 교회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괜히 혼낸다…” 하면서 불평하는 사람 등등 예를 들자면 끝도 없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간단한 이유에서 시작하여 엄청난 이유들이 쏟아진다. 우리들 평신도의 부주의가 새신자가 교회에 들어선 첫날 발길을 돌리게도 만들고, 첫날 각인된 좋지 못한 첫인상이 그들로 하여금 몇 주일 씩 등록 결정을 미루게도 만든다. 절에 다니는 사람과 교회 다니는 사람이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세상 사람들은 “절에 다니는 사람이 왜 그래!”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그래!”라고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말이다. 은연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막연히 ‘이 교회 교인들은 좋을 것 같다’는 기대를 가지고 찾아온 분들에게 첫날부터 실망을 안겨 주어서야 되겠는가?’
전도를 통해 처음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부터 양육은 시작된다. 어찌 보면 전도보다 더 힘든 것이 양육이다. 열 달의 임신 기간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출산 직후부터 맞닥뜨리게 되는 자녀 문제가 훨씬 더 신경 쓸 일이 많듯이. 잠시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에 한두 번 다니다 그만두는 사람, 잘 다니다가 중간에 엉뚱한 이단으로 빠지는 사람 그나마 자기 혼자 가면 좋겠건만 물귀신 마냥 단체로 사람들을 끌고 나가는 사람 등등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그들을 어찌 그냥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갓난아이를 돌보듯 정성을 다해 그들이 스스로 제 구실을 할 때까지 성심 성의껏 돌봐 주어야 한다. 그게 양육이다. 사실 한두 명 전도할 때는 양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몰랐다. 새로 지은 아파트 입주자들을 전도해서 새신자가 갑자기 늘어났을 때 나는 양육에 대한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인도 할 수 있는 직분자는 단 두 명이었는데 속회는 무려 여섯 속이었다. 인도자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다섯 속을 인도하게 되었다. 새신자는 인도자의 관심이 조금이라도 덜하다 싶으면 교회를 바꾸기도 하고, 아직 미성숙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속회에도 나오지 않았다. 섬기는 교회와 거리가 먼 지역일수록 양육 대책은 더더욱 중요하다. 이 현상은 양적으로 팽창하는 교회가 겪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전도로 인해 양적으로 급성장했을 때 노련하지(?) 못한 인도자에게는 새신자를 양육하는 것이 마치 난생 처음 갓난아기를 다루는 것처럼 힘들 수가 있다. 속회가 급성정할 때 인도자가 부족하여 궁여지책으로 새신자만 모아서 속을 만든 적이 있다. 놀랍게도 새신자끼리 모여 있는 속이 훨씬 믿음도 순수해서 빠르게 신앙이 성장하는 것을 체험했다. 인도자가 새신자만 맡은 경우, 양육을 책임지게 된 사람의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속회 모임의 장소도 돌아가면서 모이는 것에 부담 느끼지 않도록 인도자 집에서만 모인다든가 중간중간 전화 심방, 가정 심방을 통해 새신자의 신앙 생활을 잘 보살펴야 된다.

새신자 속을 인도할 지도자는 속회 장소를 늘 제공할 수 있는 성도로서 베푸는 것과 봉사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성경을 쉽게 가르칠 수 있는 양육자여야 한다. 새신자가 새신자 속회에서 6개월 정도 양육받은 후에 기존 속회에 섞이면 별무리 없이 잘 성장하는 것을 본다. 양육을 책임 맡은 평신도 지도자의 역할과 교회안의 가장 작은 단위인 속회의 바른 양육을 통해서, 새신자의 믿음이 교회 안에서 깊이 뿌리내리고 놀랍게 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도자가 양육까지 책임을 진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전도 잘하는 사람 따로 있고 양육 잘하는 사람 따로 있다. 둘 다 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다행히 현대 사회는 세분화되어 있다. 전도자와 새신자 속회 양육자를 이원화하여 전문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아마 더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신자 입장에서 배려하고 있는가?’이다.

예1> 예배 순서에 따라 새신자 환영을 위해 새신자를 그 자리에 일어서게 한다든지 목사님 앞으로 나오라고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어색하고 생소한 분위기와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것이 쑥스러워서 앞으로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일어서지도 않으려는 사람이 꽤 많이 있다. 그러한 입장을 고려하여 새신자가 누구인지 미리미리 파악해서 예배 후 목사님과 따로 인사를 나누고 기도를 받게 하는 교회도 있다.

예2> 새신자 교육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왔기 때문에 새신자 교육으로 장시간 교회의 지체하기가 곤란한 사람도 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는 집 근처의 양육자가 일대일로 양육을 시키고 문서로 통신 교육을 받게 하는 것도 좋다. 성경, 찬송에 대해 전혀 모르고 주기도문, 사도신경이 무엇인지 모르는 새신자가 눈치껏 1시간 이상을 앉아 있어야 한다. 그들 스스로 깨닫고 터득하여 적응할 때까지의 기간이 새신자에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전도하면서 새삼 느꼈다. 얼마 동안(2주에서 1개월 정도) 새신자를 위한 예배 장소를 따로 마련해 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찬송은 부르기 쉬운 것으로 두 번 정도 반복해서 불러 익숙해지게 하고, 기도는 짧게, 말씀은 쉬운 내용으로, 그리고 시간은 40분 정도로 하여 예배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새신자 예배실에는 성경과 찬송을 비치해 두고 새신자가 궁금해하는 질문에 설문 형식의 답변서를 작성해서 나누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예배 후 30분 정도 성경 신구약 찾는 법, 주기도문, 사도신경,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것, 기도하는 법(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으로 기도를 끝맺어야 하는지), 많이 쓰는 용어(아멘, 할렐루야 등)설명, 그 외에 구원에 대해, 예배, 헌금, 교회 생활 등 새신자 양육에 필요한 것을 교육한다면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새신자 예배, 교육의 총 시간을 대예배 시간과 맞추어서 예배 후 평신도와의 교제 시간을 배려하는 것도 좋겠다.

예3> 신앙이 다른 부모님 몰래 교회에 갔는데 교회에서 집으로 환영 카드나 환영 전화를 해서 곤란을 겪는다던가, 미리 약속도 하지 않고 불쑥 심방을 와서 시부모님과 맞닥뜨려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예4> 너무 무관심해도 곤란하지만 반대로 너무 자주 연락해서 피곤하게 만들어서도 안된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새신자에게 간단한 설문으로 본인의 의사를 묻는 것도 중요하다. (본인이 작성해도 되고 전도자가 작성해서 제출해도 된다.)

눈높이 교육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시대이다. 교회의 새신자반 운영을 오랜 신앙 경력의 직분자들이 계획하는 일이 많다. 그분들 대다수가 모태 신앙이나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하신 분들이라서 ‘어른이 되어서 교회에 처음 찾아온 새신자의 입장’을 얼마나 이해하고 계획하시는지 퍽 궁금하다. 대부분의 교회엔 새신자 담당자가 있다. 환영, 안내 등의 외형적 담당도 중요하다. 그러나 새신자 상담실을 운영하여 새신자가 궁금해하는 질문에 답해 주는 소책자나 신문(p. 23의 보기 참조)을 만들어 나누어준다든가, 수평 이동 신자가 교회를 옮기게 된 개인적인 사정을 듣고 정착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맞아 주는 실질적인 도움도 필요하다. 사도 바울도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라고 말했다. 정말 새신자의 눈으로 보고 배려하십니까?

교회안의 작은 교회

우리는 귀중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전도한다. 그리고 교회 안으로 인도하여 교제를 나누며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훈련하고 교육하여서 주님의 참 제자가 되도록 한다. 그러한 애씀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사도행전 2:46-47의 초대 교회 성도처럼 살아야 한다. ‘믿는 이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회 예배를 드리고 선교회 모임을 가지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회 예배를 드리고 선교회 모임을 가지며 순수한 마음으로 애찬을 나누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사랑의 교제를 행했다. 그러한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 본을 보이는 삶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칭찬하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해 주시는 가운데 교회도 부흥하게 되었다’는 간증이 있어야겠다. 새신자나 수평 이동 교인이 교회에 등록을 해도 속회와 같은 소그룹 모임에 잘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은 뒷문으로 나가 버리는 또 하나는 잃어버린 양이 된다. 출석 교회와 거리가 먼 교인일수록 속회 활성화가 교회 정착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사도행전 말씀대로, 소그룹을 통해 믿음의 사람들이 서로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웃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을 보일 때 전도도 되고 속회도 성장하고 나아가 교회도 성장하게 될 것이다.

