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김의 자세-무익한 종 >>
본문 : 눅 17:7-10
(눅 17: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눅 17: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눅 17:9)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뿐이라 할지니라
< 무익한 종의 고백 >
오늘 본문에 한 종이 나옵니다.
그는 밭에 나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수고했다. 이제 나와 같이 식사하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인 밥을 차리고, 써빙을 다하고 나서야 자기 식사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킨대로 다했다고 상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종이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시킨 것을 다 한 후에 그 종이 할 수 있는 말은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 것 뿐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그 종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한 다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백은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나같은 죄인을 들어 주의 사역에 써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입니다."
이 고백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 작은 연못 >
예전 70년대 운동권 학생의 우상이라 할 수 있는 김민기 씨의 "작은연못"의 가사내용을 보면, 깊은 산 오솔길 옆 작은 연못에 붕어 두 마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로 싸워 한 마리가 죽고 살이 썩어 들어가 나중에는 그 연못의 물도 썩어 나머지 한 마리도 죽게 된다는 가사입니다.
이 노래는 다른 사람을 누르고 착취하여 자기만 잘 살아 보려고 할 때 결국은 모두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심을 고발하는 노래입니다.
다시말하면, 섬김이 없는 자신의 이기심을 따라 사는 삶의 종말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 여름 단기선교에서 인도의 히말라야 산맥의 심라에 있는 한 학교 방문했을 때에 인도의 성자라고 일컫는 선다싱의 초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선다싱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네팔 전도를 나섰을 때, 친구 한 사람과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 길가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행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그들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그 행인을 도울 여유가 없었습니다.
같이 가던 친구는 그냥 가자고 했지만 선다싱은 그 사람을 그대로 두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와 한참을 다투다가 결국 친구를 먼저 가도록 하고 그는 추위에 떨면서 쓰러져 있던 행인을 들쳐 업었습니다.
얼마동안 걸었을까요?
한참동안 행인을 업은 채 산길을 걸어가다 보니 먼저 떠났던 그 친구가 길에 쓰러져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혹독한 추위 때문에 자신의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고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다싱은 자기가 들쳐 없은 사람의 온기 때문에 오히려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고자 했던 섬김과 봉사가 결국은 자신을 돕고 자신의 생명을 구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섬김의 핵심입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섬겼는데 그것이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섬김을 요청하실 때 우리가 땔감처럼 소모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전략은 제로섬 게임이 아닙니다.
즉, 다른 사람이 유익을 누린만큼 내가 손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손해 볼 각오로 섬겼는데 결국에는 그 섬김으로 내가 살아나는 것이 기독교 섬김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의 섬김은 윈-윈 전략입니다. 곧 나에게도 도움이 되고, 공동체에도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섬김은 항상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만, 섬김의 자세는 그 유익의 결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설령 내가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이미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가 봉사하고 섬기는 유일한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직분은 명예직이 아닌 섬김에의 길이요. 그 길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의 길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무익한 나를 충성되이 여겨서 섬김의 자리로 불러주심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 은혜(카리스)와 은사(카리스마) >
성경은 섬김을 말할 때 은사에 따른 섬김을 주로 말합니다.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라고 하고, 은사는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헬라어의 '-마'는 추상명사의 구체성, 개별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은사는 우리가 받은 은혜가 개개인에게 구체화되고 개별화되어 주어진 것이 은사입니다.
'은혜'는 내가 기여한 것이 없으므로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고, '은사' 또한 내가 기여한 것이 없습니다.
은사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내가 노력해서 기여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재능과 은사를 비교해 보면,
재능은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만, 그것이 누구에게 유익이 돌아가는가 하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은사는 우리의 재능이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와 직결되는 단어는 섬김이라는 단어입니다.
섬김과 상관없는 은사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의 은사, 도둑질의 은사, 싸움의 은사, 이런 은사는 없습니다.
반면에 도둑질의 재능, 싸움에 재능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능이 섬김과 상관없게 될 때 은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때 그 재능이 은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은 다 은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사는 은혜가 구체화, 개별화 된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있는 은사가 우리의 노력의 대가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을 왜 주셨을까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의 기본 개념만 이해하고 있더라도
은사를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사가 발휘되는 곳에서는 자신이 높아지면 안됩니다.
그리스도가 높아지고 다른 사람들이 혜택을 누려야 하는 것이 은사의 기본개념 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섬김은 은사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고 그것은 받은 은혜가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섬김의 전제조건은 항상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은혜에 대한 자각이 없이 섬기면 항상 섬기면서도 불평하게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섬길 때 만이 충성되어 섬기고 나서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과 봉사는 무엇을 기대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은혜만 해도 크고 넘쳐서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섬기면 섬길수록 더 놀라운 은총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맡기운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가 죽도록 충성한 다음에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마땅히 하여야 할 바를 한 것 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 말씀을 다 듣고 난 뒤에 섬김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새삼 배우게 되었고, 귀한 섬김의 자리에 있게 되더라도 주님께 무익한 종임을 고백하므로 더욱 귀하게 태어날 자신을 꿈꿔보게 됩니다.
서로의 섬김속에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이들에게 함께하길 바랍니다.
-2002년 5월 13일 저희 회사 직장선교회에서 샘물교회 배형규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올립니다.
좋은 말씀들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