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생각 저런 마음/일상 에서,

충신과 간신과 양신, 펌

kwansoon 2007. 3. 28. 08:56

중앙일보 이훈범] 중국 역사에 풍도(馮道)라는 인물이 있다.

당(唐)이 망하고 송(宋)이 서기까지

오대십국(五代十國)의 난세 속에서 다섯 왕조, 여덟 성씨, 열한 명의 임금을 섬겼다.

 

고위관리로 30년, 재상으로만 20년을 지냈다.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벼슬학' 교과서였다.

아주 못된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문장.역사에 뛰어나고 주색을 멀리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신하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내팽개쳤다.

 

군주에게 직언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성은이 망극하여이다"만 외쳤다.

그러니 그가 의지한 나라들이 죄 망할 수밖에.

나라와 백성이 존망의 기로에 설 때마다

풍도는 백관을 이끌고 성을 나와 새 주인을 맞았다.

거란이 진(晉)을 멸했을 때도 거란 태종 야율덕광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 덕에 태부(太傅) 벼슬을 또 얻는다.

그에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오늘날 고관대작 나리들 중에도 비슷한 인물들을 볼 수 있다.

 매사 좋은 게 좋은 거고 오로지 관심은 윗사람 비위 맞추는 데 있다.

대통령의 궤변에 "강남 아파트를 팔고 분당으로 이사 가면 세금 내고도 돈이 남는다"고

친절한 해설을 덧붙이는 자칭 시장경제주의자 부총리가 있는가 하면,

대기업 회장의 '샌드위치 위기론'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위에서 한 소리 들었는지 하루 만에 침소봉대니 호들갑이니 안면을 바꾸는 장관도 있다.

 대통령의 방송 사랑을 익히 아는지라 공공기관운영법에서 KBS를 빼주려다

대통령이 KBS를 정면 비판하자 헷갈려 하며 공영방송사를 성토하는 장관도 있었다.

 다 열거하자면 공연히 입만 아프다.

풍도는 말년에 자신을 일컬어 "이리와 호랑이떼 틈바구니에서 입신양명했다"고 떠벌렸다.

군웅이 할거하던 혼란 속이었다지만 자신의 명리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나라와

백성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부총리나 장관들은 정녕 풍도의 입신양명이 부러운 걸까.

그렇게 하면 그처럼 평생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풍도 말고 다른 교훈을 권한다. 당나라 초기의 공신 위징(魏徵) 말이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보수적 충신론에 따르면 위징은 충신이 되지 못한다.

그는 수(隋) 말기 반란군 지도자 이밀의 책사였다가 당 고조에게 귀순해 황태자 건성의 참모가 됐으며, 건성이 아우 세민(태종)과의 경쟁에서 패한 뒤 태종 밑에서 재상까지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목숨을 다할 때까지 군주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태종은 위징의 바른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가도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그의 충고를 따랐다.

'정관의 치(貞觀之治)'가 가능했던 이유다.

그런 직언을 하는 데는 특별한 노하우가 필요한 법이다.

위징이 말하는 충신과 양신(良臣)의 구별이 그것이다.

 "양신은 스스로 명성을 누릴 뿐 아니라 군주에게도

위세와 명망을 가져다줘 자손만대 이어지게 한다.

하지만 충신은 결국 미움을 사 주살당하기 쉽고

군주에게 어리석음을 가져다줘 오명을 남기게 하고 결국 나라를 망치게 할 수 있다."

양신이 되는 데는 한 가지 원칙이면 족하다.

위로는 군주를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행복하게 한다는 믿음 말이다.

그러려면 훌륭한 군주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군주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이끌어야 한다.

 위징이 태종에게 한 지적을 들어보자.

 "초기에 폐하는 사람들에게 의견을 내놓도록 유도했습니다.

3년 뒤에도 충고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마지못해 의견을 듣지만 끝내 마음이 편치 않으십니다."

태종은 후에 고구려를 침략했다

 양만춘의 화살에 한쪽 눈만 잃고 돌아가는 길에

"위징이 살아 있었으면 고구려 정벌을 말렸을 것"이라며 땅을 쳤다고 한다.

 

나중에 대통령이 땅을 치기 전에,

백성들의 삶이 더 고단해지기 전에 한국의 위징이 나올 수는 없는 건지.

다음 정권에서도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이훈범 논설위원