속회는 교회 안에 기본이 되는 소그룹 모임으로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교회마다 지역, 연령, 직장 등 교인들의 형편에 따라 작게는 3-4명 많게는 7-8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속회는 일주일에 한 번씩 가정에서 모여 찬양, 기도, 말씀, 헌금 순으로 예배를 드린 후 친교의 시간을 갖고 흩어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 보니 다른 약속이 있으면 빠지기도 하고 인원이 많으면 별일이 없는데도 기분에 따라서 나 하나쯤이야 하고 빼먹기도 한다.

꼭 가야 된다든가 손꼽아 기다려지는 것이 아닌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습관적으로 참석하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속회다. 속회는 말씀의 양식을 나누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와 기도 응답의 체험을 서로 나누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속회 예배 때 인도자가 지난주일 목사님 설교 말씀을 간단히 요약하여 상기시켜 주는 것도 좋다. 통계에 따르면, 설교 후 72시간 내에 95%를 잊어버린다고 하니 말이다. 1부 예배와 2부 친교 시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목적 있는 소중한 시간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친교 과잉증은 절대 금물이다. 속회에 잘 참석하는 교인은 신앙이 빨리 성장하여,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교회를 떠나가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뚜렷한 이유 없이 속회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신앙이 병들어 버리고 소속감의 결여로 교회를 떠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속회는 어린양이 머무는 새신자의 양 우리가 되어야 하고 인도자와 속장은 새신자를 돌보는 목동이 되어야 한다


새신자 양육을 위하여

첫째, 관심을 가져라.
연세가 드신 분들의 말씀이 퍽이나 재미있다. 자녀가 어릴 때는 거리에 나가 보면 어린아이만 눈에 띄고 초등 학교에 들어가면 초등 학생만 눈에 들어온단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중 고등 하교에 들어가면 청소년들만 보이고, 군에 입대하면 세상에 온통 군인들만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건 ‘관심’일 것이다. 교회로 인도한 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고무줄을 늘였다 하듯이 새신자들의 형편과 사정에 맞게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도와야 한다.
둘째, 기도하라.
인도자가 새신자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기도다. 기도를 통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양육에 성공하려면 기도가 최우선의 일이고, 최선의 방법이다. 새신자의 가족 구성원들 이름을 모두 적어 놓고, 그 가정의 기도 제목을 기록해 두고 매일 기도해야 한다.
셋째, 성서적으로 양육하라.
교육에는 교과서가 필요하다. 신앙 교육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이상의 교과서는 없다. 교과서를 읽어보지 않고 가르치는 교사는 없을 것이다. 인도자가 꾸준히 성경을 읽어 두어 문제가 생길 때, 도움이 필요할 때 말씀으로 권면하고 말씀에서 얻은 지혜를 따라 행한다면 멋진 양육이 될 것이다.
넷째, 신앙 생활의 본을 보여라.

새신자는 속도원(구역 식구)의 신앙을 닮고 속도원은 인도자의 신앙을 닮게 되어 있다. 사람은 눈에 보는 것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게 된다. 본을 보이지 못하면 그 인도자를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고 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옳고 바르게 사는 것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평신도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참된 모습이다.

교회를 옮기고 싶어하는 사람들

지금은 서비스 시대이고 소비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기업은 소비자로부터 외면 당할 수밖에 없다. 어느 기업이든 성공하기를 바랄 것이다. 기업이 소비자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특히 문제점을 해결해 주지 못하면 성장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고객을 놓치면 영원히 놓치는 것이다. 교회가 기업과 같아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건 파는 기업도 이렇게 치밀하게 계획하고 투자하는데 하물며 귀중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가 기업가의 노력에도 못 미쳐서야 되겠는가? 교회 안에는 다양한 달란트를 소유하고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많이 있다. 목회자와 합심하여 새신자가 마음 평하게 안정감을 갖고 교회 안에서 믿음의 자녀로 정착할 수 있도록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갖고 기존 교인의 문제점을 고쳐 나가야겠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전도하면서 교회마다 매주일 새신자가 등록해도 도무지 교인이 늘어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만난 전도 대상자의 90%는 한번 이상 교회에 가 보았거나 다양한 이유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었다.
첫째, 교인들에게 실망해서.
둘째, 부모님은 신앙 생활에 열심이시나 가정 사역을 잘 감당하지 못해서.
셋째, 과거에 다녔던 교회 학교에서 신앙이 성장하지 못해서.
한국 교회는 아직도 “양 잃고 양 우리 안 고친다”로 버티고 있다. 늘어나는 숫자에만 관심을 감고 빠져나가는 숫자에는 무뎌져 버린 우리들.

교인들에게 실망한 이유

▶신용이 없다.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다. 시간이나 약속한 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세상 법에 어긋난 일을 한다.
(뇌물을 좋아한다. 비리를 저지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작게는 공동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 자기 사업을 위해 교인들을 이용한다.
(판촉 사원, 보험 사원 등으로 끌어들인다. 다단계판매에 교인을 이용한다.)
▶믿음과 행동이 다르다.
(사랑해야 한다면서 부모 형제 흉을 보고 미워한다)
▶개인적인 비밀을 누설한다.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이유로 공공연히 여러 사람에게 비밀을 말하고 다닌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비방한다.
(타종교에 대해, 타교인들의 행동이 나 타교회에 대해)
▶목사님 앞에서는 순종하는 척하다가 돌아서서 목사님을 비방하는 직분자 들이 있다.
▶목사님 눈 도장만 찍으려고 한다.
(목사님께서 참석하시는 예배나 모임에는 꼬박꼬박 참여하여 순종하는 척하면서 성도들간의 예배나 모임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는 비협조적인 직분자들이 있다.)
▶인색하고 욕심이 많다.
(어려운 이웃을 도울 줄 모른다. 무엇이든지 먼저 가지려고 한다. 절대로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먼저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
(초신자는 뒷전이고 직분을 세상 직위처럼 생각한다.)
▶직분자들이 기도 생활, 말씀 생활을 제대로 못하면서 말로만 양 떼를 지도하려고 한다.
▶직분자들이 한심한 행동을 한다.
(점을 치러 다니거나 궁합을 본다. 속회 예배 후에 화투를 친다. 사생활이 문란하다.)
▶헌금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
(속회, 선교회 헌금을 목적과 다르게 사용한다. 선교를 목적으로 내세워 물건을 사도록 강요한다.)
▶기독교인이 직장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교사가 촌지를 요구해서 학부모를 괴롭힌다. 사장이 인색하며, 직장 상사가 까다롭게 하며, 동요가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다.)

부모의 이중적 신앙 태도

▶집안의 경조사에 교회 일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아서 친척들의 원망을 듣는다.
▶헌금은 많이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지 않는다.
▶새벽 예배, 철야 예배에 참석한 후 피곤하다며 늦게 까지 자고 집안일을 제대로 해놓지 않는다.
▶교회 일 때문에 식사 준비가 안되어 있어서 자녀들이 종종 빵이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평소에는 기도나 성경을 읽는 모습을 잘 보이지 않다가 어려움을 당할때만 기도한다.
▶교회나 목회자에 대해 늘 불평 불만을 말한다.
▶자녀들과 한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행동은 없이 늘 말만 앞세운다.
▶주일 안 지키고 여행을 자주 간다.
▶고 3때나 시험 때는 교회에 안 가도 된다고 가르친다.
▶교회를 자주 옮긴다.
▶십일조 헌금이 들쭉날쭉하며, 설교 시간에 졸고 예배 시간에 지각하고 축도도 마치기 전에 교회 문을 나선다.

