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서 어떤 개인이 '제대로' 믿음 생활을 하는가 하는 기준으로
많이 거론되는 것이 십일조와 주일 성수이다.
안식일(지금의 토요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에 관련된 날인 부활절이나 초대교회 모임날 등이
안식일의 다음 날인 지금의 일요일이었다는 이유로
계명의 대상도 안식일에서 주일의 성수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를 하며
구약적 개념을 주일 예배 참석과 생업 금지 등에 적용한다.
물론 지금보다는 6,70년대가 훨씬 더 엄격했었다.
6,70년대엔 식당도 못가고 돈도 못쓰게 하였는데
이제는 목사님들도 별 주저없이 주일에 식당을 가게 되었지만
단지 주일에 예배참석하는 것을 주일 성수의 핵심내용으로 주장되고 있다.
예배중심주의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주일성수와 같은 궤를 이루는 것이 십일조이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예전에는 십일조를 다 안내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했고
많은 신자가 세금 공제 후의 수입에서 십분의 일을 계산해야 하느냐
세전 금액에서 계산해야 하느냐로 고민할 정도였다.
안식일 성수와 십일조가 이스라엘에서 지켜졌던 의미가
오늘날 한국이라고 해서 적용 안되는 것은 아니다.
안식일에는 깊은 뜻이 있고 십일조에는 사회적 교회적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런 뜻을 공통의 규약으로 삼는데 있어서
오늘의 교회가 옛 이스라엘의 상황 하에 자동으로 드는 것은 아니다.
만일 뜻이 있는 구약 규칙을 다 적용하자면
우리는 지금 이 둘 외에도 무수한 법규를 가지고 있어야 옳다.
그리고 어떤 신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기도 한데
안식일 성수나 십일조는 신약적-교회적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구약시대의 개념이다.
물론 우리가 재해석하여 자발적으로 적용할 수는 있다.
사실 이 문제는 바울 등이 그리스인 사이에 선교하여 교인이 늘어났을 때
이미 발생한 것이다.
이 두가지 뿐 아니라 많은 이스라엘 특유의 율법이 있었고
이방인들이 이것을 지켜야 하느냐 하는 것은 큰 논쟁거리였다.
그중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 할례 문제였다.
이스라엘이 선민임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할례제도이다.
여기서 다 거론하지 않겠지만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을 가른다는 인식은
구약 곳곳의 사건에 나타나있다.
유대인들로서는 양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며 스스로 나름대로는 유대교에 충실한 선지자였다.
그런데 원래 이방인은 유대교로 개종하면 다 할례를 받았다.
그러니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여
여호와 신앙의 유대교로 유입된 것인데, 어찌 할례를 배척할 수 있는가?
그런데 개척자인 바울과 바나바가 이것에 '프리'하였고
예루살렘 출신 지도자들은 이런 이방인 교회의 '타락'에 크게 반발하였다.
사도행전에 그 문제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이 회의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통보한 결과가 나온다.
놀랍게도 이 회의에선 성령께 묻는다거나 제비를 뽑는다거나 하지 않고
요즘의 회의처럼 사리를 따져서 회의를 했다.
그 결과가 이방인들에게는 할례를 비롯하여 모든 율법에서의 의무를 면하되
네가지 필수사항만을 지키라는 것이 되었다.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는 것이다.
네가지 중에 안식일 성수가 실수로 빠진 것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십일조는 아마 아예 거론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할례가 면제되는 판국이었던 것이다.
십일조는 혹시 교회재정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큰 문제로 보일까
할례가 거론되는 선민(구원) 상징 문제와 비교될 무게가 아니니까.
십일조 시비가 있었다는 것은 아예 신약에 나오지도 않고 권장된 적도 없지만
제사 음식 문제와 안식일 시비 문제는 그 후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바울이 롬 14:5에 이 '어떤 날'을 거룩히 여기는 문제를 다루며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권고한다.
주일 성수를 구해내기 위하여 이 '어떤 날'은 다른 절기들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도 보았지만
상식적으로 백번 생각해도 시비가 날 것은 안식일임이 틀림없다.
어차피 신약성서에 주일성수개념이 교회에 정착되거나 권고된 흔적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순대를 먹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놀랍지 않은가?
피를 먹는 문제는 신약시대 이방인에게 적용되기로 한 4규칙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문화적 문제이니 종교적 의미가 없다고 하며 '자유'한다.
유독 십일조와 주일 성수(그것도 안식이 아니라 예배 참석으로 의미가 개정된)가
교회의 중요한 규칙이며 많은 의미라 부여되고 설교제목과 사람판단기준이 된다.
만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고 한다면
어떤 규칙은 죽여도 살아나고 어떤 규칙은 살려도 죽는 것이 온당할 수 있는가?
저 4규칙을 배우고 외우는 일도 없고,
혼전 성관계도 문화가 그러니 노골적 금지나 치리를 포기하고 겨우 권고나 하는
궁색한 입장에 몰린 현대교회가
유독 이 주일성수와 십일조에 매달리는 동인이 무엇일까?
자기도 모르게 종교 브로커 집단이 생기고 그런 사회 역학이 형성된 것이라 의심하면 과할까?
하기야 바울이 싸우지나 말라던 제사고기 문제보다도 훨씬 덜 심각한
먹고(피우고) 마시는 문제로 사람의 신앙을 재단하던 한국교회이기도 하니까.
주5일 근무제 이야기가 나오니까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어긋난다고
여러 교회 지도자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님의 뜻을 말하며 반대한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인가?
그러다가 주5일제가 되자 그것을 되돌려야겠다고 결사항거하는 목사는 없다.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바뀐 것인가, 아니면 해도 안될 말은 안하는 지혜가 생긴 것인가?
그렇다면 애초에 하나님의 뜻을 전매특허한 것 처럼 도승지 노릇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주5일제가 되면 신자들이 1박2일로 놀러가서 주일 예배 수가 줄까봐 반대했다는 것으로
일반사회에선 알고 있다. 정말 그랬으면 참 창피한 일이다.
교단의 권위를 무시하는 무정부적이고 무질서한 교회를 만드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면서
사람들에게 종교의 굴레를 씌우는 사람들의 말을 양처럼 순종한다는 그런 미덕은 없으며
오히려 자유를 강탈당하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 바리새인처럼 종교의 권위를 사용하여 형제들을 속박하고
명예와 권세를 자기에게로 돌리는 지도자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늘 그런 것이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강도요 도적이라 했다.
바울 사도 역시 우리에게 굳건히 신앙의 본령과 자유를 지키라고 권유한다.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또 요즘으로 말하자면 거의 반교회 선동가 같은 말까지 한다.
고후 11: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11: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교만)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바울이 일생 투쟁한 적(敵)이 바로 자신들에게 우리한 계명과 규칙을 만들어내는
자칭 지도자들이었던 것이다.
모르고 그러는 목사는 몰라도, 알고 그러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믿어야 편할 것이다.ㅡ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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