신앙의 성장이 없는 교회 학교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교회 안에서 이끌 때, 오른손으로는 잡아당기면서 왼손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밀어내고 있다. 교회를 옮기고 싶어하는 분들의 신앙이 연약해질 때, 사탄은 그 틈을 노린다. 물론 원인 제공을 교회에서 할 때도 있다.
▶구원받은 지 얼마 안됐는데 직분을 너무 일찍 맡겨서 감당치 못하고 떠나는 경우.
▶처음 직분을 맡은 사람에게 여러 종류의 사역을 맡겨서 어느것 하나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낙심케 되는 경우.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아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교회에 10년 정도 다닌 사람들이 부딪히는 문제다.)
▶일꾼이 부족한 개척 교회 시절에는 열심히 헌신해서 교회 안에서 인정받았으나 교회가 부흥하고 일꾼이 많아진 요즘에는 교회 일이나 교인 사이에 자꾸 시험 드는 일이 생겨나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달라고 곧잘 기도한다. 그러면서도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이 나에게 닥치는 것을 싫어한다. 다행히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분이다. 가정적인 시련을 겪는 것보다 교회 안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이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감사하고 인내하며 기도할 때 반드시 축복이 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나의 의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분함과 성냄과 불평이 마음속에 슬그머니 자리잡으려고 할 때 ‘주님은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 생각해 본다. 분명히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에 대한 시험이거나 사탄의 유혹, 이 둘 중에 하나다. 기도하며 인내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 보따리를 싸가지고 다른 교회로 가면, 여전히 문제의 보따리는 그 교회에도 도사리고 있다. 설사 그 문제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문제의 보따리가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는 두 개의 보따리를 싸 들고 다른 교회로 옮겨간다. 그러나 문제의 보따리는 점점 커지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결국 떠도는 교인이 되고 만다.

많은 교인들이 주일은 교회에 설교를 들으러 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교인은 느지막이 교회에 가서 설교만 듣고 축도도 끝나기 전에 교회 문을 나선다. 주일 예배에서 설교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설교를 듣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다. 흔히 “예배 보러 간다”는 말을 한다. 연극을 관람하러 가는 것처럼 구경하러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순종을 찬양과 경배로 나타내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드리러 간다’고 표현해야 한다.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데 지각하고, 아무 옷이나 입고 가고, 팔짱을 끼거나 다리 꼬고 앉아서 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 아닌가!

이처럼 나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 내게 주신 지난 일주일의 삶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나를 사랑하신 그 귀한 사랑을 고백하며, 아버지를 향한 찬양을 드리고, 아버지께 기도 드리고, 아버지를 위해 구별된 헌금을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설교 말씀에 대해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떼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이 말씀이 우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한다”(살전 2:13)고 하셨다 이 말씀을 믿어야 한다.

언젠가 전교인 수련회 때 강사로 초빙되어 오신 목사님의 간증이 생각난다. 미국에서 훌륭한 목회를 하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분이었다. 그 목사님이 안수를 받고 처음으로 목회를 시작할 때, 목사님 설교가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젊은 교인들은 목사를 딴 분으로 바꾸자는 극약 처방을 내놓기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일부 교인들은 다른 교회로 옮겨가기도 했다. 그러나 기도하시는 몇몇 분들이 모여 목사님 모르게 매일 목사님을 위해 철야 기도를 했다. 그 후 목사님은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회개한 후 교인과 하나가 되어 기도했다. 그러자 점점 설교 말씀이 성령 충만하여져서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게 되고 교회는 날로 부흥 성장하여 오늘날과 같이 훌륭한 한인 교회, 좋은 목회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툭 하면 목사님을 신발 갈아 신 듯 쉽게 바꾸는 교회가 있다. 또 교회가 무슨 무 잘리듯 반으로 갈라져 나가는 것도 본다. 이상하게도 그런 교회는 부흥이 안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 같다. 좋은 교회, 좋은 목회자는 좋은 교인들 때문에 생겨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한국사람은 모임을 유난히 좋아한다. 출신 학교에 따라, 고향에 따라, 성씨에 따라, 운동 또는 각종 취미에 따라서 갖가지 명칭을 붙여 모임도 많이 갖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 사람들만큼 안 뭉치는 나라도 없다고 한다. 마음에 안 들면 서로 싸우고 흉보고 갈라서서는 또다른 모임을 만들고…, 갈라짐으로써 파생되는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비단 이사가 잦은 도시에서만 생기는 현상이 아니다. 고질적인 한국 병이다. 참을성이 없고, 잘 적응하지 못하고,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를 잘하고, 절대로 양보하지도 손해보지도 않겠다는 기질 때문이리라.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지 않고 믿음 가운데 성장하지 못하면 이것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기에 양육을 그만큼 강조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갈라져 나가는 데 앞장서고, 교회나 목사님을 대적하는 데 앞장서는 사람들은 평신도가 아니라 직분을 맡은 평신도 지도자들이다. 평신도 지도자에 대한 양육도 절실히 필요한 때다. 어떤 이들은 늘 불평 불만이 가득 차 있다. 지옥 가는 자격증(?)을 확실하게 따 둔 사람은, 불평 불만이 가득 차 외진 곳에 숨어 수근거리는 자들이라고 성경은 이른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민족이 왜 사십 년이란 긴 세월 동안 광야를 방황하며 지냈는가? 그들은 없으면 없다고 불평했고, 있으면 지겹고 싫증이 나서 불만을 토해 냈다. 끄떡하면 위대한 지도자 모세 앞에 우르르 몰려 나가 따져 묻곤 했다. 요즘 말로, 데모의 선구자들인 듯싶다. 그들은 그 불평 불만 때문에 뱀에 물려 죽기도 하고, 땅이 갈라져 산채로 생매장되는 등 수없이 떼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 결과는 생각보다 참혹했다. 결국 끝까지 순종하고 긍정적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한 이십 세가 넘는 사람들은 아무도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불평 불만이 그들의 삶을 파멸로 이끈 것이다.

그뿐인가. 이처럼 앞장서서 불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앞에서는 순종하는 척하고 뒤에서는 불평 불만을 일삼아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이중 인격자들도 많다. 정 하기 싫으면 혼자 슬그머니 빠지면 될 일인데, 꼭 물귀신처럼 주위 사람들을 선동해서 문제를 확대시키곤 한다. 그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직분자들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해서 실족케 할 때도 있다. “작은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메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는 말씀도 있지 않은가. 혹 교회를 위해 좋은 의견이 있다면 충분히 기도한 후에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못해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겸손히 다른 사람 의견을 존중해 주고, 기도의 동역자가 되어 진행되는 일을 돕는 것이 성도로서 취할 가장 현명한 방법이란 생각을 해본다.

때로는 목사님, 전도사님의 평을 성도들 앞에서 나름대로 잘하는 유식한 평론가 직분 자들이 있다. 어쩌다 부모들이 자녀 앞에서 무심코 선생님 평을 할 때가 있다. 선생님이 썩 마음에 안 들어도 훌륭한 선생님 같다고 말한다면 자녀들은 신뢰감을 갖고 학교 생활을 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을 좋지 않은 분으로 말하면, 자녀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게 되고 점점 학교 생활에도 싫증을 내게 될 것이 뻔하다. 성경에도 지도자 모세에 대해 여선지자이며 누이인 미리암이 비방했을 때 하나님께서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들게 하신 일이 나온다. 판단하고 심판하는 권한은 오로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오래 전에 C 목사님의 도자기 속 외화 밀 반출 사건으로 온 기독교계가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그 소식을 뉴스에서 듣고 나도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해서 친정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네가 직접 보았느냐? 직접 보지도 않은 일을 함부로 말하는 것은 사탄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고, 주의 종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노여워하시는 일이다. 만일 목사님이 잘못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테니 다시는 그런 말을 옮기지 말거라. 그렇게 걱정이 되면 기도해라”고 엄명을 내리시는 것 아닌가. 그 일 이후로 목사님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듣고 입방아찧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혹 친구들이 자기 교회에서 목회자로 인한 문제로 의논해 올 땐 꼭 C 목사님의 사건을 말해 주곤 한다. (훗날 C 목사님의 사건은 모함이었음이 밝혀졌다.) 문제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다. 교회 안에서 변화된 참 그리스도인이 있고, 변화되지 못한 교인도 교회에는 있다. 그렇다면 어느 교회나 큰 문제든 작은 문제든 문제는 다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교회를 옮기고 싶어하는 이유는 믿음의 분량에 따라 가지가지다. 작은 문제로 교회를 떠나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고. 크나큰 상처를 안고 좌절감에 빠져서 떠나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다. 혹시 외롭다고 생각될 때나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는 ‘내가 남에게 베푸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는지?’ ‘사람을 만날 때 항상 불평을 늘어놓고 남의 허물을 늘어놓지는 않았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떠나고 싶어하는 교인에게는 절대로 사랑에서 우러나온 권면의 한계를 넘어서는 비난의 말을 한다거나 그런 뜻을 비춰서는 안된다. 다시는 안 만날 사람처럼 비난의 화살을 무차별로 쏘아 대서 더 큰 상처를 입혀서 떠나 보내는 경우를 보게 된다. 너무 큰 상처를 입게 되면 다른 교회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다니는 또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 될 수 있다.

때로는 주의 일에 더 헌신하기 위한 순수한 뜻을 갖고 떠나는 교인도 있다. 믿음의 형제 자매들은 떠나는 교인을 위해, 사랑의 마음을 갖고 그가 더 큰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축복의 기도를 해주어야 한다.
반대로 떠나가야 되는 교인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 해를 입히거나, 믿음이 연약한 교인을 실족케 해서는 안된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라. 혹시 내 신앙의 흔들림으로 목회자와 교회에 대해 불평만 한 것은 아니었는가? 교우간에 불화를 일으켜 놓고 떠나가는 것은 아닌가? 회개할 것은 없는가? 나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더욱이 직분자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떠나가야 될 때는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성급히 행동하지 말고 응답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주님은 결코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어떠한 길이 옳은 결정인지 응답하신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아 하실까 함이라”(딤후 2:24-26).

교회 학교가 변할 때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진다

노벨상 수상자의 30%가 유대인이다. 소수 민족인 유대인이 차별 상황을 극복하고 세계적으로 정치, 경제, 과학, 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정통 유대인 학교는 매일 아침 1시간 동안 기도한 후 오전 내내 종교 교육만 시키고 정규 수업은 오후에 4시간밖에 안 하는데도 이처럼 많은 수재들이 배출된다. 가정에서 성경적 자녀 교육을 철저히 가르치지만 교육열에 있어서도 다른 나라와 구별된 교육 상황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정부 예산 중 가장 큰 국방비와 맞먹는 예산이 교육비라고 한다. 16세까지는 의무 교육이며 18세까지의 모든 교육은 무료다. 교육은 소모가 아니라 투자라는 철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강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 교회도 교회 학교 교육이 투자라는 개념을 갖고 교육하는지 궁금하다. 대부분 열악한 환경인 교회 학교는 교회의 ‘장식품 꽃’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15세 이전에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사실을 볼 때 교회 학교는 실로 중요한 양육의 장임을 잊어선 안되겠다. 오늘날 우리 자녀를 유혹하고 있는 TV, 컴퓨터, 전자 오락 때문에 아이들은 교회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세상인데, 교회 학교에서는 겨우 가마를 타고 다니는 뒤떨어진 교육을 하고 있다. 교사가 부족하고 교회의 지원이 미미하고., 아이들로부터 관심을 잃어 가는 교회 학교가 장차 교회의 앞날을 어둡게 하리라는 것쯤은 삼척 동자도 다 알 것이다.

과거 영국과 미국은 선교 대국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떠한가? 대부분 노인 성도들만이 교회를 지키고 있는 형편이다. 2세를 위한 양육에 신경을 쓰지 못해서 그들 교회가 점점 황폐화되어 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전도와 세계 선교를 위해 힘쓰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교회 학교 교육에 투자하지 않고 신경을 쓰지 못한다면, 앞으로 우리도 영국이나 미국 교회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다행스럽게도 몇몇 교회들이 교회 학교가 거듭나기 위해서 발벗고 나섰고 실제로 교회 학교가 부흥하니 교회도 부흥하기 시작한다는 기쁜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 오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다

유대인은 대학을 갓 졸업한 처녀는 유치원 교사로 고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첫째, 아이들을 길러 본 부모님이 교사로서 가장 적합하다. 둘째 신앙이 돈독하고, 셋째 교육에 대한 경험이 있는 교사 출신이면 최상의 적임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분들은 어떤 사역보다 교회 학교 교사를 최우선으로 지원해야 한다. 집사, 권사, 장로의 직분을 받으신 분은 필수 과정으로 교회 학교 교사를 거치게 하는 교회도 있다. 이런 제도는 교회 학교 교육에 관심을 갖게 하고, 교회의 질적 성장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런 경우 자신에게 가르치는 은사가 없다고 생각된다면 보조 교사로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매년 교사가 바뀌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할 점이다. 교사가 바뀔 때마다 출석률이 떨어지기도 하고 교사의 책임감도 떨어지게 된다. 어떤 교회는 교사가 학생을 6년 동안 계속 책임지고 가르치기도 한다는데, 적어도 교사가 2년 정도 같은 학생들을 맡는다면 책임감도 생기고 학생들도 안정감을 갖게 될 것이다. 가능하면 영아 때부터 ‘신앙 생활 기록 카드’를 작성하여 매년 두 차례씩 개인 상담 시간을 갖고 구원의 확신을 점검하면서 청장년부 까지 양육을 이어 나간다면, 그 카드는 훌륭한 양육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교육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한다

복음 중심으로 접촉점을 가질 수 있는 교회 교육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한다. 획일적인 교육이 아니라 어린이 개인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학생들은 음악, 미술, 체육, 글쓰기, 말하기 등 제각기 관심 분야가 다르다. 관심이 없는 분야는 정말 지루해 한다.

과거에는 교사의 설명과 주입식 교육으로 심심하고 고리타분하고 지루해도 할 수 없이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 교육에도 개선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설교 말씀을 들은 후 각 분야에 따라 이 말씀이 적용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학생들을 원하는 반으로 나눈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은 찬양반으로 가서 믿음과 신앙인의 용기 있는 삶에 대한 찬양을 부른다. 미술 그리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은 만화나 그림으로 다윗과 골리앗을 표현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은 느낀 점을 글로 표현해 본다. 말하기를 좋아한다면 동화 구연을 시켜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설교 말씀을 통해서 각자 마음에 와 닿은 신앙을 나름대로 고백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게 한다. 설교 말씀은 전체적으로 듣고 학년별로 각 활동 분야를 나눈다. 이럴 경우 교사가 부족하게 되므로 저학년과 고학년(1-3학년, 4-6학년) 두 그룹으로 나눌 수도 있다.

이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달란트를 활용해야 하며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교회가 적극적으로 재정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장기적으로 볼 때 대형 교회들이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재정이 부족한 농어촌 교회 학교를 적극 돕는 일도 귀한 국내 선교 사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활동이 끝난 후에는 실제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결단과 산앙인으로서의 정직한 생활 자세, 습관들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참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한다. 1년 후에는 특별한 훈련과 연습 없이도 그 동안 닦아 온 실력을 각 분야별고 발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정과 연결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영아부는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교사의 숫자가 많아야 한다. 5세 미만의 양아부나 유아부는 어머니와 함께 어린이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영아부는 어머니와 떨어지는 것을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자녀와 함께 예배 드리기를 원하는 분들만 따로 모아 운영하면 좋다.
요즘 신세대 부모들은 자녀가 선택하는 교회를 다니는 경향이 많다. 자녀가 교회 학교를 싫어하면 금방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는 교회 학교가 성장하는 교회가 성장하게 될 것이다. 말로는 교회 학교의 중요성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어른들을 위한 대중 목회가 성공한 목회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하루 빨리 바뀌어야 한다.

청소년들의 건전한 활동 공간을 교회가 마련해 주어야 한다

청소년들은 갈 곳이 없다고 말한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락실, 편의점, 만화방, 노래방 등에 가는 것이 전부다. 마땅히 할 것도 없고, 마음껏 뛰어 놀 공간도 없다. 그들 주변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 교회다. 많은 교회들이 교회에서 도서실이나 공부방, 야학을 운영하고 있다. 교회 마당이나 체육관에서 마음껏 운동할 수 있고, 함께 모여 악기를 연주하고, 비디오를 상영한 후 토론하고, 드라마 예배, 찬양 예배, 영어 성경반 등을 통해 취미 생활과 신앙 생활을 병행해서 지도해 주기도 한다.
최근에 기독교 중 고등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주일에 과외나 보충 수업을 하면 학습 능률이 올라가느냐는 질문에 72%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오히려 학생들은 “휴식을 통해 재충전할 수 있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정신적인 갈등과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불안한 미래를 주님께 맡겨 자신감을 갖고 학업에 정진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시간은 양적 개념으로는 분명히 시간을 빼앗긴 것이지만 질적인 면에서 볼 때는 그렇다고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집중력과 지혜를 가지고 주어진 시간 동안 몇 배의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명문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대학도 청교도들이 자녀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성경 학교였다. 우리 나라에도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중 고등 학교들이 많이 있다. 기독교 교육 목표에 맞게 말씀과 찬송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며. 3년 동안 성경 66권을 통독하는 미션 스쿨도 있다. 아침 일찍 학생 기도실에서 기도를 드리고 교실로 향하는 학생도 있다. 학생들의 신앙 수련회, 예배 시간, 경배와 찬양 시간에 함께 참여하고, 대다수의 학생들이 학습 세례에 참여하도록 적극적인 신앙 양육을 한다. 교목실이 활발히 움직이는 학교는 신앙 상담, 인생 상담을 해주고 영어 성경 공부, 성가, 성경 공부 등의 그룹 활동을 이끌어 주며 거리 청소, 고아원․양로원 방문, 여름 농어촌 봉사 활동 등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지도한다.

그러나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많은 중 고등 학교의 학생들이 성경 시간이 딱딱하고 지루하며 주입식 교육이라고 불평한다. 제단 이사회나 교장 선생님, 교목님들이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예배시간과 성경 시간으로 기독교 교육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변화가 필요하다. 바른 신앙 교육으로 알려진 다른 기독교 학교의 교육 방침도 도입해 보고, 기독교 영화를 보여 주거나 시청각 교재를 사용하여 토론이 장을 마련해 보는 적극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또한 신앙 교육에 있어서 절호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개별 설문지를 통해 신앙 생활 상태를 점검하여 일대일 상담과 지속적인 신앙 지도를 해야 한다. 기독교 대학은 기독교 고등 학교에 비해 신앙 교육이 풀어져 있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예배와 기독교 개론 강의를 듣는 정도다.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대학 안에는 소위 이단들이 판을 치고 있다. 이상한 종교 서클을 만들어서 장학금을 대 주면서 우리의 자녀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어가서 엉뚱한 곳으로 빠졌다고 펄펄 뛰는 부모를 많이 보이 보아 왔다.

대학, 청년부가 활발히 움직여야 된다. 따라서 지역 교회는 주변 대학을 연결해서 적극적으로 학원 복음화에도 힘써야 한다. 청년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농어촌 봉사 활동, 도시 빈민 선교, 성경 공부, 찬양, 영성 개발 훈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된다. 기독교인의 자녀 25%는 어디에 있을까? 대학들이 몰려 있는 신촌(더구나 기독교 대학들이 많은 곳이다)을 변화시켜야 된다고 요즘 교회가 앞장섰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기독교 대학이 변화되어야 한다. 감사하게도 철저한 기독교 교육으로 사회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미래의 평신도 지도자를 배출하려는 목적으로 한동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모든 교수가 기독교인이고, 매일 아침 학생들이 한 시간씩의 예배로 하루를 시작한다니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인가! 지속적인 교회 학교가 성장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성장하는 비전을 가져 본다.

교회 학교 교사 일은 보람되지만 힘들 때도 있다. 50년 가까이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가 있었다. 대통령이 그에게 체신 장관을 맡아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주일 성수와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보장해 주신다면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의 백화점 왕 ‘위너 메이커’ 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그는 1달러 50센트짜리 성경을 월부로 사서 읽었다. 성경은 그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그는 평생을 교회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봉사하며 복받는 삶을 살았다.

가장 훌륭한 양육자, 부모 얼굴은 모르지만 어떤 교인이 아들 문제로 상담을 하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 왔다. 부부 모두 기독교 대학을 나왔으며 경제력도 있고 가정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는데 아들이 자꾸 딴 길로 빠진다고 했다. 고등 학교 때까지만 해도 공부를 썩 잘해서 늘 집안의 자랑 거리였으며, 소위 일류 대학이라고 하는 학교에 당당하게 합격한 수재 아들이 말이다.

그들 부부는 젊어서는 주말마다 여행 다니고 취미 생활을 하느라 교회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전혀 다닐 맘을 먹지 못했단다. 교회 학교를 다니던 아들도 중학교 때부터는 일요일이면 과외를 시키느라 교회 가는 아이를 강제로 붙잡았다고 털어놓았다. 지금 아들은 대학교 2학년인데, 선배들의 권유로 어떤 동아리에 들어가고부터는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단다. 부모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던 아들이 어느 날 인가부터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안되겠다 싶어 전화를 걸었단다.

그토록 침이 마르게 자랑했던 효자가 하루아침에 불효자가 된 것이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러서야 정신이 퍼뜩 나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단다. 몇 달밖에 안되었지만 용기를 내서 아들에게 교회에 나가자고 했더니, 아들이 “엄마는 옛날에 그렇게 다니고 싶어할 때는 못 다니게 하시더니 이제는 무슨 변덕이 나서 교회에 다니라는 거죠?”라며 대들었다는 것이다. 하소연을 들은 뒤에,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고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처럼 참고 기도해 보라고 권했다. 농사 중에 자식 농사가 제일 힘들다고 했던가. 나를 닮아 나온 자식인데 내 마음대로 되겠지 싶지만, 자녀 교육은 그게 아니다. 행동으로 몸소 본을 보여야만 한다. 그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다. 세 살 버릇은 어떻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가? 어른은 아이들의 거울이다.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배우며 그대로 자라난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좋은 본을 보이며 자연스럽게 신앙 교육을 시킬 때, 그 밑에서 훌륭한 자녀가 길러지는 것이다. 학교, 사회, 교회, 나라 구석구석이 문제 아닌 곳이 없다. 일차적으로 가정이 문제가 없어야 된다. 물질로만 부모의 의무를 다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점점 사회적으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교회 아이들만 해도 그렇다. 자신의 신앙 생활에 부모의 모습이 도움이 된다는 아이들보다는 부모의 위선적인 모습 때문에 교회 가기를 거부하는 세대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걱정이다. 본이 되기는커녕 삐뚤어진 신앙관을 심어 주어서야 되겠는가?

교회를 자주 옮겨 다니는 부모 때문에 마음 터놓고 지낼 믿음의 친구도 사귀기 어려워지고, 자연히 교회에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없도록 만든다. 일주일 내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과외 공부로 스트레스를 받고 심신이 지쳐 있는 우리 아이들. 그러나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주일날, 교회에 조금만 오래 있으면 성적에 큰 지장을 받고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다. 자연히 자녀들에게 불안한 감정을 심어 주게 된다.

나에게 집안 형편이 아주 어려운 친척이 있다. 형편은 어렵지만 누구보다도 신앙으론 부요한 집이다. 주일날은 교회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3 때도 주일이면 아친 일찍부터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고 저녁때까지 봉사를 했었다. 평소보다 훨씬 좋은 수능 성적을 얻어서 금년에 연세 대학교에 단과 대학 수석으로 장학생이 되었다. 고3 때는 교회를 안 가도 된다는 부모는 자녀가 어떤 결과를 얻게 될지 궁금하다.
요즘은 봉사도 점수에 들어간다니까 너나없이 봉사할 곳을 찾는단다. 자녀 대신 봉사하고 점수를 받아 가려는 기가 막힐 정도로 머리를 쓰는 한심한 부모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온갖 핑계를 대 가며 봉사하기를 거부하는 이런 얌체 부모 때문에 자녀는 공짜만 바라는 사람이 되기 쉽다. 반대로, 교회 일에는 발 벗고 나서면서 집안 친척들 경조사에는 교회 일을 핑계로 번번이 빠져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것을 보고자란 자녀는 무슨 일이건 교회 핑계를 대는 사람이 된다.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않거나 세끼 식사도 챙기지 못하면서 새벽 기도와 철야 예배에는 열심히 라면, 또 교회 일 때문에 피곤하다면서 늦게까지 잠자고 집안은 엉망이라면 그 자녀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교회 일이 바빠서 어린 자녀들끼리 하루 종일 집을 지키며, 주일날은 종종 빵이나 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한다면 자녀들 입장에서 볼 때 주일은 축복의 날이 아니라 서글픈 날이 되는 것이다. 주일날은 정성이 깃든 특별 음식을 준비해 보라. 믿음이 없는 자녀와 남편도 달라질 것이다. 주일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하루 종일 얼굴 마주 대할 사이도 없이 각자 바쁘게 지낸다면 진정한 안식으로써 주일을 잘 지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교회 중심으로 주일날 모든 교회 행사가 몰려 있는 것도 문제다. 될 수 있으면 주일에 활동 부서를 한 가지만 맡겨서 가족과도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겠다. 여성도들을 위해서 평일 낮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는 교회 행사나 교육이 이루어져야겠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여직분자나 가족이 믿지 않는 여성도를 위해 낮에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직장에 다니는 직분자들을 위해 저녁에 2부로 수요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다. 자녀들이 복 받는 삶과 거리가 멀어지도록 만들려면 십일조나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다고 헌금은 많이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지 않는다면, 부모의 인색함을 보며 자녀들은 실망하고 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색한 사람으로 자라기 쉽다. 예배 시간에 지각하고 축도도 마치기 전에 교회 문을 나서고 설교 시간에는 조는 일이 다반사인 부모를 보면서 도대체 부모님이 왜 교회를 다니시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하는 자녀도 있다.
예배가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계속 시계만 들여다보며 짜증을 부리는 부모에게서 자녀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평소 기도하는 모습이나 성경 읽는 모습을 잘 보이지 않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나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만 기도하는 것은 자녀에게 기복적인 신앙을 물려줄 수 있다. 지도하는 선생님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며, 자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친구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자녀들 앞에서 목회자에 대한 불평 불만과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목회자와 교회에 대한 불신을 심어 주는 결과를 가져다준다. 자녀들과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말로만 사랑을 강조하는 부모는 사랑의 실천이 행동으로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자녀가 이기적으로 된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공경하지 못하는 부모라면 자녀로부터 공경 받으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른손으로 벌을 주었으며 왼손으로 껴안아 주라”는 유대인 속담이 있다. 그렇다. 벌과 사랑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결혼 전에는 장점만 보이는 안경을 쓰게 되고 결혼 후에는 단점만 보이는 안경을 쓰게 된다는 말이 있다. 신앙인의 가정은 장점만 보는 안경을 써야 한다. 입술의 30초가 가슴의 30년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부부가 서로 위로자와 격려자가 되어야 한다. 요즘은 ‘명퇴, 조퇴’로 인해 고개 숙인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부부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감한다면 자녀도 그러한 부모님의 신앙을 통해 안정감 갖게 될 것이다. 양육에 대한 대가를 받으려는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부모님께 받은 양육에 감사하며 자기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이 두 분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돕고 사랑을 나누며, 하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살 때 부모는 자녀로부터 존경과 효도를 받게 된다. 신앙의 유산을 올바로 물려준다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복된 자녀가 될 것이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 아닌가!
IQ(지능 지수)보다 EQ(감성 지수)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시대이다. IQ가 발달된 사람은 그 IQ를 자신의 영욕만을 위해 사용하기 때문에 IQ 위주의 교육은 인간 관계를 그르칠 수 있다. 그러나 EQ가 발달된 사람은 사회에 유익을 주고 인간 관계를 좋게 만든다. 성경 말씀대로 양육하는 것이 곧 EQ를 높이는 지름길이다. 또 IQ는 유전적인 반면에 EQ는 80% 이상이 교육 등 후천적인 노력으로 좌우된다고 한다.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 이라는 말이 있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열두 아들을 위해 축복 기도한 내용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번성하게 되었다. 기독교 가정의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 축복권을 지닌 강한 위치에 있다.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며, 아버지가 신앙으로 집안을 인도해 나갈 때 사회도 올바로 유지된다.

디모데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거짓 없는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유대인은 어머니의 신앙 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이다. 수직 전도와 수평 전도가 있다. 자녀를 말씀으로 바르게 양육하는 것은 수직 전도이며 이웃 사랑은 수평 전도이다. 또한 이것은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다. 때로는 자녀 때문에 감히 주님의 일을 못하겠다는 분도 많이 보아 왔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초등 학생이기 때문에, 고3이라서, 결혼 때문에, 손주를 봐 줘야 해서 등등 이유도 가지가지다. 문제가 해결되면 하겠다던 그들은 결국 자녀 문제 때문에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평신도 지도자의 필요 충분 조건

1 . 부르심에 순종하자

우리는 공주병, 왕자병이 유행인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교회 안에도 새해에 직분을 맡기려고 하면 갑자기 모세병이 유행한다. 바로 “못해요”병이다. 못한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 교역자의 혈압을 올려 드리는 기특한(?)분들도 많다. “나는 못해요(출애굽기에서 참 많이도 듣던 대목이다). 기도도 잘 못하고 성경 말씀도 잘 몰라요 내가 그런 일을 맡았다고 하면 아마 다 웃을 거예요,” 사양의 이유도 여러 가지다. 이쯤에서 끝나 일절만 하면 미덕이라고 봐 주겠지만 더 이상의 사양은 금물이다.

어떤 사람은 “직분을 맡기면 교회를 옮기겠어요”라는 협박성 발언도 서슴없이 한다. 겸허하게 맡겨진 직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축복된 일이다. 과거에 잘못 생각했던 신앙 생활을 반성하고 이제부터 순종하고 잘 따라가면 그야말로 삶이 바뀌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신다. 그 부르심에 그저 “네”하면 되는 것이다. 조금 품위(?)를 살리고 싶다면, “잘 감당할지는 모르겠지만 순종하는 태도를 배우라는 말씀으로 알고 한 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하고 고상하게 나가면 합격이다.

지도자에게는 단점보다 장점을 발견하려는 시각이 필요하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나에게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은 주님의 일을 감당하려는 지도자들이 손해보는 계획은 안 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주님은 결국에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다. 그렇게 믿고 행할 때 우리의 부족한 점을 떼어 버리고 우리를 성숙하게 하시는 멋진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인과 응보인가. 불효자는 나중에 부모가 되면 꼭 자기를 닮은 불효자를 낳아 자신의 불효를 스스로 깨달아 반성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네가 부모 되어 알아보리라”는 유행가 가사까지 나오지 않았나 싶다. 교회 안에서의 지도자의 위치도 마찬가지다. 초신자 때 속을 썩이면 나중에 지도자가 되었을 때 꼭 속을 썩이는 초신자를 만나게 된다. 불평을 많이 했으면 꼭 자기처럼 불평 불만이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제서야 자기가 지도자에 대해 얼마나 잘못을 많이 했는지 깨닫게 된다. 피도 한 방울 안 섞인 남인데, 자신과 꼭 닮은 초신자를 만나다니!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다 기억하고 계심이 분명하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 이삭과 같은 순종, 야곱과 같은 끈질긴 기도, 요셉과 같은 온유한 성품, 그리고 모세와 같은 지도력을 발휘하는 이상적인 지도자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바로 신앙인의 가장 큰바람이자 꿈이다.

평신도 지도자로서 적어도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신앙인들을 목표로 기도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손해보시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좋은 지도자가 되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실 줄로 믿는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데,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 좋은 분을 따라다니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이 자라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때로는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들들 볶는 지도자들도 있다. 깨도 적당히 볶아야 제 맛이 난다. 그와는 반대로, 좋은 게 좋다고 무조건 허허 실실해서도 안된다. 오든지 말든지 그냥 내버려두는 지도자를 만나면 그 당시는 편하고 좋은 것 같아도 세월이 흐르고 보면 자신의 신앙이 한 발자국의 전진도 없이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음에 후회하게 된다. 먼 훗날 양육을 잘 받고 믿음이 성숙하게 자란 성도들에게 “나는 그때 ㅇㅇ교회, ㅇㅇ목사님, ㅇㅇ성도 때문에 이렇게 신앙이 성장하게 되었다”고 기억될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2 . 보고서는 기도로 제출한다

직장에서 어떤 일에 대해 책임이 맡겨지면, 계획서를 제출하고 일의 진행 과정을 중간 중간 보고하게 된다. 일의 결과에 대해서도 반드시 결과 보고서가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선 매일 매순간 맡겨진 일에 대해 계획서도 제출하고 중간 보고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 세상일과는 다르다.

우리가 힘들어할까 봐 글로 보고하지 말고 그냥 말로 하라고 편의를 봐 주시니 얼마나 자상하신 분인가! 그 방법이 다름 아닌 기도다. 기도로 계획서를 제출하고 중간 보고도 기도로 하며, 매사 모든 것을 기도로 하나님과 의논하며 일을 진행시켜야 한다. 염려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는 대장 되시는 하나님께 모두 떠맡기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다. 문제를 겪고 있을 때, 기도를 통해 문제 해결을 받지 못하면 절대로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기도는 그날의 생활을 여는 열쇠이고 그날을 닫는 자물쇠이어야 한다”는 말과 같이, 주님께 기도로 맡기면 그 안에서 저절로 길이 열림을 체험케 될 것이다. 기도하면 물에 젖은 솜덩어리 같았던 문제가 솜사탕보다 더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 한 발짝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갔다는 사실과 주님이 내 짐을 모두 대신 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고,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5-7)


3 . 말씀 충만한 생활

물건을 구입하면 사용 설명서와 주의 사항이 있다. 자세히 읽어 본 후에 사용하면 별 문제가 없는데, 적당히 아는 지식으로 설명서를 무시한 채 사용하면 꼭 탈이 생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경 말씀은 꼭 필요한 지침서이다. 지침서가 되는 그 귀한 말씀이 있는데도 이 정도면 되겠지 하면서 접어 둔 채로 버티고 있지는 않은가? 외국어로 써 있는 것도 아닌데 어렵다는 이유로 두리뭉실 넘어가지는 않는가?
신앙 생활을 해도 매일매일 성경을 충실히 읽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러나 양 떼를 인도하려면 말씀에 충실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는 속회 예배를 충실히 인도할 수 없는 것이다.
유명한 부흥사 무디는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그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자세히 물어보면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다면 하나님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한다. 그들은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이다. 성경을 통해 그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말씀을 적당히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적당히 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 들도 하나님은 다 안다. 심지어 점쟁이들조차 하나님을 알고 있다.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 한다. "주 예수를 알라"가 아니라, 분명히 "주 예수를 믿으라"가 아니라 분명히 "주 예수를 믿으라"(행16:31)고 하신 이유를 곰곰이 되새겨야 하리라.

말씀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몸담고 있는 교회 목사님께 교육받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올바른 일이다. 어머니가 정성을 담아서 해주시는 음식보다 군것질을 좋아하는 자녀들도 있다. 그런 자녀들은 불량 식품으로 고생하며, 편식 때문에 발육에도 문제가 생기게 된다. 분명한 것은 구원의 확신을 갖고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모두 구원받는다는 사실이다. 미혹하는 자들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교묘히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한다. 그렇지만 끝이 다른 것이 이단(異 : 다를 이, 端 : 끝 단)이다. 영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한 번 잘못 발을 들이면 99% 빠져 나오기 힘들다. 분명히 대문에 교패가 붙어 있는데도 찾아와서 “귀한 성경 말씀을 함께 나누자”고 유혹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이단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 3:9-10). 얼마나 좋은 시대인가, 아무 때나 말씀을 듣고 싶으면 극동 방송이나 기독교 방송을 들으면 되고, 직접 눈으로 보고 싶으면 기독교 TV방송으로, 글로 읽고 싶으면 「국민 일보」,「기독교 타임즈」,「빛과 소금」,「신앙계」등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훌륭한 목사님의 설교와 찬양, 간증을 실컷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4. 하나님 우선 순위의 신앙

우리는 “하나님 우선 순위의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을 수 없이 들어왔다. 이 말을 고지식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자신의 본분은 제쳐두고 교회 일에만 뛰어드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된다. 그렇게 해선 안된다. 그러면 사람들로부터 인정은 커녕 손가락질만 받을 뿐이다. 흔히 게으른 사람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은 맞는 것 같다. 적어도 주부가 저녁 예배에 참석하려면 미리 저녁 식사를 준비해서 자녀들은 다 먹이고 아직 안 들어온 식구들을 위해 음식을 상위에 차려 놓아야 한다. 그럴 때일수록 반찬에 신경을 써야 함은 물론이다. 사랑이 담긴 짧은 편지를 곁들인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니 부지런해질 수밖에, 게을러질 틈이 없다.
비신자들조차도 예수 믿는 사람은 무언가 달라야 한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예수 믿는 이들의 조그만 잘못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가 더욱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그 또한 아주 귀한 전도가 되니까. 예수를 믿는답시고 잘못 행동하다 보면, 하나님 우선 순위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우선 영광 가리기 신앙이 된다. 그야말로 전도는 못할망정 남이 전도하려는 사람까지 신앙 생활을 못하게 훼방 놓는 격이다.

신앙인은 또한 절제할 줄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의인 노아의 술 취한 모습은(창 9장) 절제의 어려움과 육체의 연약함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술 취하지 말라’는 말은 성경에 써 있어도 ‘술 먹지 말라’는 말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성경을 펼쳐서 보여 주고 싶다. ‘술 먹지 말라’ 보다 더 강하게 표현하신 곳, 바로 잠언 23:29-35이다.

속회 예배 시간을 인도자의 형편에 따라서 이리저리 옮기는 경우를 본다. 어쩌다 한 번은 몰라도 하나님 우선 순위의 신앙을 가르쳐야 될 인도자가 시간을 변경해서는 안된다. 또 공휴일과 겹치면 예배를 한 주일 빼먹는 경우는 있다.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다른 요일로 바꾸어서 예배드리자.
따로따로 각각 맡은 속을 책임지고 예배드리라고 하면 꼭 다른 속도원들과 합쳐서 적당히(?) 예배드리는 인도자도 있다. 그런 속회는 잘 부흥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적당이가 아닌 성심 성의껏 주의 일에 임해야 하리라.

영국의 유명한 성경 주석가 메튜 헨리가 어느 날 소매치기를 당했다. 그는 그날 참으로 감사해서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 “오늘 처음으로 소매치기당한 것이 감사하다. 소매치기는 지갑을 훔쳐갔지만 내 생명과 신앙은 훔쳐가지 못했다. 또한 내가 범죄자가 아닌 피해자가 되었기에 더욱 감사하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범사란 좋은 일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쁜 일도 범사에 속한다. 그래서 좋은 일이 일어날 때도 감사하고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때도 감사해야 한다.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우리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신다. 범사에 감사할 때 감사드리는 중심을 보시고 나쁜 일까지도 결국은 좋게 만드시는 분이다.

정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한다. 감사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바로 감사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요즘 「신바람 건강법」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황수관 박사(권사)도 육신의 건강을 위해 ①과로를 피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할 것 ②식사도 거르지 말 것 ③스트레스를 적절히 해소하며 운동을 생활화할 것을 강조하며, 여기에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며 성경 말씀을 인용했다. 바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인도자는 속회원이 구원의 확신을 갖고 하나님 우선 순위의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잘 이끌어야 한다.


5. 믿음의 동역자와 후계자가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전도를 통해 많은 믿음의 형제 자매를 얻었다.
흔히 세상 말로, 지도자는 외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외로울 수가 없다. 믿음 안에서 일할 때 지도자는 혼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어려움을 겪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를 지지해 주던 바나바가 있었고, 감옥에 투옥되어 고초를 겪을 때에는 함께 투옥되어 찬송과 기도로 격려와 위로를 해주던 실라가 있었다.
디모데는 바울로부터 교훈을 듣고 그 교훈대로 잘 따르고, 바울의 사랑을 받으며 복음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바울의 후계자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모세도 아론과 훌과 같은 동역자,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위대한 믿음의 후계자를 두었다. 그들은 앞장서서 일하는 바울과 모세를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돕는 동역자와 후계자가 없었다면 바울과 모세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부흥과 성장 뒤에는 이렇게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믿음의 동역자들의 주님을 향한 헌신과 충성이 있다. 하나님은 분명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를 갈망하고 계신다. 소명과 책임감을 가지고 늘 기도하며 말씀 충만하여 섬기는 종의 자세로 본이 되는 생활을 한다면 자연스럽게 최고의 양육을 하게 될 것이다. 믿음의 동역자와 후계자가 늘 든든하게 곁에서 함께 해주기에 우리는 주님이 넘치도록 축복해 주시는 충성된 평신도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성숙한 인도자가 되기까지

양들은 반드시 누군가가 푸른 초장으로 데려다 주어야 하고 맑은 시냇가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또 쉴 곳도 마련해 주고 위험한 곳에서 지켜 주어야 하며 맹수가 가까이 못하도록 보호해 주어야 한다.
이런 원리대로 한다면, 직분을 맡았을 때 모든 일을 직접 주님께 기도로 아뢰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리고 교역자와 의논하고 직접 현장에서 뛰는 인도자가 속도원들과 하나가 되어 문제를 해결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이론상으로는 100점이지만 이론보다 어려운 실기 문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 그 조목조목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지속적인 관심과 적절한 도움의 손길을 펴라

인도자가 되면, 속도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관심을 가지고 매일 속도원의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속회 명단을 만들어서 가족 구성원의 이름을 다 적어 놓고 그 가정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면 매일 기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생년월일, 결혼 기념일, 자녀들의 학년 등도 기록해 놓으면 참고될 일이 많다. 특히 세례 유무, 신앙 경력 등의 기록은 좋은 자료가 된다. 혼자 외롭게 사시는 분들을 명절에 찾아 뵙고,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 자녀들 입학이나 졸업 때 축하 카드를 준배해 보라. 좋은 계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속도원이 있다면, 학습과 세례를 받을 때까지 관심을 쏟아야 한다. 또한 속도원의 자녀들이 유아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면 인도자로서 퍽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도자가 늘 공식적인 입장에만 있으면 안된다.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속회 예배와 꼭 필요한 연락을 해야 될 때 겨우 전화를 거는 정도로 ‘임무 완수’ 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런 속회는 성장하지 못하며 인도자와 속도원의 관계가 무미 건조해진다. 가령 교회 행사에 대해 ‘주보에도 광고가 났고 목사님께서 자세히 설명도 해주셨으니 알아서들 참석하겠지’ 하는 인도자가 있다면, 그는 C급 인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인도자와 속장은 늘 긴밀한 동역자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했으니까 이번 교회 행사 때는 속장과 함께 가야지’ 한다든지, ‘이집사가 차가 있으니 전화 연락을 해서 둘이서 가야겠다’고 생각한다면 B급 인도자이다. ‘우리 속도원들 중에 사정이 있어서 주일 날 교회에 못 온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광고를 안 보았던지 목사님의 설명을 못 들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속장에게 연락해서 이왕이면 속도원들이 모두 함께 모여서 가야겠다’ 하면서 속도원들을 챙기는 인도자라면 당연히 A급 인도자라 할 수 있다. 조금 더 신경을 써서 ‘특별 행사이니 끝나고 우리 집에서 오랜만에 간단히 국수라도 끓여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인도자는 А+ 인도자이다. 이렇듯 항상 속도원들과 함께 행동하며 친숙해 있어야만 연락망도 체계적으로 짜여지게 마련이다. 인도자는 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내가 만약 저 사람 입장이었다면’ 또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문제 해결을 해나간다면 속도원들이 쉽게 사랑으로 하나 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인도자가 친한 직분 자들과 어울리느라 속도원에게 소홀할 때가 있다. 인도자는 늘 속도원에게 관심을 갖고 특히 새신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배려해 주어야 한다.


2.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이끌어 주라

인도자는 원맨쇼를 하는 것처럼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아니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전화 연락부터 시작하여 예배드릴 때 사회, 기도, 성경 봉독, 말씀 증거, 헌금 기도, 애찬 기도 등을 혼자 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처음 얼마간을 유능한 인도자처럼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승자박하는 꼴이 되고 만다. 협력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또한 후계자 양성도 하지 못해서 혼자만 힘들 뿐 아무런 소득도 없다. 그런 분들은 무능한 인도자가 됨은 물론 속도원들까지 무능한 교인으로 만들고 만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제일 하기 싫어하는 것이 대표 기도다. 혼자서는 얼마든지 하는데 여러 사람 있는 데서는 도저히 못하겠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대표 기도를 못하겠다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훈련이 안되어서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도자가 기도를 너무 유창(?)하게 하거나 미사여구를 늘어 놓아서기가 질려 해볼 염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히 길게 시간을 늘여서 기도할 만한 밑천(?)도 없고, 잘못하면 망신당한다는 우려 때문에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인도자들은 “그냥 짧게 기도하세요” 혹은 “써서 준비해 와서 읽으셔도 괜찮아요”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성도들에게 대표 기도는 용기가 나지 않는 어려운 일인 듯싶다. 나는 기도문을 짧게 적어서 여러 장 복사를 했다. 모든 속도원에게 나누어주면서 성경책에 아예 붙여 가지고 다니게 했다. 그래서 아무나 지적해도 기도문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물론 보고 읽는 것이니 기도를 못하겠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대로 읽는 기도였으나 점점 한 줄씩 살을 붙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각자 나름대로의 기도를 하게 되었다. 돌아가면서 예배 순서를 나누어 맡게 되니 속회에 대해 소속감도 커지고 인도자의 짐을 나누어지게 되어 일석이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 내용을 하나님에 대한 찬양, 감사, 자복(회개), 중보 기도(타인을 위한 기도), 간구(자신에 대한)의 순서에 맞추어 준비하도록 했다. 아예 잊어버리지 않도록 첫 글자를 따서 ‘찬, 감, 자, 중, 간’을 기억해 외우도록 했더니 더욱 기도를 짜임새 있게 했다.

기도의 결과는 세 가지로 나타난다.
①‘그래’ 하시면서 즉시 응답하시는데, 때에 따라서 구한 것 이상으로 넘치도록 응답하신다.
②‘안된다’ 하시면서 들어주시지 않는다(무응답도 응답이다)
③‘기다려라’ 하시면서 믿음이 좀더 성숙된 후에 응답하실 때가 있다.


3. 예배의 중심은 ‘예수님’으로 주의를 환기시켜라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라도, 속회 예배를 드리기 전의 준비 기도는 필수 요건이다. “주님, 사랑하는 속도원들이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지각없이 경솔하게 행동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난처하게 만들지 않게 하옵소서. 말해야 될 때와 침묵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준비 기도와 아울러 한 번쯤 공식적으로 속회 예배 예절과 주의 사항 등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부분만 끄집어내서 말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예배 예절, 예배 분위기, 지켜야 할 사항 등을 먼저 주지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다.

“비록 가정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지만 주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하셨으니 우리의 속회에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깨닫고 정성껏 예배를 드려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겠습니다. 예배 시간 중에 옆사람과 사적인 이야기로 소곤거리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예배 순서에 따라 사회나 기도를 맡으신 분은 미리 준비해 주시고 말씀을 전하는 시간에는 인도자가 말씀을 전한 뒤에, 적용시키는 토의 시간에 각자 돌아가면서 좋은 의견을 짧게 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1부 예배는 약 사십 분 동안 드리고 2부에서는 애찬을 나누며 성도의 교제를 갖겠습니다. 시간을 약 사십 분 정도입니다. 음식은 간단히 음료수와 빵 정도로 간단히 준비해 주시고, 장소를 제공해 주시는 분은 미리 음식을 준비해 두셔서 예배 시간에 분위기가 산만해지지 않도록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예배 시간에는 전화 수화기를 내려 놓아 전화받는 것도 자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늘 준비에 분주한 마르다보다 말씀 듣는 것을 사모한 마리아가 되도록 노력해 봅시다. 교제 시간에는 세상 모임과는 다르게 1부 예배의 말씀을 적용해서 간증이나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대화를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속회 시간이 될 줄 �

출처 : 나는 요즘 교회를 옮기고 싶다 - 김순희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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